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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종의 다리
작가 : 밈밈밈
작품등록일 : 201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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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꿰다_15
작성일 : 17-07-06     조회 : 333     추천 : 0     분량 : 7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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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지한은 요즘 계속 집무실 책상에 앉아 일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하는 일 무더기에 펜대를 쥐고 있던 그래지한의 손에서 혈관이 푸르딩딩하게 튀어나왔다. 손 안에 있는 불쌍한 펜이 운명을 다할 때쯤 제파도가 집무실에 들어와 백희에 대한 보고를 했다.

 

  "오늘 배키님은 루크 저하의 검술 스승 유루린단장에게 궁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배키님에 의해 시녀들도 함께 궁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래지한은 백희에 대한 매일의 보고를 듣자 '옳다구나!' 하고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그래지한은 제파도에게 자신의 앞자리를 앉으라고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라. 그 아이는 남녀상하의 구분이 없군."

 

  제파도는 자리에 앉으면서 속으로 뜨끔했다. 그래지한의 무덤덤한 말 속에 흥미로움을 놓치지 않은 제파도는 올 것이 왔음을 느꼈다.

 

  "배키님이 살던 세계는 남녀가 평등한 세계였다고 합니다."

  "지배자들은 어떠한 자가 지배했다지?"

  "소수민족이였기 때문에 마을에서 명망이 높은 나이든 자가 대표였다고 합니다."

 

  제파도의 말을 듣자 그래지한이 실소했다. 제파도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제왕의 눈동자가 불안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백희의 세계에 대해 사실대로 말했을때 그래지한이 어떤식으로 나올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기행을 일삼는 왕이기는 하나, 백희의 세계가 로코보다 훨씬 많은 백성의 손으로 대표자를 뽑는다는 소리는 아무리 그래지한이라도 듣기 불편할 것이다. 제파도는 백희와 말을 맞추어 놓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루크 저하의 학업 성취도가 좋습니다. 배키님에게 따라잡히지 않으려 아주 열심입니다."

  "좋군."

 

  자신의 아들과 관련된 일이건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래지한이었다. 왕이 흥미를 잃은 듯 무표정하게 창 밖을 바라보자 제파도는 다음 사안에 대해 입을 열었다.

 

  "전하. 바르디움 백작이 어젯밤 급사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래지한이 한 쪽 눈썹을 올리며 대답했다.

 

  "바르디움 백작?"

  "예. 어젯밤 수도의 고급 요정에서 '누군가'와 밀회를 가지던 백작이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으며 그 자리에서 급사했다고 합니다. 그 '누군가'는 백작이 발작하자 종업원을 부른 후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요정 종업원들의 증언을 모아 유추 해 본 결과 그자는 이웃 국인 아이시만 왕국의 첩자인 것으로 파악 됩니다."

 

  그래지한의 표정은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약간의 노기가 묻어 나왔다.

 

  "입 밖에 꺼내려고 했거나, 글로 쓰려고 했거나, 어떠한 형식으로든 발설하려 했군."

  "예. 식탁 위에는 종이 한장과 만년필이 올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멍청하기 짝이 없군."

 

  그래지한은 팔짱을 꼈다. 이제는 완연히 기분나쁘다는 얼굴로 눈썹을 찌푸리는 그래지한이었다.

  제파도는 그런 그래지한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왕이 길길이 날뛰며 바르디움 백작가의 가솔들을 쓸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얌전하지만 약 5년전만 해도 절대 왕권이 무엇인지 톡톡히 보여준 그래지한이었다.

  제파도의 불안한 마음을 전혀 모르는 그래지한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지 얼마 안되어서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계속 죽어나갔으면 좋겠군. 본보기로 말이야."

 

  제파도는 그런 왕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백희는 왼쪽 발을 서둘러 바닥에 디디며 빙글빙글 돌던 자신의 몸을 멈추었다. 어지러운 머리를 이리저리 저으며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인영 셋이 부채로 얼굴을 가린채 백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들 뒤로 수많은 시녀들이 도열해 따라오는 발소리도 들렸다.

  백희가 손가락으로 자기자신을 가리켰다.

 

  "저요?"

 

  백희의 맹한 소리에 부채를 가린 세명의 여인들 중 가운데 양 옆의 여인 둘이 기가 찬듯이 부채를 탁하고 접었다.

