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내 14살 여느 때와 같은 하루였다.
엄마는 주방에서 아침밥을 준비하고 계셨고, 아빠는 식탁에서 신문을 읽고 계셨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흰 쌀밥을 그릇에 정갈하게 담아 식탁에 올리며 엄마는 날 불렀다.
"이제 그만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해야지, 요엘아.."
그러면 내 방에서 한창 포근한 배게에 얼굴을 묻던 나는 꿈틀거리다가 이윽고 일어났다. 잠버릇이 심한지라 조금 내려간 수면바지를 끌어올리면서 방을 나가면 아빠가 날 보며 말하곤 했다.
"어이어이, 눈곱은 떼고 와야지. 입가에 묻은 저 허여멀겋게 굳은 건 또 뭐야?"
"아… 심히 귀찮은데 그냥 먹으면 안 됩니까, 아버지?"
"하여간 아침에 저렇게 게으른 건 엄마랑 꼭 닮았다니까."
그 말에 엄마가 막 구운 계란 후라이를 놓은 접시를 식탁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놨다. 그리고는 아빠의 넥타이를 꽉 조이셨다.
"다시 한 번 말해보세요, 여보."
"크, 크윽. 자, 잘못했어요."
나는 밥을 입에 밀어 놓고는 두 분의 투닥거림을 방관하며 먼저 계란후라이에 젓가락을 댔다. 그것을 알맞게 잘라서 딱 한 입을 이제 막 입에 넣었을 때였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아. 그래. 갑자기 계란후라이가 목에 턱, 하고 걸리는 기분이 들었다. 기묘한 불안감이 발끝부터 야금야금 씹어먹어 금방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았다.
"이른 시간부터 누구지? 누구세요?"
"잘못 누른 거 아니야?"
"일단 한 번 나가봐야 될 것 같은데."
"됐어. 내가 나가볼께."
낡은 아파트에 불과한 우리집에는 복도를 볼 수 있는 화면이 없었다. 그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다. 그것이 있다고 한들, 어차피 문은 열리게 되었을 것이다.
딩동-
다시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검은 아지랑이처럼 내 발목을 타고 올라가 어느새 내 몸통마저 집어삼킬 것 같았다.
"열어보고 잘못 찾아왔다고 해야겠다."
아빠는 그렇게 말하고는 신문을 내려놓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곳까지 가는 모습이 이상하게 느리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아, 아빠… 안 여는 게 좋지 않을까?"
굳은 입술을 간신히 열어서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 물음과 함께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아빠는 나를 슬쩍 보고는 씩 웃으셨다.
"어휴. 우리 겁쟁이 어쩌면 좋을까나."
철컥-
그리고 문이 열렸다.
"저… 잘못 찾아오신 것 같…!"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 열댓명이 구둣발 소리를 내며 집 안을 침범했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있던 사람이 아버지의 턱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그 사람은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백발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중년의 사내였다. 나이는 40대로 보였건만, 190cm를 육박할 것 같은 키와 거대한 덩치에 전혀 약해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그 존재감이 대단하여 힘이 금방이라도 쭉 빠질 것 같았다.
쨍그랑-!
엄마가 접시를 떨어뜨렸다. 아빠의 몫이었던 계란후라이는 바닥에 엉망진창으로 뭉개졌다. 이상했다. 좁은 우리집 거실이 꽉 찰 만큼 가득찬 사람들의 모습이 일상에서 동떨어져 현실감각이 느껴지질 않았다.
"여, 여보…!"
엄마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그제야 등줄기에 오싹한 감각이 타고 올라왔다. 눈 앞이 어지러웠다. 그와중에도 엄마가 매일 닦던 거실 바닥에 남은 구둣자국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어째서.
왜.
떨리는 눈동자를 들어올려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우연이었을까? 사내의 백안과 눈을 마주했다.
"아…."
죽는다.
죽을 것이다. 분명.
직감이 아우성거렸다. 저 자는 위험하다. 도망가야 한다. 이곳에서 지금 당장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벌벌 떨리는 두 다리의 근육은 굳어버려서 의자에서 일어나는 것 조차 할 수 없었다.
"인사가 늦었군."
사내가 입을 뗐다. 낮게 갈라진 목소리는 무자비하고 감정이 없었다.
"케이조보 가(家)의 가주인 사토시라고 한다."
일본인이 어떻게 정확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조금도 품을 수 없었다. 발음은 불분명하지 않았으며 마치 모국어마냥 내뱉는 사내의 모습에 의아함을 갖기에는 이 상황이 지나치게 무서웠다. 아빠는 사내의 손에서 벗어나려 그의 팔을 붙잡고 있는 힘껏 밀어냈지만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언제나 아빠는 나를 쉽게 업어주고 가족을 든든하게 보살필 것 같은 모습이었기에 그 모습이 퍽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일상 속 비일상은 내게 그런 감각으로 다가왔다.
"아… 빠."
아빠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동시에 사내의 백안이 명백하게 나를 향했을 때였다.
"그리고 너를 데리러 왔다."
그 순간 아빠의 손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이게 무슨…!"
