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는 벽에 얼린 얼음판 위에 앉아 절망과 같은 비명을 무감한 눈으로 보았다. 요원들 위를 뒤덮은 콘크리트의 잔해를 보았을 때,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이것으로 요엘을 위한 선물은 마련이 되었다.
그는 시선을 내려 서리가 붙은 자신의 앙상한 양 팔을 보았다. 한계치 이상을 썼는지 피부에는 또다시 푸른 핏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유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짙은 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 ‘약’은 마지막 하루치밖에 남지 않았다.
좀 더 감정을 조절해야 했는데, 덴의 도발에 넘어가 버린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유타는 요엘에 관한 모욕을 들을 때면, 사고 회로가 멈추었다.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리는 듯한 감각은 그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부숴버린다.
오로지 그를 독차지 하는 것은 분노뿐.
그는 알고 있다. 이 감정은 이주도 안 된 시간동안 가져온 감정이 아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녀를 알고 기다려와, 어느 순간 돌아보니 자신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요엘은 유타에 대해 몰랐겠지만, 유타는 요엘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요엘이 가(家)에 오기 전, 그는 이미 그녀가 겪은 일들을 보고받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토시에 의해 즉사를 당했고, 어머니는 정신 병동에 갇혔다가 이번에 주거지를 옮겼다. 또한 요엘 역시 1년 간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심리 치료를 병행해야 할 만큼 정신이 불안정했다.
유타는 납득했다.
요엘이 사토시의 아들인 자신을 좋아할 리가 없다. 증오를 했으면 했지, 호감을 품을 수 없다. 그런 결론이 나자 목에 갈증이 일었다. 지독한 탐욕이 뱃속에서 끓어올라 산소를 구걸하게 만들었다.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욕(慾)은 끔찍할 만큼 거대해서 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렇게 요엘에 대한 욕심을 멈출 수 없을 즈음에는 참을 수 없는 격노를 느꼈다.
어째서. 나는 너를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유타는 느릿하게 손가락을 올려 목을 쓸어내렸다. 또다. 타들어갈 것 같은 이 갈증. 아직은 감추고 들켜서는 안 될 그의 본성을 억눌러야 했다. 그리고 그는 불안정해보이는 요엘을 위해 다른 사람이 되었다.
‘너의 곁에 영원히 벗어나지 않을 사람을 줄 거란다.’
매시간 매초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아버지는 분명히 약조했다. 요엘은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그녀만큼은 그를 벗어날 수 없다.
[요엘.]
유타는 혀로 입술을 한 번 축였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금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반질거리는 눈동자에 한 여자가 맺혔을 때, 포악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유순하고 순한 눈매만이 남아있었다.
새하얗고 긴 목이 드러나는 짧은 단발머리. 메마른 눈이지만 작게 웃을 때면 살짝 접히는 사랑스러운 눈매. 작지만 오똑한 콧망울과 선홍빛 입술.
걱정이 되었는지 승강기를 타고 내려와 자신을 찾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유타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참지 못할 만족스러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유타 님!”
승강기에서 내리고 직접 보게 된 7층은 모든 게 부서져 부연 흙먼지만 날렸다. 더군다나 암석처럼 거대한 바닥의 파편들이 불안정하게 쌓여 있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분명 다쳤을 것이다. 이런 피해 속에서 다치지 않을 리가 없다. 혼자 가는 그 아이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해야 했는데, 스스로의 옹졸함 감정에 치우쳐 그러지 않았다.
죄책감은 불어나 그녀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유타…!”
그녀는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돌조각들을 손으로 치우면서 유타를 찾아다녔다. 날카로운 표면에 손바닥이 찢겨나갔지만 상처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나는 점점 힘이 빠지는 두 팔에 절망하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당장 본관에 가서 사토시에게 연락을 취해서 구조 요청을 해야 한다. 지금 내게는 아이를 구할 능력 따위 없다. 특화계에 속하는 재생 능력이 아닌 증강계 에스퍼였다면, 이란 쓸모없는 가정을 할 시간 따위 없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 승강기 쪽으로 향하려 했다. 새하얀 무언가가 자신의 품에 뛰어들지만 않았다면.
[요엘!]
[…….]
[제가 걱정 되서 온 거예요?]
[…….]
[요… 엘?]
유타였다. 새하얀 기모노의 상반신이 다 찢어져 드러난 앙상한 몸에 가득한 푸른 핏줄은 아이가 좋지 못한 상태라는 걸 드러냈다. 그리고 이제는 보라색으로 변한 피멍이 가득한 복부까지, 여덟의 아이가 가져서는 안 될 상처로 가득했다.
[요엘,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에요? 저 괜찮아요.]
유타는 내 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며 위로라도 하듯 내 어깨에 볼을 비볐다. 그리고 고사리 같이 작은 손으로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러니까….]
