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나는 러시아로 출국할 것이다.]
사토시는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엔가와(툇마루)에서 보이는 풍경은 한 달 사이에 바뀐 것이 많았다. 매화꽃잎은 거의 다 떨어져 이틀 전 정원사가 그것을 뽑고 동백나무를 심었다. 선명한 붉은 꽃잎과 그 속에 숨겨진 노란 수술의 색채가 강렬했다.
이곳의 기온은 이제 10도를 넘어가, 한국의 모진 겨울에 16년을 보낸 나에게는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아. 그리고 나 역시 일본에서 16번째 생일을 맞이하고 17살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처럼 새 학기를 맞이할 생각에 설렘으로 들뜨진 못했다.
일주일 전 검정고시를 치룬 나는 지금 고등학교 졸업이 인정되었다. 원래는 나의 나이와 여러 요건들로 시험을 볼 수 없었지만, 케이조보 가(家)로 인해 가능해졌다. 뒷배경이라니, 예전에는 꿈도 못 꾸었을 단어라 어이가 없기도 했고 편하기도 했다.
[이번에 가시면 1년 뒤에 돌아오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 말하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에 입에 대었다. 그리고 인상을 구겼다. 사토시가 자주 즐기는 차는 내 입맛에는 영 쓰기만 했다. 그와의 대면 때마다 이 차를 마시곤 했는데, 고약스러운 성격처럼 차도 참 고약스러웠다.
[차가 입에 안 맞는데도 너는 늘 다 마시곤 했지.]
[네.]
[그리고 이곳에서의 삶은 한국 때와 판이하게 달랐음에도 너는 불평 따위 말하지 않았지.]
[불평이 없습니다, 사토시 님.]
[내 존칭도 부르고 싶지 않은데도 꼬박꼬박 부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무엇을 내게서 알아내고자 하는 건지 사토시의 사담이 길어졌다. 첫날을 빼고는 유타의 스케줄만 묻던 그였기에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때 그가 찻물을 전부 들이키며 바닥에 큰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너는 제 나이 때의 멍청한 것들과는 달라.]
사토시는 끌끌거리며 웃으며, 비열한 눈을 내게 고정시켰다. 하지만 나는 눈을 내리깐 채 표정을 지웠다.
[너라면 아주… 아주 좋은 ‘낙원(樂原)’을 만들 게야.]
또다. 센죠가 말했던 ‘낙원’이 사토시의 입에서 다시금 나왔다. 그러나 나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동요하는 순간, 기민한 그는 내가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챌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한 달 간 행적들을 추적해서라도 그걸 입에 담은 자를 찾아낼 것이다.
센죠는 아직 죽어서는 안 된다. 그는 가(家)에서 오래된 사용인으로 보였고, 그만큼 알고 있는 게 많다. 더 많은 정보를 그에게서 알아내야 했다.
[쯧. 그리 반응이 없어서야.]
[죄송합니다.]
사토시는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모노 자락을 휘날리며 뒤를 돌아 다다미 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들리던 발걸음 소리가 멈추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토시의 조소를 담은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어쨌든 난 네가 유타를 잘 지킬 거라 믿는다. 이대로 더더욱 유착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었음 하는 개인적 바람도 있어.]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유타에게 필요한 ‘약’을 제조해야 하니까 협조했으면 좋겠군.]
[…제 피를 제공하면 됩니까?]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가 목을 휘감기 시작했다.
[자세한 사항은 아야코에게 듣도록 해.]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좋아. 무엇이 궁금하지?]
입가가 떨리기 시작했다. 사실 궁금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는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토시에게 묻는 이유는 재확인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유타 님께서 드신 ‘약’은 어떻게 공급을 받은 건가요?]
[아아- 그거 말인가?]
지루하기 그지없다는 음성에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1년 전, 어미를 감싸느라 거의 죽지 않았는가? 당연한 걸 왜 묻는지, 원.]
…사토시, 이 개새끼가.
쾅-
문이 닫혔다. 나는 그제야 표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
***
[저 잠이 안 와요, 요엘.]
요즘 들어 유타는 잠에 들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 방을 두고 옆방으로 넘어와 같이 침대에 눕곤 했다. 창문이라고는 겨우 손바닥만 한 크기에 불과한 것밖에 없어서 그런가. 이 방은 유독 어둡고 침침했다.
아홉이 된 유타는 또래 아이들처럼 방에 로봇 장난감을 두지 못했다. 그저 옷이 들어있는 수납장 하나 정도만 유타의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학대였다. 나는 이 나이일 때 놀이터에서 사방팔방 돌아다녀 해질녘에 새까매진 얼굴로 집에 들어왔다. 물론, 아빠는 자신이 사온 공주 인형을 본 척도 안 하는 딸로 인해 ‘어흐흑’ 울곤 했다.
[유타 님, 잠이 안 오세요?]
[네. 이런 적이 없는데… 괜히 요엘도 자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요.]
[미안할 것 없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마시고요.]
[하지만….]
나는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놀라서 눈이 동그랗게 커진 유타를 내려다보며, 아이의 이부자리로 들어갔다.
[어어?]
[여섯 살 때였나. 친구 네 집에 놀러갔는데, 서로 누가 더 강한 녀석인지 대결해보자고 공포 영화를 보았어요. 덜덜 떠는 친구 옆에서 괜한 자존심에 손으로 눈도 안 가리고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거든요. 겨우 녀석에게 내가 이겼다고 떳떳하게 말하고 싶어서 그랬죠.]
