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차분하게 입을 연 알시아였지만 감정이 고조되자 말이 꼬였다. 그리고 나중에 그 현실을 깨닫고 나서는 횡설수설했다.
바로 그런 점이 그녀의 매력 중 하나였지만 혹자는 마왕으로서 자질이 부족한 것 중 하나로 꼽았다.
하지만 그녀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마계 마족은 바로 그런 점을 좋아했다. 패트릭도 그 중 하나였고, 12 마왕들도 그러했다.
“알시아님이 그렇게 까지 말씀하신다면 저 역시 찬성하겠습니다. 대신 너무 무리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결국에는 패트릭이 두 손을 들었다. 늘 이런 식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애초에 안전히 가는 것과 그냥 거쳐가는 것 등의 두가지 선택문을 제시했기 때문에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마워요. 무리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께요.”
알시아는 기분이 좋은 듯 미소지어 보였다. 패트릭은 겉으로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약간은 긴장을 했다.
말은 잘만 하고 있지만 실제로 지상계 미궁의 마족과 조우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갈시아님이 계셨다면…’
패트릭은 잠시 옛날 생각을 했다.
그때는 갈시아와 함께 지상계 미궁을 탐사했는데 그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 모든 위험 요소를 피하고 지름길을 알고 부비트랩 등의 설치 유무을 미리 파악해 두어 매우 순조로운 탐사를 했었다.
자기가 미궁에 들어왔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번이 그에게 있어서 첫 번째 미궁 탐사가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점이 결코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전 이번에 진정한 탐사의 의미를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패트릭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누군가의 도움 또는 지도를 통해 모든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하는 모험 따위는 의미가 없다고 말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육감에 의지해 나아가는 것이 정말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개는 주인을 닮는다고 하던가요.’
패트릭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험을 즐기게 되었다. 천성적으로 모험가 기질이 다분하고, 방랑벽이 있던 갈시아를 보필했기 때문일 것이다.
알시아 역시 피를 속일수는 없었다. 사전에 미리 계획을 세워놓고 순탄한 길을 가려던 그의 생각을 바꾼 것은 바로 그녀였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란 말이 딱 들어 맞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고 계세요?“
알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패트릭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과거의 회상과 미래에 대한 마음의 준비, 그리고 현실의 상황 파악 등을 통해서 평상시의 페이스로 돌아왔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패트릭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소리없이 발걸음을 떼며 걸어나갔다. 알시아도 그의 뒤를 따라 벽에 바싹 붙어 다녔다.
어느 정도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통로 저편에서 희미한 빛이 아른거렸다.
“혹시 저 곳인가요?”
알시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까지 쫓아온 빛보다 좀 더 밝은 것 같아 확실히 뭔가 달라 보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패트릭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빛이 새어나오는 통로 입구 사이로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고개를 쭉 빼고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주위를 살폈다.
“우선 상대편의 전력을 알 수 없으니 싸우기에 앞서 충분한 정찰을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물론 싸움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알시아님과 제 실력으로 무난히 헤쳐 나갈 수도 있겠지만 미궁에 흠이 가지 않도록 주의 해야합니다.”
패트릭은 검지 손가락을 척 치켜 든 채 작은 목소리로 이 미궁에서 주의해야할 사항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미궁의 주인 되시는 분은 평소에는 온화한 분이시지만 한번 크게 화가 나시면 주체를 잘 못하시는 분이거든요.”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기 때문에 알시아는 단 한자도 놓치지 않고 진지하게 들었다.
“그런데 이 미궁의 주인은 누구시죠?”
“아, 곧 만나보게 되실 겁니다. 이 곳에 온 목적이 그분을 만나 뵙기 위함이었으니.”
“그럼 그분이 다른 마왕님들이 말씀하신 현자님이신가요?”
“저희들에겐 그렇게 불리시고 있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현자란 칭호를 그리 달가워 하시지 않으시더군요.”
패트릭이 쓴웃음을 지으며 알시아의 질문에 답할 때였다.
음메에에~
어디에선가 갑자기 성난 황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주위의 벽과 바닥을 진동시킬 정도로 컸다. 두 사람은 황소의 울음소리에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안쪽은 상당히 밝아서 패트릭이 푸른 광구를 띄우지 않아도 주변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확실히 미궁의 마족과 조우한 모험가 파티가 맞는 것 같군요.”