잠시 내 몸을 떼어낸 유타는 내 볼을 두 손으로 감싸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이의 따스한 숨결이 코끝에 와 닿았다. 그러던 아이는 온기가 가득한 눈으로 나와 눈을 마주하며 작게 속삭였다.
[울지 말아요, 요엘.]
그리고 흉터가 가득한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는 그제야 내 두 볼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턱 끝에 방울방울 맺혀있던 건 땀이 아니라 눈물이었다.
[이제 모든 게 괜찮아요. 다 끝났어요.]
아버지의 비보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도저히 믿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목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장례식조차 치루지 못한 채 누군가의 강압에 이끌려 재활 치료를 해야 했고 일본으로 끌려와야 했다.
울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힘들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를 지탱하던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남은 나의 가족인 어머니에게 해를 가할까봐 공포 속에서 어떻게든 제정신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제정신인 것처럼 살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쉬이━ 요엘, 이제 우리 돌아가서 푹 쉬어요.]
나는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면서 위로를 하는 아이가 원망스러웠다. 그 위로가 설령 비윤리적이고 잔혹한 방식이었지만 아이는 자신의 기준에서 최선을 다했다.
나를 위해 가문의 사람들을 고민 없이 제거할 만큼, 아이는 보이는 것처럼 순박하지는 않다는 걸 이제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화가 나는 것은 정말 아이의 말대로 내 마음이 편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괘… 괜찮아요.”
아이는 내 귓가에 조곤조곤 말했다. 또다. 아이가 나를 위해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말을 쓰는 게.
괜찮아요.
다 끝났어요.
나는 더 이상 아이를 증오할 수도, 밀어낼 수도 없었다.
나는 아이에게서 안락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나와 유타가 본관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사용인들이 복도에서 두 줄로 정렬한 걸 보며 이상함을 느꼈다. 다들 낯빛을 창백하게 질린 채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 정적이고 차가운 분위기에 나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그때, 사용인들 가운데로 누군가가 호롱불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무로 된 바닥에서 들리는 묵직한 발소리에 나는 본능적으로 눈치를 챘다. 또한 그 어렴풋한 불빛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래. 나의 사람들을 허락도 없이 죽인 기분은 어떠냐, 아들아.]
커다란 풍채와 주변의 공기를 단번에 얼릴 것 같은 압도를 가진 사람.
남자는 케이조보 사토시였다.
호롱불이 연하게 아래쪽만 비춘 사토시의 얼굴은 그 표정을 전부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라는 것쯤은 여유를 잃어버린 그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꽤….]
내 옆에 있던 유타의 조그마한 입술이 벌어졌다.
[재미는 보았습니다만.]
[재미를 보았다?]
[네. 그런데 가(家)를 지키는 개가 그 정도 실력밖에 안 돼서야 안심하고 집 안을 돌아다닐 수가 있겠습니까?]
유타는 냉정한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싸늘한 비소를 지었다. 그러자 사토시가 들고 있던 호롱불 안에 있던 양초의 자그마한 불씨가 순식간에 꺼졌다. 순식간에 어스름한 달빛만이 집 안을 밝히는 유일한 전등이 되었다.
무거운 공기 속에서 고막에 무언가가 깨지는 파열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 허락도 없이 전투 요원을 자의적으로 바꾸고, 그들을 죽인 것이냐? 고작 재미를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네. 요즘 매일 비슷한 훈련만 받다보니 조금 따분한 감이 있어서요.]
[아하. 그러니까 김요엘과는 상관이 없다는 소리냐?]
호롱불이 점차 얼음에 뒤덮이고 가장자리부터 부서지기 시작했다. 사토시의 그늘진 얼굴과 냉혹한 목소리에 나는 유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만하라는 의미로 잡은 것이었는데, 도리어 유타는 내 손에 깍지를 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는 옅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더니 이내 곧 사토시를 보며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제 흥미와 그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유타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아니라고 항변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러나 유타가 내 손을 아플 만큼 강하게 쥐었다.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차오르는 분노를 또다시 눌러 삼켜야 했다.
[그래. 그렇다는 거냐? 니 입으로 분명히 그렇게 말한 거지?]
[네. 그냥 변덕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내일부터 훈련의 강도를 높여야겠구나. 지금까지 A등급 에스퍼 10명으로 구성시켰는데 그것도 재미가 없다고 하니, 원.]
사토시가 즐겁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앞으로 한 달간 출장 계획은 모두 취소하도록 하겠다.]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이 나는 그의 이빨은 내 목을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내가 직접 훈련에 참여하도록 하마, 아들아.]
[…….]
[그리고 오늘 그 ‘약’은 주지 않도록 할 테니 어디 한 번 잘 버텨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