 

  "허. 어디서 배워먹은 예법이냐!"

  "쯧. 그 말이 사실이었나 봅니다."

 

  어느새 그녀들은 백희와 세발자국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백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뒤에 있던 시녀 위니는 백희가 루크왕자와 만났을 때 왕자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상기한 후 재빨리 고했다.

 

  "로코의 어머니이자 장미궁의 장이신 아게한느 왕비마마 이십니다."

 

  백희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배운대로 인사하려 했다. 하지만 드레스를 입지 않아 들어 올릴 치맛자락이 없던 백희는 아쉬운대로 남자들이 올리는 예를 올렸다.

 

  "왕비마마를 뵙습니다."

 

  백희가 왼손은 뒷짐을 지고 오른손은 배 앞으로 가져와 고개를 숙이자 가운데 있던 여인이 얼굴을 가리던 부채를 접었다. 그녀의 입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쏘듯이 날아왔다.

 

  "도깨비 같은 것. 신분도 모르는 천한 것이 사자궁에 기생하고 있다길래 내 친히 발걸음 하였다."

 

  명백한 적의에 백희의 입이 쩍하니 벌어졌다. 백희가 벙쩌있는 사이 왕비는 말을 덧붙였다.

 

  "요즘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하여 얼마나 미색이 짙은지 보러 왔건만 기대이하로구나. 저렇게 생기다만 것을. 하긴 전하께서는 항상 해괴한걸 좋아하셨지."

 

  이 여자가 지금 붙어보자는 건가 싶은 백희는 얼굴을 점점 야차 같이 일그러트리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몰라도 왕비정도 되는 사람이면 자신이 이세계인이라는 정체를 알고있어야 마땅했다. 정말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왕의 공식적인 부인인 왕비가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헌데 이상하게도 백희의 눈 앞에 있는 왕비를 포함한 여자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누군지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자신에게 절대 적의를 내 보이지 않았을 거라고 백희는 확고히 생각했다. 그 생각의 근거는 이곳의 최고 권력자 그래지한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가 떨어지는 걸 봤는데, 어떻게 소문이 안날 수 있지?"

 

  백희는 어느새 자신만의 생각에 돌입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한쪽 손은 턱을 매만지며 머리를 열심히 가동시켰다.

 

 

 

  그런 백희의 모습을 눈 앞에서 보고 있던 왕비 아게한느는 부아가 치밀었다. 자신의 앞에서 설설 기어도 모자랄 판에 감히 듣는 신청도 안하니 기도 차지 않았다.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표독스럽게 물들이며 백희를 노려보았다.

 

  아게한느는 욕심이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둘째 왕자 엔델을 낳고 얼마 있지 않아 왕비까지 되었음에도 왕의 관심을 독점 하고 싶어했다. 만약 자신을 재치고 장미궁 안의 다른 여인이 왕의 관심을 받는 날이면 그 여인은 호되게 매질을 받았다.

  욕심 많은 아게한느와 달리 그녀의 아들이자 로코의 2왕자 '엔델 그래지한 로코'는 더 없이 착했다. 그런 아들이 못미더운 아게한느는 어떻게 해서든 왕의 눈에 한번이라도 더 들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왕 그래지한이 아게한느를 일년에 세네번 부를까 말까한 만찬에 백희는 무려 한달 동안 15번이나 부름을 받았다. 그녀는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드러누웠다. 왕 그래지한이 어떤 사람인가. 자신의 욕망을 풀 때 아니고서는 절대 장미궁에 들어오지 않으며 왕비인 자신과도 함께 식사한적이 일년동안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분노한 아게한느는 충실한 '눈'들을 시켜서 백희에 대해 낱낱이 조사해 오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며칠동안 기다린 아게한느는 '눈'들의 보고를 듣고 크게 진노하였다.

 

  '신분이 불명확하며 사자궁에 세달 동안 머물었다고 하옵니다.'

 

  사자궁. 그 곳은 오직 왕과 왕자들, 그리고 왕의 허락이 떨어진 자들만이 기거 할 수 있는 철옹성같은 곳이다. 왕의 여자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왕비 아게한느도 드나들기 겁이 나는 곳이었다.

