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 뚜벅
"설마 그런 비밀통로가 있었을 줄이야..."
복도를 빠르게 걸으며 이자크가 중얼거린다.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메이스가 베스 성의 길목에 있는 마물의 숲을 지날 수도 없을 뿐더러 설령 성 앞에 도착했더라도 열쇠가 없어 들어가지 못했어야 한다.
그 애송이는 이런 자신의 예상을 산산히 깨고 숲을 통과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비밀통로를 찾아내 결국 베스 성 안으로 진입했다.
'포기를 모르는 남자'가 인생 좌우명인 이자크에게 그런 메이스의 행동은 호감을 주기 충분했다.
"과연 서재까지 무사히 도착했을까..."
혼자 중얼거리던 이자크가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오른 주먹을 측면으로 내질렀다.
뻐어어어엉!
단순히 주먹을 한 번 내질렀을 뿐인데 압축된 공기가 터져나가며 해골창병이 산산조각 났다.
뻐어어엉! 뻐어어엉! 뻐어어어어어엉!
이자크가 주먹을 한 번 내지를 때 마다 해골들이 산산히 부숴져 나간다.
말 그대로 한 방에 한 놈, 원샷 원킬.
이자크가 마침내 홀 내에 눈에 보이는 해골들을 모두 처치하였을 때 한 발의 화살이 이자크의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온다.
쉬이익!
슬쩍
고개만 옆으로 까딱 젖혀 피한 이자크가 엄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긴다.
퍼엉!
공기가 터져나가며 무언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행동과 달리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파삭!
무언가 바스라지는 소리와 함께 이자크와 족히 50미터는 떨어져 있던 해골궁수의 머리가 산산히 부숴졌다.
"탄지(彈指)는 오랜만이군"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중얼거린 이자크가 계단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고민도 없이 단숨에 3층까지 올라온 이자크가 라우스의 서재가 있는 방향으로 똑바로 직진했다.
그리고...
덜컥!
곧바로 서재 문고리를 잡아당긴 이자크가 잠겨 있는 문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로막는 것은 모조리 부순다"
빠르게 뒤로 세 걸음 가량 물러 선 이자크가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길게 심호흡한다.
"스으으으읍~ 후우우우우"
이윽고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오른쪽 주먹을 내뻗는다.
"으럇!"
꽝!!!!!!!!!
지금까지와 비교도 되지 않는 굉음과 함께 서재 출입문이 산산조각 났다.
잠시 주먹을 쥐락펴락 하던 이자크가 서서히 먼지가 걷히기 시작하는 서재 내부에 시선을 집중한다.
"...!"
마침내 눈을 까뒤집고 쓰러져 있는 메이스를 발견한 이자크가 눈을 크게 떴다.
*****************
"끄으으으으..."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린 메이스가 순간 느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으..."
"살고 싶으면 입 다물어라"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메이스가 눈을 크게 뜬다.
'이 목소리는... 이자크? 아니 근데 게임인데 고통이 뭐 이렇게 극현실주의야, 끄으으윽'
메이스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다시 한 번 이자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니 몸 안에서 레드 티어즈의 기운과 라우스의 기운이 충돌하고 있다. 똑바로 정신 안차리면... 죽는다"
'그걸 어떻게!'
경악한 메이스가 이내 라우스가 남긴 두루마리를 기억하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끄으..."
짧은 신음소리에 곧바로 이자크의 호통이 날아온다.
"참아라! 지금 입을 열면 죽는다. 아니, 모험가인 니가 죽지는 않겠지만... 니 몸안의 기운들은 모조리 소멸할 것이다"
"...!"
'마치 무협지의 주화입마 상태가 이럴까' 실 없는 생각을 하던 메이스가 귓가를 때리는 이자크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뭐...뭐...? 소멸? 내가 어떻게 전직한건데, 어떻게 얻은 힘인데 그냥 다 날아간다고?'
메이스가 이를 악물었다.
'절대 안돼!'
주르륵
악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찌른다.
가까스로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메이스의 귓가로 계속해서 이자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레드 티어즈의 기운은 마치 불꽃과 같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지속적으로 강한 힘을 방출한다. 그리고 그 힘은 모든 것을 불태우듯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강해지지"
"..."
"반대로 라우스의 기운은 바다와 같다. 평소에는 한 없이 잠잠하고, 고요하지. 하지만 태풍을 만난 바다는... 성난 파도와 함께 숨겨왔던 그 무시무시함을 일순간 방출시킨다"
"끄..."
"참아라! 그런 상극의 두 기운이 지금 니 몸 안에서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지금 니 수준으로 두 기운을 융합시킬 수는 없을 터! 내 기에 따라 두 기운을 따로 떼어 놓을 것이다"
이자크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등 뒤 이자크의 손바닥과 맞닿은 부분에서 또 다른 광폭한 기운이 메이스의 몸 안으로 진입한다.
"컥!"
"천천히... 천천히 내 기를 따라라"
이자크가 이끄는 기에 따라 내부의 두 기운을 천천히 분리시킨다.
명치 한 가운데를 중심으로 라우스의 기운은 심장이 있는 몸 좌측 편에, 레드 티어즈의 기운은 몸 우측 편에 자리잡아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파앗!
