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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파도는 로코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명으로 그의 하루일과는 이러했다.
일어나서 아침을 먹은 후 백희와 루크에게 2시간 동안 파로와 로코의 역사에 대해 가르친다. 제파도는 로코역사를 눈감고도 줄줄 외울수 있을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수업준비에 큰 힘이 들지 않았다. 그 다음 그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단어를 외우게 하는 동안, 제파도는 왕도귀족들이 매일 아침 모여 하는 아침회의에 쏜살같이 달려가 참석한다. 수업 때문에 매번 30분 정도 늦기는 했지만 그 정도 지각은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아침 회의가 시작되면 귀족들이 왕에게 하는 기다란 아침인사를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제파도는 알짜배기 회의 내용만 쏙쏙 들은 후 다시 백희와 루크에게 달려간다. 글자공부를 봐주고 다 같이 점심을 먹은 후 제파도는 재상으로서의 일을 하러 떠난다. 그때 백희와 루크에게 숙제를 던져주는 것도 잊지않는다. 숙제를 던져 준 2시간 동안 재상의 일을 하다가 숙제검사를 하러 마지막으로 공부방에 간다. 남들은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하느냐고 묻겠지만 제파도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백희는 괜찮아도 루크는 그날 검사하지 않으면 숙제를 전혀 하지 않았다. 백희가 공부방에 남아서 숙제를 하는 덕에 그 모습을 보고 겨우 따라 하는 루크를 위해서는, 그날 배운 만큼 숙제를 내주고 2시간 뒤 바로 검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후로는 쭉 재상으로서의 일을 밤까지 계속한다.
제파도는 지금 백희와 루크에게 내준 숙제를 검사하기 위해 공부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방 안이 이상하게 너무나 조용했다. 불안감을 느낀 제파도는 고개를 빠르게 돌려 두 개 뿐인 책상을 확인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제파도의 표정이 절망감으로 물들면서 머리 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맴돌았다.
'설마 배키님 마저도 빼먹은 것인가.'
충격으로 눈 앞이 노래지던 제파도가 무너지는 몸을 겨우 가누며 칠판 앞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제파도는 공부를 아주 좋아했기에 루크가 공부를 싫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루크가 밥 먹듯이 수업을 빼먹었지만 책임감이 넘쳤던 제파도는 최선을 다해 루크를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루크에게 공부를 시키기 위한 여러 시도와 방법들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제파도가 한껏 좌절하고 있던 그때, 하늘에서 백희가 내려와 루크를 공부의 길로 인도하였다. 제파도는 드디어 자신의 간절함을 알아준 용께서 소원을 들어 주었다며 기뻐했다. 그는 재상으로서 일하고 두 명의 제자를 가르치느라 몸은 힘들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모든일을 해나갔다.
'그런데 배키님 마저…….'
제파도가 좌절하면서 칠판 앞의 두 책상을 바라보았다. 제파도는 자신의 가르치는 방법에 커다란 문제점이 있는건 아닌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상을 바라보던 그 때, 제파도의 안경 끝자락에서 평평했던 침대 위에 볼록 올라온 인영들이 걸렸다. 제파도는 재빨리 안경을 손으로 치켜올리며 다급하게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곧 제파도의 입에서 가벼운 너털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침대 위에서 루크와 백희가 세상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제파도는 그들의 곧 있을 궁술 훈련을 위해 깨울까 하다가 금새 고개를 저었다.
'두 분 다 피곤하실거야. 매일 아침 공부하고, 낮에는 몸을 움직이시니까.'
제파도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둘을 잠시 내려다 보았다. 백희와 루크의 키 차이가 상당했지만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한쌍 이었다.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제파도의 눈에 뭐가 씌었는지 그렇게 보였다. 제파도는 루크의 시종과 백희의 시녀들, 그리고 유루린에게 오늘은 편히들 쉬라고 말하러 갈 생각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공부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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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는 푹신한 침대에 얼굴을 비볐다. 포근한 느낌도 좋았지만 어디서 나는지 좋은 향이 루크의 코를 간질거렸다. 좋은 향기에 입술을 말아 올린 루크가 눈을 가물거리며 천천히 들어올렸다. 깜깜한 밤이었고 창문에서 환한 달이 빛을 내리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몸을 뒤척이던 루크가 옆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일어나자 보이는 공부방의 모습에 루크는 깨달았다.
'잠들었구나. 그런데 내가 왜 이 계집과 여기서 자고 있는거지?'