천장엔 이미 노란 광구가 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패트릭이 만들어 내던 푸른 광구와는 다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공중에 뜬 채 정지된 상태였다.
인간, 그것도 성직자가 사용하는 빛 계열의 마법이었다.
“이것은 성직자의 라이트(Light)마법입니다.”
“앗, 그것보다 저기 좀 보세요!”
패트릭이 막 라이트에 대해 설명을 할 찰나 알시아가 중간에 탁 끊으며 소리쳤다.
지금은 라이트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패트릭은 노란 광구에서 눈을 떼고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 저것은…”
패트릭이 외알 안경을 살짝 들어보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No. 6 - 인간 모험가와 반인반수의 사투
뜨거운 열기와 날카로운 쇳소리. 그 두 가지로 미궁 안을 가득 채우며 지칠 줄 모르고 싸우는 무리가 있다.
입구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보통 인간보다 배나 좋은 시력을 가진 알시아와 패트릭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치열한 사투의 현장을 말이다.
"저 생물은 분명!“
라이트 마법의 불빛 아래, 모험가로 추정되는 인간 무리가 커다란 생물 하나와 맞부딪혀 싸우고 있었다.
인간 무리와 싸우고 있는 커다란 생물은 휘어진 뿔이 두 개 달린 소머리에 전신이 하얀 털로 뒤덮힌 인간의 몸을 가졌으며 덩치가 무척 커서 외모만으로도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음메에에!!”
소머리 거인의 울음소리가 음침한 미궁 안에서 크게 울려 펴졌다.
그것은 창칼이 부딪히는 금속음을 묻어 버리고, 차가운 대리석 벽과 바닥을 진동시켰다.
쾅, 쾅.
소머리 거인이 발굽으로 두어번 땅을 박차고 양손으로 단단히 움켜쥔 배틀엑스(BattleAxe)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인간 모험가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건 누가보아도 강하고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스치기만 해도, 그대로 세상 하직한다는 것은 안봐도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소머리 거인이 들고 있는 배틀엑스의 크기는 지금 그에 맞서 싸우는 인간 크기만 했다.
그림자 또한 엄청나게 커서 입구 근처에 서있는 알시아 일행에게 비출 정도였다.
“미노타우로스(MinoTauros)”
알시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곧 미노타우로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미노타우로스는 소의 머리와 인간의 몸을 가진 반인반수 마족으로 미궁의 단골 파수꾼으로 지능은 낮고 공격적인 성향을 띄웠으며 단독으로 행동하는 거친 전사였다.
“휴우~어쩌면 이렇게 된 게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요.”
패트릭은 미노타우로스를 만났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안심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지능이 낮지만 대신 오감이 발달되어 있다.
발달된 오감을 통해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게 한 다음 종속시키면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것은 힘세고 머리나쁜 마족에게 사용하는 회유책 중 가장 간편한 방법이었다.
“미노타우로스는 무력으로 설득시키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패트릭을 비롯한 대부분의 상급마족들은 미노타우로스 같은 마족만큼은 정중하게 설득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군단 편성 때 보병이 되어 백병전에 활약을 시킬 수는 있지만 내정의 측면에서 볼 때는 경비와 잡역을 빼면 정말 쓸모가 없었다.
“한 명이라도 더 인재가 필요한 시기니 미노타우로스를 설득시키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패트릭이니까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그가 한 말에는 강한 힘과 마력을 지닌 상급 마족이란 배경이 뒷받침해주었다.
“패트릭의 말도 옳아요. 하지만 우리 마족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보면 어떻겠어요?”
알시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일단 마계 마족의 입장에서 보통 미노타우로스는 중하급에 속하기 때문에 별로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급 혹은 몇 단계 아래나 그보다 훨씬 약한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평가가 확 달라질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군요.”
패트릭은 알시아의 현명함에 감탄하면서 몇번이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 사람이 그렇게 미노타우로스에 대한 평가를 나누고 있을 때 눈앞에 벌어진 사투는 더욱 더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 소 대가리 자식!”
“제발 좀 쓰러져라.”
선두 에 선 전사 둘이 악을 쓰며 검과 창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들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전투에 임했지만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무기도 조잡하기 짝이 없어 제대로된 타격 한번 입히지 못했다.
가끔 성공하는 공격도 단순하게 미노타우로스가 가진 거체의 약점. 몸이 워낙 커서 움직임이 둔하기 때문에 맞은 것뿐. 중상은커녕 찰과상 하나도 제대로 입히지 못했다.