  아게한느는 자신이 사자궁에 발을 들이기 꺼렸기 때문에 백희를 장미궁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헌데 왕의 시종장 마일드는 왕비인 자신의 명령을 딱 잘라 거절하며, 왕의 명으로 인해 백희의 의지에 반하거나 또는 적의가 있다고 판단되는 자에게 백희를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아게한느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그녀는 분노에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사자궁에 발을 들인 것이다.

 

  "감히 내 앞에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어디 가문의 여식이냐! 당장 가문을 대라!"

 

  아게한느는 왕이 백희를 싸고 돈다면 백희의 가문에 압력을 넣을 요량으로 엄하게 다그쳤다. 평민이라면 그 집안을 길가에 나 앉게 만들것이고 귀족이라면 무슨 수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몰락 귀족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백희는 아게한느의 외침에 인상을 찌푸렸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풀어 보려고 노력했던 백희에게 아게한느의 높은 목소리는 아침 잠을 깨우는 자명종 소리보다 못했다.

 

  "말할 수 없는데요."

 

  백희는 자신이 임시로 받은 에시카르 후작의 수양딸이라는 신분이 있었으나 말하지 않았다. 혹시 괜히 말했다가 알지도 못하는 에시카르 후작가에 불똥이 튈까봐서였다.

 

  왕비와 양 옆에 있던 여자 둘은 백희의 대답에 벙쩠다. 남성복 차림인 백희의 행색만 보아도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데 말하는 꼬락서니는 사람의 기를 질리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감히 왕비마마의 면전에서 저런 무례한 언사라니! 옆에 있던 여자들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댔다.

 

  "네 이년! 너 같이 천한 것이 감히 왕비마마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도대체 무얼 믿고 망아지 마냥 건방을 떤단 말이냐!"

 

  그러자 백희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전하 믿고 이럽니다."

 

  여자 둘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했다. 그녀들은 곁눈질로 왕비의 표정을 살폈다. 아게한느의 얼굴은 그야말로 아귀가 따로 없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있는대로 악독하게 변한 채 온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려 백희의 뺨을 내려치려 했다.

 

  "헛!"

 

  백희는 본능적으로 아게한느의 손목을 잡았다. 뛰어난 반사신경이었다. 방금까지 운동을 하고 왔던터라 온몸의 근육이 먼저 반응 한 것이었다.

  복도에 있던 모든 여자들이 당황했다. 왕비 옆에 있는 여자들은 물론이요, 그 뒤에 도열한 수십명의 시녀들, 백희의 시녀들, 아게한느, 심지어 백희도 당황했다.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백희는 그냥 맞아 줄 걸 그랬나 싶다가도 잘못한게 뭐 있다고 맞길 맞아 하는 얼굴이 되어 아게한느의 사나운 눈을 도전적이게 받아쳐 보였다. 아게한느는 더욱 거세게 몸을 떨었다. 이건 치욕이었다. 아게한느가 얼굴을 분노로 물들이며 백희의 손을 쳐내었다.

 

  "이 무엄한! 당장 저것을 잡아들여라!"

 

  그러자 아게한느의 뒤에 서 있던 수십명의 시녀들이 움직였다. 백희와 백희의 시녀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했다. 아게한느의 시녀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녀들이 발악하며 반항하는 백희의 사지를 붙잡았을 때였다.

 

  "악! 이거 놔! 이 미친 여자야!"

  "저, 망측한!"

  "당장 매질을 해야합니다!"

  "매질은 너희들이 당해야 겠는데."

 

  갑자기 들려온 굵은 목소리에 모든 여자들이 복도의 끝자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게한느의 눈이 파르르 떨렸고 그녀의 양 옆에 서 있던 여자 둘은 순식간에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모든 시녀들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백희를 뺀 모든이들이 그래지한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하를 뵙사옵니다."

  "으악!"

 

  백희는 온 몸을 붙잡고 있던 아게한느의 시녀들의 손이 사라지자 돌바닥 위로 내동댕이 쳐져 비명이 절로 나왔다. 백희가 제대로 찧은 엉덩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그래지한의 목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지한이 왕궁 복도 끝자락에서 제파도와 시종장 마일드, 그리고 뒤로 늘어선 여러명의 시종들과 함께 우뚝 솟아 있었다. 그래지한의 얼굴을 본 백희는 이것이 지옥도에 들어왔을 때 보게 되는 문지기의 표정인가 싶었다. 이제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그래지한의 무시무시함에 백희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지한이 입을 열었다.