웅성거림과 함께 짙은 연기가 거실을 가득 메웠다. 연기에 금방이라고 질식할 것 같았을 때 엄마가 개수대에서 급하게 소매에 물을 묻혀 내 코를 막았다.
"어, 엄마."
이상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어.
무슨 말이라고 하고 싶었는데 금방이라도 겁에 질린 울음이 튀어나올까봐 나는 엄마의 품에 안겨서 거친 숨만 내쉬었다. 엄마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도 잠시 나를 떼어내며 일어나셨다.
"어, 어디가."
엄마. 어디가는 거에요. 가지마.
그리고 연기가 거의 다 걷혔을 때 엄마는 내 정수리를 잠시 쓰다듬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따뜻한 손길이 떠나갔을 때, 엄마는 뒤를 돌았고 검은 구체가 엄마의 손아귀에서 생성되었다.
연기가 전부 걷힌 곳에서, 아빠는 날카로운 얼음 덩어리들 속에 갇혀있었다. 두 눈을 감지 못한 채로 새파란 분노를 감추지 못한 얼굴로 달려들 것 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얼음 속에 갖혔다.
엄마는 그녀에게 달려드는 검은 양복들을 피하면서 그 중심에 있는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내 딸을…! 감히 총알받이로 쓸 생각인 주제에…!"
"총알받이라니? 엄연히 케이조보 가의 경호원으로 고용할 생각이다."
"개새끼가 어디서 개수작을 부려?"
엄마가 검은 구체를 사내에게 날렸다. 그리고 그 구체가 사내에게 닿기 직전 한 검은 양복의 사람이 그 앞을 막으며 손날로 그 구체를 내리쳤다.
파사사삭-!
유리가 깨지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구체는 쪼개져서 공중분해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는 엄마의 팔을 붙잡으며 포박하려고 빠르게 뒤로 갔다. 그러자 엄마는 다시 한 번 구체를 만들어 팔을 붙잡은 손에 강하게 찍어내렸다.
그 순간, 뼈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튀어나왔다.
"역시 그래비티(gravity) 계열이야."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양복남의 손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없어진 손을 붙잡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이게 바로 모성애인가."
그리고 엄마의 팔 역시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남은 손으로 검은 구체를 다시 만들어 사내에게 뛰어들었다.
"닥쳐…!"
"호오, 남은 손으로 공격한들 승산이 없을 텐데."
엄마는 몇 번이고 사내에게 구체를 날렸지만 그때마다 사내는 얼음으로 벽을 만들어 냈고, 구체는 그것을 빨아들임과 동시에 사라졌다. 검은 양복의 사내들 전부가 엄마에게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사내가 만든 거대한 얼음 송곳이 엄마에게 향해졌다.
아. 안 돼.
엄마.
엄마.
죽지마.
"요엘아…!"
마치 기적처럼 다리가 움직였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귓가에는 엄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굉음과 총알들이 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수십번은 허공에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기분과 온몸이 폭발하듯 궤뚫리는 감각이 한계처럼 몰아쳐졌다.
"안 돼…!"
그리고 그 이후의 기억은 없었다.
***
내가 눈을 뜨게 된 것은 그 일이 있는지 한참 뒤인 4달 뒤였다.
처음 마주하게 된 것은 새하얀 병실의 천장과 간호사가 의사를 다급하게 부르는 모습이었다.
***
5달 뒤에서야 나는 온전히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고, 재활치료를 시작했다.
내가 멀쩡히 정신을 차리자 의사가 제일 먼저 내게 알려준 사실은 아빠의 비보 소식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흘려버렸다.
***
악몽의 시작이었던 백발의 사내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게 에스퍼들 중에서도 희귀한 타입을 가진 '재생 능력 계열'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게 자신의 아들인 '케이조보 유타'를 경호하는 역할을 담당하라고 '명령'했다. 만일 내가 거부하게 된다면, 내게 남은 가족인 어머니를 그대로 사살할 것이라 말했다.
사내가 돌아가자마자 나는 유리창 문을 열고 5층인 병실에서 뛰어내렸다.
***
불행하게도 사내의 말은 맞았다.
나는 재생 능력을 가졌다. 분명 머리통이 깨지고 목이 돌아가고 온몸의 뼈가 전부 뒤틀렸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복구가 되는 모습에서 그것이 증명되었다.
지나가던 환자가 나를 발견하고 응급실에 옮겨지는 시간 안에 일어나는 신체 변화를 관찰하며 나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
그 뒤로 나는 병실에 스무번은 넘게 뛰어내린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뛰어내리고 간단한 응급 치료를 받고 병실에서 쉬고있을 때, 백발의 사내가 밤에 나를 찾아와 경고했다.
"이후에 자학 행위가 한 번이라도 더 있게 된다면, 지금 정신 병동에 갇혀진 너의 어머니에게 약물을 투여해 죽일 것이다."
"……."
"이번이 마지막 경고이다."
사내가 병실 문을 나가기 직전에 나는 물었다.
"저희 가족이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었나요?"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려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드물게 그는 침묵을 지켰다.
분침이 5칸을 움직였을 때, 그는 입술을 뗐다.
"아니."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군더더기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무릎을 모아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