“음메에에~~”
반면 미노타우로스의 배틀엑스는 쉬지 않고 바람을 갈랐다. 쌍 도끼날은 쇠울음 소리를 내며 희생자를 갈구했다.
목이든 머리든 몸통이든. 희생자의 모든 것이 쌍 도끼날의 목표가 되었다.
미노타우로스가 일반적인 무기술을 익히지 않은 것에 대해 인간 전사들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야성과 괴력으로 무장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하기 힘들었다.
“인간 쪽이 밀리고 있습니다.”
“미노타우로스가 다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군요.”
미노타우로스의 상태를 확인한 알시아는 안심했다.
인간 전사들이 핀치에 몰려 있지만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기 때문에 위험에 처한 인간을 구해줘야할 의무가 없었다.
“음머어어~”
미노타우로스의 배틀엑스가 전사들의 머리통을 노렸다.
인간 전사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반격할 엄두도 못내고 도망다녔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싸움은 정말 못했지만 도망치는 실력하나는 일품이었다.
“푸르르…….”
미노타우로스는 자신의 공격이 계속 빗나가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갈색 눈을 치켜 뜨고 콧김을 뿜으며 발굽으로 땅을 쾅쾅 찼다.
그리고 곧장 인간 전사들을 향해 돌격했다.
쿠구구구…
지면을 울리는 발굽 소리에 투구와 가죽 갑옷이 흔들렸다.
물론 그전에 무기를 잡은 손과 땅을 딛은 발이 벌벌 떨렸다.
“으으으…….”
인간 전사들의 사기는 떨어질 때로 떨어져 거의 혼란 상태에 이르렀다. 그들은 공포와 떨림으로 인해 미노타우로스의 돌격을 피하지 못했다.
무기를 내던지고 머리를 부여 잡고는 몸을 웅크릴 뿐이다.
“으, 으아아아~~~”
인간 전사들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크게 비명을 질렀다. 누구나 죽음에 직면하면 공포를 느끼겠지만 그들은 그게 보통 사람보다 더 심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입니다. 검과 창을 든 전사가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패트릭은 인간 전사들의 추태를 눈뜨고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앗!”
그런데 바로 그때 알시아의 눈동자에 놀람이란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미노타우로스의 맹렬한 돌진에도 불구하고 인간 전사들은 무사했다.
그들은 머리 바로 위의 벽면에 찍힌 도끼날을 보고, 사색이 다 된 얼굴로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미노타우로스는 킁킁 콧김을 뿜으며 도망치는 인간 전사들을 내버려 두고 자신의 등 뒤에 달라붙은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안녕~~”
미노타우로스의 어깨 너머로 한 소녀가 고개를 쑥 내밀며 활기차게 인사했다.
금발 머리를 붉은 두건으로 질끈 동여멨고, 가벼운 복장에 가늘고 유연한 몸매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은이빨의 토파즈 등장!”
토파즈는 특정의 누군가에게 할 것 없이 혼자서 자기 소개를 마치고 살짝 윙크를 해보였다.
갑자기 분위기가 가벼워지자 알시아와 패트릭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음머어어!!!”
미노타우로스는 토파즈의 장난질이 짜증 나는지 온 몸을 뒤흔들며 미친듯이 날뛰었다.
그녀는 마치 로데오 경기에 참가한 선수처럼 능숙하게 미노타우르스의 등에 탔다.
격렬하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 부드럽고 유연하게 반응했다.
“자, 이제부터 즐거운 쇼가 시작됩니다.”
토파즈는 맨 처음 미노타우로스의 양 어깨에 박아 놓은 단검을 빼는 동시에 넓은 등짝을 박차고 위로 솟구쳐 올라 두어 바퀴 공중 제비를 돌았다.
미노타우로스는 재빨리 등을 돌려서서 공중 곡예 쇼를 벌이는 토파즈를 노려보았다.
배틀엑스 자루를 불끈 쥐고 그녀에게 받은 모욕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준비해 두었다. 쌍 도끼날이 바람을 가르며 토파즈를 향해 날아갔다.
“매직 미사일(Magic Missile)!”
배틀엑스가 공중에 뜬 토파즈를 향해 날아갈 때 어디선가 끝이 둥글고 긴 꼬리가 달린 세 개의 광채가 날아와 미노타우로스의 양어깨와 등을 가격했다.
얼핏 보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미노타우로스에게 순간의 고통을 느끼게 하기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