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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안락을 위하여
작가 : 고래고래몬
작품등록일 : 201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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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케이조보 가(家)의 그 도련님
작성일 : 17-06-21     조회 : 248     추천 : 0     분량 : 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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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텐도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거야 맞는 얘기지만….]

 [맞는 얘기지만?]

 [매정한 것.]

 [이제 알았어요?]

 

 텐도는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스물일곱의 성인 남자가 보이는 애교는 차마 눈뜨고 못 볼꼴이었다. 내가 인상을 구기자 텐도는 슬쩍 눈치를 보며 입술을 집어넣었다. 한숨을 쉬고 나는 얘기를 이어나갔다.

 

 [일단 재생 능력은 ‘피’가 원천인 것 같은데, 그깟 기름종이보다는 아예 혈액을 채취하는 게 낫지 않나요? 센죠에게 얘기를 해서 대충 채혈 주사기를 준비하도록 할 게요.]

 […결국 피가 뽑힌 거야?]

 [네, 한 달 전부터 유타 님에게 제공을 했어요.]

 [그런데도 네 주인에게 아무런 화도 못 느껴?]

 

 나는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다. 당사자인 나보다 더 분노한 것처럼 보이는 텐도의 표정을 의아하게 보았다. 평소의 능글맞던 태도를 버린, 텐도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서늘해보였다.

 

 […이 얘기는 교수님께서 관여할 부분이 아닌 것 같네요. 계약에 관한 것만 얘기했으면 좋겠습니다.]

 

 텐도는 잠시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말없이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입술을 깨물더니 거친 손길로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녹색 눈동자가 활자 위를 빠르게 훑었다.

 

 [서명 여기에 하면 되는 거지?]

 

 그는 긴 손가락으로 서명 란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텐도는 인장을 꺼내 망설임 없이 찍었다. 그 다음 그는 두 계약서 중 하나를 내게 건넸다.

 

 [네가 능력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았다면… 아니, 내가 그때 너에게 얘기를 했다면….]

 

 자책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괴로운 듯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무엇을 더 알았다고 해도 저는 유타 님을 원망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니. 검사 결과가 자세히 나와야 확정지을 수 있겠지만, 너가 계속 그렇게 생각 없이 피를 제공했다가는…!]

 [어제 유타 님께 드리려고 사과를 깎다가 손이 베었어요.]

 [뭐?]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무엇이 중요하냐고 따지는 듯한 텐도를 무심하게 보았다. 그가 할 얘기가 무엇인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도.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을 나를 가르치던 그는 나를 참 많이도 걱정했다. 가(家)가 내게 숨기고자 했던 얘기를 간접적으로 돌려서 말할 만큼.

 

 [근데 한 달 전과 다르게 피가 멎는 속도가 조금 느려지긴 했어요.]

 

 나는 그리 말하며 어제 다쳤던 손가락 부분을 보았다. 흉은 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치자마자 낫던 경이로운 속도는 이제 조금은 느려졌다. 미세한 차이였지만, 분명 내게는 또렷하게 느껴졌다.

 

 [아마 제가 가진 재생 능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겠죠?]

 

 나는 헛웃음을 지었고, 텐도는 절망을 숨기지 못했다.

 

 ***

 

 ‘약속할게. 그 누구에게도 너의 능력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밝히지 않겠어.’

 ‘됐어요. 익명의 지원자로 하면 아무도 모르겠죠.’

 ‘아니.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는….’

 

 너를 최우선시 해.

 

 ***

 

 검은 커튼, 검은 벽지, 검은 피아노.

 온통 검은색으로 점칠 된 거대한 공간을 밝히는 건 단 하나의 전등뿐이다. 방의 주인이 밝은 곳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찬가지로 검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서류를 넘겼다. 지난 한 달간 남자가 기다린 정보였다. 인내심이 길지 않은 남자치곤, 꽤 묵묵히 기다렸다고 할 수 있었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어둡게 침잠이 된 눈동자는 빠르게 종이 위에 적힌 프로필을 읽어나갔다. 남자는 30페이지를 넘어가는 분량에도 전혀 지루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와 호기심으로 들떠 보였다.