나는 그렇게 소곤거리며 유타의 베개를 치우고 그 자리에 내 팔을 두었다. 그리고 다른 쪽 팔을 유타의 등을 감싸 안고 끌어당겼다. 그러자 내 착각인지, 팔에서 느껴지는 유타의 등이 긴장으로 인해 딱 굳어졌다. 그래서 긴장을 풀라고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리고 그날 밤에 잠에 들려는데, 막 침대에서 뭐가 올라올 것 같고 이불 속에 발가락까지 꼭꼭 숨기지 않으면 귀신이 잡아 챌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결국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고 엉엉 울면서 안방으로 갔죠.]
나는 유타의 이마에 조용히 이마를 가져다 대며 옅게 웃었다. 그러자 두 주먹을 가슴팍에 모으던 유타가 서서히 주먹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불안하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내 허리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그러자 갑자기 깬 부모님은 아무것도 안 묻고 저를 가운데에 두고 저를 달랬어요. 어머니는 제게 팔베개를 해주시며 등을 토닥였고, 아버지는 웃으면서 제 머리를 쓰다듬으셨어요. 그렇게 함께 있으니까 거짓말처럼 귀신이 무섭지 않은 거예요.]
나는 유타의 등을 일정한 박자로 토닥였고, 점점 유타의 눈은 감기기 시작했다. 유타가 거의 눈꺼풀을 닫았을 때 나는 유타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무서울 거 없어요. 같이 있어드릴 게요.]
처음으로 꺼낸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유타가 내게서 늘 바래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늘 외면해왔던 것이었다. 유타가 거의 자고 있을 때야 나는 소심하게 이제야 약속을 돌려줄 수 있었다.
[…요엘.]
그때, 자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타의 입술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워 그대로 굳어버렸다.
[들었어요.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찰나에 벌어진 유타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빛을 발했다. 대답을 구하듯 나를 올려다보는 그 시선이 집요하고 끈질겼다. 그리고 내 허리를 끌어안은 유타의 팔에서 벗어날 수도 없이 강한 힘이 들어갔다.
연약한 팔에서 나온 힘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이제야… 살 수 있어요, 저는.]
아이는 마치 해방된 사람처럼 행복한 미소를, 해묵은 감정을 토해내듯 웃었다. 그만큼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고작 함께 하겠다는 약속에 유타는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그저 유타를 힘껏 끌어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
[교수님.]
[응? 왜! 이번에는 머리카락도 안 뽑고 손톱도 요구 안 했잖아! 왜! 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텐도는 흡사 연약한 소녀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못 볼꼴을 본 것처럼 혐오를 얼굴에 드러냈다. 나는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텐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요.]
[정말 없다니까?]
[거기 주먹에 삐죽 나온 건 뭔데요?]
[헉. 어떻게 알았지?]
[거짓말인데 잘 속네요. 이제 내놓으세요.]
그러자 텐도는 우울한 낯빛으로 손에 쥐고 있던 걸 아주 느리게 내게 건넸다. 그가 주먹을 피자 나온 것은 기름 종이였다. 약간 중간 부분만 색이 짙은 걸 보아하니 급하게 채취한 것처럼 보였다.
언제 이걸 가져간 거지. 나는 점점 고단수가 되어가는 그의 수법에 혀를 내두르며 징글맞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흠흠. 아, 요즘 날씨가 따뜻해져서 피부에 기름이 지니까 나는 너를 생각해서…. 아, 아니. 사실은 내가 요즘 연구하는 게 노화 방지 크림팩을 만드는 거라서, 너의 기름을 샘플로 했….]
[교수님. 유명해져라. 그럼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줄 거다. 그 말 아십니까? 지금 유명 연구원으로 이름 날렸다고 되도 안 되는 말로 사기를 치는 겁니까? 실망입니다.]
[미, 미안하다.]
양심이 찔렸는지 텐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또 어쩐지 불쌍하기 짝이 없어, 나는 한숨을 쉬고 그에게 기름 종이를 돌려주었다.
[가져가세요.]
[어? 어째서?]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나는 책상 서랍에 넣어놓았던 종이 두 장을 꺼내서 그에게 건넸다. 텐도는 그것을 받더니 조금 의심하는 기색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뭐야. 이거 뭔데.]
[구두 계약은 믿지 못해서, 서면으로 미리 양식을 만들어놨죠. 하나는 제가 보관할 거고, 다른 하나는 교수님이 보관하시면 되요.]
[…너 되게 치밀하구나.]
[오늘 인장 가져오셨죠? 법적 효력이 없으면 그것대로 곤란하죠.]
[가, 가져왔어! 기다려봐.]
그는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도장을 꺼냈다. 갑자기 텐도는 물기를 머금은 새싹처럼 파릇파릇해진 모양새가 되었다. 갑자기 되살아난 기색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리고 서면 따위 읽지도 않고 바로 도장을 쿡 찍었다.
…아니 내가 뭘 썼을 줄 알고.
[안 읽으세요…?]
[응? 집 가서 읽을 건데.]
호구다. 호구가 분명하다.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서면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말하기로 결정했다.
[간단하게 말씀 드리자면, 교수 님께서 연구 결과 내용을 전부 제게 보고하시면 된다는 뜻이에요. 그 밖에도 제게서 채취할 수 있는 샘플을 어느 정도 제한시키겠다는 내용이 거의 전부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실험체로 끌려가고 싶진 않거든요.]
[이봐. 내가 그렇게 비윤리적 인간으로 보이냐?]
[교수 님께서 저번에 저한테 말씀 하셨잖아요.]
나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는 텐도에게 환하게 웃어주었다.
[교수 님도 믿지 말고 아무도 믿지 말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