루크는 인상을 찌푸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공부방에서 백희와 얘기를 나눈 기억이 났다. 그러다 가슴이 짜증났고 그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어 책상만 바라보다가 잠들어 버렸다. 분명 책상에서 잠들었을 텐데 어째서 침대에 눕혀져 있는지 잘 몰랐지만 아마도 중간에 들어온 제파도가 옮겨줬을 것이다. 루크는 고개를 돌려 백희의 얼굴을 못마땅하게 내려다 보았다.
'그럼 이 계집도 잠이 들은 건가?'
루크가 아직 어리기는 하나 남자인 자신의 앞에서 계집인 백희가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 모습은 못마땅했다. 계집은 지아비가 아닌 다른 남자와 함부로 동침해서는 아니된다. 로코의 아이라면 일곱살짜리 코흘리개도 들었을 만한 말을 백희는 전혀 모르고 있는 듯 했다. 물론 백희가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테지만 말이다.
백색 달빛이 백희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것에 의지한 루크의 눈에 로코 사람들 보다 작은 백희의 오밀조밀한 눈코입이 들어왔다. 루크는 조그만 손을 들어 백희의 코를 눌러보았다. 동시에 다른 손으로 자신의 코도 만져보았다. 루크의 생각대로 백희의 코는 자신의 코보다 더 말랑말랑 거렸다. 그러자 백희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끄으응."
그 소리에 루크가 우스워했다. 재밌어서 몇번 더 찔러 보다 앓는 소리가 심해지자 이제 백희를 깨워야 겠다며 어깨를 붙잡으려고 할 때였다.
백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물이 백희의 콧대를 지나 다른 쪽 눈으로 옮겨갔다. 곧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베갯잇을 적셨다.
루크의 작은 손은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루크는 몸과 사고를 동시에 정지시킨 채 젖은 백희의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얼마 안있어 루크는 안절부절 못하게 되었다. 자신이 괴롭혀서 악몽을 꾸는 것 같았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으…으…."
백희는 괴로운 표정으로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들을 수 없는 앓는 소리를 냈다. 미안한 루크가 이제는 정말로 깨우려고 백희의 어깨를 잡았을 때였다.
그 순간.
휙!
"으앗!"
루크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온몸이 침대로 끌려 눕혀지면서 순식간에 시야가 반전 되는게 느껴졌다. 다시 천장이 보였고 침대에 달린 커튼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백희의 손이 느껴졌다. 루크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루크는 처음으로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안겨보았다. 어머니에게 안겨보았던 기억도 일곱살 이후로는 없었다. 돌처럼 굳어버린 루크의 머리속은 난장판이었다.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이… 이 건방진 계집을 사정없이 깨우는게 맞을까? 난 왕자인데 왜 고민을 하고 있지? 그냥 깨우면 되잖아. 그런데 이 계집은 부끄러운것도 모르고! 헌데 가슴 속은 왜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냐.'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루크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고개를 돌려 백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희의 얼굴이 루크의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지척에 있었다. 당황한 루크는 그대로 거칠게 백희의 손을 치워내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공부방을 뛰쳐나가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음날 백희는 공부방에서 깨어났다. 하루에 무려 열두시간을 훨씬 넘게 자버린 백희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자신을 자책했고 괜한 제파도에게 원망을 했다.
"제파도 선생님, 왜 안깨워 주셨어요."
백희가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 대자 제파도가 말했다.
"하하. 두 분이 너무 곤히 잠들어 있어 차마 깨우지 못했습니다. 그나저나 피곤이 많이 쌓이셨는지 하루 내리 푹 주무셨군요."
수업을 위해 들어온 제파도는 백희가 공부방에서 시녀들이 가져다준 아침식사를 했고, 가볍게 세수를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파도는 하루 종일 잠든 백희를 보며 너무 많은 공부량을 내주었다고 반성하면서 숙제를 줄여야 겠다고 생각했다.
백희는 속으로 같이 잠들었던 루크를 원망했다.
'먼저 깼으면 나도 깨웠어야지. 치사하게 가버리냐.'
속으로 궁시렁 거리면서 백희는 루크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수업시간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루크가 오지 않았다. 제파도와 백희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은 루크를 이상하게 여겼다. 백희와 수업을 하게 된 이후로 루크는 수업을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일인지 3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루크 때문에 둘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제파도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무슨일이 생겼나봐요. 저는 루크님의 방으로 가볼 테니 배키님은 왕실훈련장으로 가보겠어요?"
"네. 그럴게요."