 

  "지금…… 내 허락도 없이 사자궁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내 사람을 건드려?"

 

  백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언제부터 왕의 사람이었지?'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그래지한을 쳐다 보았다.

 

 

 

  그래지한은 제파도의 보고를 들은 직후 곧장 집무실을 나섰다. 오늘은 더 이상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지한은 몸이 찌뿌듯해 산책을 하고 난 후 제파도와 저녁을 먹으며 백희의 세계에 대해 들은 것을 다 불으라고 할 참이었다.

 

  그래지한은 산책을 가기 위해 수많은 인원을 이끌고 로코에서 자랑하는 사자궁의 복도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사자궁에 얼마 있지도 않은 여자들의 앙칼진 목소리와 자신이 요즘 자주들었던 백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그래지한이 얼른 모퉁이를 돌고 복도에 들어서자 백희의 사지가 시녀들의 손에 붙잡혀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살심을 느끼게 된 그래지한이었다.

 

  "아게한느. 이게 무슨짓이냐."

 

  그래지한의 한기어린 목소리에 아게한느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아게한느는 눈치가 빠른 여인인지라 지금 그래지한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거짓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자신의 목이 날아갈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한 아게한느였다.

 

  "저, 저 아이가 전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의 장인 저에게 인사 한 번 오지않아 제가 이리 발걸음 하였사옵니다. 전하께서는 노여워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래지한은 얼굴을 종이 구기듯 구겼다. 결국 아게한느의 말도 안되는 질투였다. 그래지한은 백희에게 털끝 만큼도 손댈 생각이 없었기에 그런 오해 자체가 기분나쁨은 물론이요, 아무리 모른다지만 그 귀한 이세계인을 이리 무식하게 대하는 아게한느에게 분노했다.

 

  그런데 그래지한은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화가나는 것이다. 백희가 돌바닥 위에 패대기 쳐져 있는 모습이 몹시 짜증났다. 저 살집도 없는 어린것이 딱딱하고 차가운 돌 위에 주저 앉아있는게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다. 그래지한은 속으로 점심만찬을 매일 가져서 살 좀 찌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아게한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주체 못할 분노가 치밀었다. 입 안에서 욕지기가 맴돌았다. 왜 이렇게 화가날까 고민하던 그래지한은 백희가 귀한 이세계인이고 자기가 점찍은 며느리감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래지한은 지옥도에서 본 듯한 얼굴로 아게한느를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게한느 왕비를 폐위 시킨다."

  "저, 전하!"

 

  아게한느의 얼굴이 날벼락이라도 맞은것 마냥 흑빛이 되었다. 그녀 옆에 있던 여자들도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숨을 들이켰다. 이건 누가 보아도 심한 처사 였다. 일국의 왕비를 겨우 이런 일로 폐위시키겠다는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저지른 일에 상응하는 벌을 주면 모를까 폐위라니! 아게한느에게 당한 백희조차 '좀 심한거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 그래지한을 쳐다보았다.

  모든 사람이 그래지한의 말에 충격을 받은 이때 뒤에 있던 제파도가 남몰래 한숨을 쉬며 그래지한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전하. 아게한느 왕비마마를 폐위 시킨다면 배키님에게 해가 갈지도 모릅니다."

 

  그래지한이 눈썹을 찌푸렸다.

 

  "어째서?"

  "사람들은 왕비마마가 무슨 일로 폐위를 당하게 되었는지 궁금해 할 것이고 그 중심에 배키님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모든 이목이 배키님에게 집중 될 것 입니다."

 

  제파도의 일리 있는 말에 그래지한은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그는 백희가 되도록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지한은 잠시 침묵했다가 자신의 말을 번복할 수 밖에 없었다.

 

  "폐위는 하지 않겠다. 허나."

 

  그 말에 희망을 얻은 아게한느가 눈물을 글썽일 때 그래지한이 말을 덧붙였다.

 

  "아게한느 왕비와 페르니 비 그리고 아이라 비는 오늘 부로 내 허락 없이 단 한발자국도 장미궁 밖을 디딜수 없을 것이다. 이는 어명이다."

 

  아게한느 왕비, 그리고 양 옆에 서있던 페르니 비와 아이라 비는 그대로 온 몸을 굳혔다. 이 말은 곧 장미궁 안에서 평생동안 썩어가라는 소리였다. 그녀들은 감히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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