 

 “…탐나네.”

 

 남자는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날큰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프로필의 주인공 사진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탐미하듯 오래도록 손길은 머물렀다.

 그는 지루함을 못 느끼겠다는 듯 한참을 사진을 보았는데,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사진에서 그제야 시선을 떼었다.

 

 노크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남자의 보좌관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그’가 3일 후에 이곳으로 복귀할 예정이라고 전보를 보냈습니다.”

 “왜 3일 뒤야?”

 “제 1구역에 들려야 할 일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흐음… 그 일이 뭔지는 안 밝히고?”

 “복귀하면서 같이 보고하겠다고 하더군요.”

 

 아. 꽤 잘하고 있나보네.

 남자는 충만하게 차오르는 만족스러움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겨우 웃음을 멈춘 남자는 자신의 보좌관에게 말했다.

 

 “곧 13구역을 방문할 일이 생기겠어.”

 “직접… 말이십니까?”

 “응. 내 눈으로 보고 싶거든.”

 

 남자는 그리 말하며 아까까지 보고 있던 서류를 보좌관에게 보여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종이의 첫 페이지.

 왼쪽 위를 차지하는 사진 속 한 교복을 입은 여자 아이를.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가지고 싶겠지, 분명?

 

 ***

 

 햇살이 작은 창문을 뚫고 들어와 볼 위를 간지럽게 한다. 어쩐지 깨고 싶지 않아 이불을 뒤척이려 했지만, 품에 안겨진 작은 몸에 그마저도 못했다.

 

 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아이를 품에 더욱 끌어안았다. 따끈따끈한 게 온도도 참 적당하고 크기도 적당했다. 마음에 드는군.

 

 [요, 요엘?]

 

 그러자 유타가 깼는지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모르는 척 유타의 머리에 볼을 비볐다. 원래는 유타가 잠투정이 더 심한 편인데, 오늘은 정말이지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아마 어제 피를 꽤 많이 뽑은 탓일 것이다.

 

 [좀 졸리네요. 10분만 이러고 있을게요, 유타 님.]

 [저는… 조, 좋아요!]

 

 뭐가 좋다는 거지.

 목적어가 없는 문장에 나는 유타를 잠시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보았다. 그러자 유타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많이 피곤해요?]

 

 걱정스러운 말투에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조금 많이 피곤하네요.]

 [조금 피곤한 거예요, 많이 피곤한 거예요?]

 [‘많이’에 가까운 ‘조금’이라고 하죠.]

 [그게 뭐예요….]

 

 유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푸스스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 뭔가 마음이 편해져 아이의 결 좋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더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근데 요엘 지금 땀을 흘리는 것 같…? 이마가 불덩이인데요?]

 [그럴 리가요. 지금까지 잔병치레를 한 적이 없었는데요?]

 [아니에요. 이마가 정말 뜨거워요.]

 

 유타가 내 이마에 손을 얹으며 빠르게 말을 쏟아내었다. 나는 전혀 땀이 나지 않아 빳빳한 옷깃을 슬쩍 만져보았다. 아니, 지금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전혀 땀이 안 났는데요, 유타 님?]

 [아뇨, 아뇨. 요엘은 좀 쉬어야 해요! 그동안 너무 많이 일도 하고 항상 제 곁에 있느라 개인 시간도 못 갖고 힘들었잖아요. 오늘 일정 전부 취소하라고 아야코에게 말해둘게요!]

 [저는 아주 멀쩡합니다. 그냥 조금 졸릴 뿐이에요.]

 [아야코에게 얼른 가봐야겠다!]

 [유타 님…?]

 

 유타는 호들갑스럽게 말하더니 당장 일어나서 옷도 안 갈아입고 그대로 나갔다. 나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말릴 수도 없었다. 가만히 눈만 끔뻑이는데, 갑자기 복도 쪽에서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유타다. 저 방정맞은 소리는.