[ '라우스의 정수'를 완전히 흡수합니다! ]
[ 라우스의 마법과 일부 기억을 습득합니다! ]
[ 현재 대상자의 수준으로는 라우스의 1클래스 마법 일부만 사용 가능합니다! ]
[ 또 다른 기운이 복부에 자리 잡습니다! ]
[ 극심한 고통으로 빈사상태에 빠집니다! ]
털썩
끊임없이 떠오르는 홀로그램을 뒤로 하고 메이스가 그대로 모로 쓰러져 다시 정신을 잃었다.
"설마 내 기운마저 집어 삼킬 줄이야..."
지친 표정으로 중얼거린 이자크가 쓰러진 메이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이제는 완전히 고통이 사라진 듯 평온한 얼굴의 메이스를 보며 피식 웃은 이자크가 곰곰히 생각한다.
'현재 놈의 몸 좌측에는 라우스의 기운이, 우측에는 레드 티어즈의 기운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기운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중간에서 내 기운이 일종의 보호막 역할을 하고 있는 상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있던 이자크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만약... 훗날 세 가지 기운을 하나로 합칠 수만 있다면..."
*****************
"히히... 정의의 철퇴를... 내려주마... 개자식들... 헉!"
침까지 흘리며 잠꼬대하던 메이스가 순간 눈을 부릅 떴다.
'이 미친... 박영우가 등에 칼을 꽂는 꿈이라니...'
"깼나?"
양 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등을 쓰다 듬으려던 메이스가 순간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스승님?"
"누가 니 스승...! 하아~ 말 해봐야 나만 손해지"
"헤헷, 불초 제자. 오랜만에 인사 드리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메이스를 기가 찬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자크가 말을 잇는다.
"왜 내 제자가 되고 싶은 거지?"
"예?"
"이전의 너는 쥐뿔도 없는 평범한 모험가 나부랭이였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
"5대 명검이라는 레드 티어즈를 얻고 대륙 최고의 마법사 중 하나인 라우스의 힘 마저 얻었다. 그 뿐이냐? 이제는 일부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전설, 셜로크의 힘 마저 얻었지"
"..."
"그 상황에서 굳이 내 힘이 필요한가? 지금 니 몸 안의 기운들만 온전히... 아니, 그 힘의 반의 반만 흡수하더라도 너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을 것이다"
"..."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메이스를 잠시 바라보던 이자크가 다시 입을 연다.
"지금부터라도 그 힘들이나 최대한 흡수할 수 있도록..."
"강해지고 싶습니다"
이자크가 자신의 말을 중간에서 끊은 메이스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사실 처음에는... 이자크님의 생각대로 조금이라도 풍족한 제 삶을 위해, 하찮은 복수심을 위해 강해지고자 했습니다.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그럼..."
"단!"
"...?"
"셜로크님의 기억을 보면서 처음으로 풍족한 삶과 복수 외에 또 다른 목표가 생겼습니다"
"..."
"국민을 단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납치하고 강간하는 돼지새끼, 거슬린다는 이유로 부인이 보는 앞에서 스스럼없이 남편의 목을 날리는 개새끼,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벌레보다 못한 놈들"
"..."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 짐승보다 못한 놈들을 제 손으로 직접 응징하고 싶습니다. 다시는 억울하게 고통받는 국민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더욱 더 강해지고 싶습니다"
메이스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이자크가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중세시대가 배경인 판타스 대륙에서도 귀족 중의 귀족인 전직 왕실기사단장 이자크에게 메이스가 말하는 '국민' 이라는 개념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 였으니까.
잠시 턱을 쓰다 듬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이자크가 마침내 입을 연다.
"가르쳐주마"
"...예?"
"내 기술, 너에게 가르쳐 주마"
메이스가 감격에 찬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자 이자크가 말을 잇는다.
"대신... 체술만 가르쳐 주겠다"
대륙에 손에 꼽히는 대검호에게 검술까지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춤 마저 덩실덩실 추고 싶던 메이스가 이자크의 말에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
"그게 무슨..."
"셜로크 폰 호므즈가 주로 사용한 무기는 창. 어느 한 분야에 집중적으로 몰두하더라도 그 분야에서 대성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더군다나 그 분야가 무(武) 라면, 그 무 중에서도 최상위로 꼽히는 셜로크의 무 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메이스를 바라보던 이자크가 말을 잇는다.
"그리고... 사실 내가 검보다는 체술이 더 자신 있다"
"예?"
"검이라면 대륙에 나보다 강한 검사들이 분명 있지만... 체술, 맨손 싸움이라면..."
잠시 말 끝을 흐리던 이자크가 메이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
"전투 중에는 어떤 상황도 생길 수 있다. 갑자기 무기를 놓칠 수도 있고, 마나가 고갈되어 마법 마저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지. 그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말을 마친 이자크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들어 보였다.
"이 두 주먹, 그리고 몸뚱아리 뿐"
"..."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그 몸뚱아리를 전투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내 검술의 기본 정도 뿐이다"
자신의 말에도 여전히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메이스를 잠시 바라보던 이자크가 고개를 좌, 우로 꺾으며 메이스에게 도발하듯 손짓한다.
"오라! 직접 보여주지"
메이스가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자크가 중얼거린다.
"먼저 올 생각이 없다면... 내가 간다"
스팟!
짧은 파공음과 함께 이자크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메이스가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