둘은 서둘러 공부방을 나섰다.
백희는 루크가 방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어제 낮잠을 길게 잤던 것이 원흉이 되어 밤새 잠을 설치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잠들었을 거라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고로 백희는 아주 느긋한 걸음을 걸으며 아침 산책하는 기분으로 훈련장을 향했다.
기사훈련장에서 훈련하던 기사들의 구령소리가 들려왔다. 백희의 시녀들을 보고 따라오는 눈빛 들이 느껴졌다. 매번 들었던 '여자다.' 라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고, 백희무리가 익숙해진 몇몇 기사들은 시녀들에게 눈을 찡긋 거리거나, 다른 이들은 더욱 멋진 검술 솜씨를 뽐내려고 노력했다. 백희는 속으로 웃으며 왕실훈련장으로 들어갔다.
루크가 방에 있을거라고 확신했던 백희는 느긋하게 왕실훈련장을 한바퀴를 돌고나서 공부방에 다시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백희의 귓가에 어린아이의 구령소리가 들려왔다.
"이얍!"
루크가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백희는 루크가 이곳에 있을 줄 몰랐기에 당황한 얼굴로 루크를 쳐다 보았다. 루크의 온 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 옷이 다 젖어있었다. 이른 아침 부터 얼마나 목검을 휘둘러 댔으면 저럴까 하고 백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루크는 아직 백희가 온 줄 모르고 있었다. 백희는 서둘러 루크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루크 왕자님. 왜 수업에 안들어 오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루크는 백희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 보았다. 루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백희를 쳐다 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홱' 소리를 내며 다시 뒤로 돌았다. 백희는 어이가 없었다.
"뭐에요? 나 좀 봐 봐요."
그러자 뒤통수만 보여주는 루크에게서 목소리가 나왔다.
"오늘 공부할 기분이 아니다! 나는 오늘 하루종일 검술에 매진할 것이니 너는 당장 돌아가거라!"
루크의 말에 백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동안 자신을 따라 열심히 공부하던 루크의 모습을 떠올린 백희는 이해가 가지않는 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이래요? 우선 저 좀 보고 말해봐요."
그러자 루크가 앞으로 걸으면서, 즉 백희에게서 조금 멀어지면서 말했다.
"싫, 싫다! 너 혼자 공부하라니까!"
백희는 루크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주제에 당당하긴 어찌나 당당하던지 건방지기 까지했던 루크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낌새를 눈치챈 것이다. 백희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으며 루크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허락도 없이 루크의 어깨를 잡아 자신을 보게끔 작은 몸을 돌려세웠다. 백희의 뒤에 있던 시녀들의 작은 기함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쓰이지 않았다. 백희는 루크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루크의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루크는 백희의 거친 손길에 깜짝놀라 소리쳤다.
"이게 무슨짓이냐!"
"뭐야, 너 열있어?!"
백희의 심각한 외침에 루크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
"이렇게 열이 심한데 무슨 검술 훈련이야! 당장 의사한테 가야겠어! 위니! 얼른 안내해 주세요!"
시녀 위니가 재빠르게 움직였고 백희는 그녀를 따라 루크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영문을 모르는 루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백희의 손에 이끌려 갔다.
사실 루크는 어젯밤 백희의 얼굴을 보고 제대로 잠이 오지 않았다. 백희의 얼굴이 계속 생각 났고 가슴이 너무 움직여 아프기까지했다. 그렇게 밤을 꼴딱 새운 루크는 새벽부터 훈련장에 나가 검을 휘둘렀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하면 조금 나아질것 같아서였다. 한창 땀을 흘리고 있는데 갑자기 백희가 쳐들어왔다. 루크는 백희를 보자마자 온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져 자기도 모르게 백희의 얼굴을 피해버렸다. 이유도 없이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백희가 몸을 돌려세웠고 루크의 눈에 백희의 얼굴이 들어오자 더 더욱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백희가 다시 외쳤다.
"이렇게 아픈데 몸을 움직이면 어떡해요. 아직 애, 어린데."
백희의 걱정하는 말끝에 루크의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가 들어갔으나 루크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저 맞잡은 두 손이 너무 뜨거웠고, 어젯밤 느꼈던 좋은 향기가 루크의 가슴을 더욱 짜증나게 했다.
백희가 루크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휴. 더 빨개졌네. 괜찮아요? 안 어지러워?"
루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희의 말로 미루어 보아 자신은 지금 아픈것 같았다.
'아파서 그런거구나!'
그러자 루크의 머리가 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