 그리고 예상하자마자 문이 벌컥, 하고 열렸고 유타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물수건이랑 커다란 통을 가져왔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당당하게 허리를 피며 말했다.

 

 [제가 요엘을 간호할 게요!]

 

 병간호를 그렇게 설레는 얼굴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당장 따져 묻고 싶은 걸 간신히 눌러 삼켰다.

 

 [겸겸 제 수업도 빠져야겠어요. 요엘을 간호해야하니까요!]

 

 아. 이게 바로 빅픽쳐(big picture)군.

 나는 짜게 식은 표정으로 ‘간호’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유타를 보았다. 그리고 툭 내뱉었다.

 

 [더더욱 오늘 일정을 지켜야 할 마음이 생기네요.]

 

 어쩐지 유타가 나를 보며 흠칫 몸을 떤 것 같았다.

 

 ***

 

 그런데, 놀랍게도 체온을 재보니 38도 가까이 올라가있긴 했다. 생각보다 자신의 몸에 무심한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하지만, 딱히 몸에는 큰 이상이 없는 것 같아 쉬어야 한다고 난리를 치는 유타를 무시하고 평소대로 움직였다.

 

 물론 유타는 자신이 가져온 물수건을 내 이마에 올리면서, 가지 말라고 뻑뻑 우겼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어디 자기 수업도 빠질 요령으로 날 끌어 들여.

 

 [아니, 그러니까 쉬라니까? 왜 또 나와서 일을 도와.]

 [딱히 아프진 않아서 그래요. 겨우 이거 돕는다고 쓰러지진 않아요.]

 [어휴. 그럼 지난번에 실패한 가라오게나 튀겨봐.]

 [아… 그거 너무 어려운 요리인 것 같아요. 쉬운 단계부터 시작하면 안 될까요?]

 [그게 어려우면 컵라면에 삼각 김밥만 평생 먹고 살아야 해.]

 

 유타의 아침을 준비하는 여사님들에게 또 혼나면서 부엌일을 도왔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구릿빛으로 탄 닭튀김을 보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난 절대 자취는 못할 거야.

 

 [또, 또 태워먹었어.]

 [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본받아 저도….]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일이 없겠네. 허구한 날 실패만 해대니.]

 […할 말이 없군요.]

 

 나는 등짝을 얻어맞아가며 스킬을 배웠지만 역시나 실패였다. 젠장.

 그렇게 오늘도 내가 튀긴 가라오게는 밥상에 올라오지 않았다.

 

 ***

 

 [너무해요, 요엘.]

 [오늘따라 화전(花煎)이 맛있네요. 무슨 꽃으로 한 건지 궁금하네요.]

 [요━ 엘.]

 [날씨도 따뜻한 게 곧 봄이 올 것 같네요.]

 [요엘.]

 [봄이 되면 한 번 수업 빠져서 꽃구경 가는 것도 괜찮겠네요.]

 [어…?]

 

 심통을 부리듯 볼을 잔뜩 부풀린 유타가 그대로 굳었다. 그러다가 이내 곱씹듯 내 말을 반복하다가 얼굴을 확 붉혔다. 바깥 구경을 하는 게 그렇게도 좋은지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이상한 소리를 마구 냈다.

 

 그래도 가려지지 않은 두 빨간 귀가 보였다. 나는 그 귀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유타가 꿍얼거리며 손바닥에서 얼굴을 떼며 ‘왜, 왜요!’라고 하자 나는 슬쩍 웃었다.

 

 [귀도 가려야죠, 유타 님.]

 

 이상하게 유타의 얼굴은 정말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

 

 […요엘 님.]

 

 그날 밤, 아야코는 유타와 함께 자고 있던 나를 조용히 불렀다. 유타는 굉장히 예민했기 때문에 나는 조심히 아이를 품에서 떼어내고 일어나야 했다.

 

 문을 열고 방을 나가니 언제나처럼 아야코는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그녀의 얼굴이 어쩐지 딱딱하게 굳어있어 나는 꽤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사토시 님의 명을 받아 당신께 가(家)의 기밀 사항을 전달하고자 왔습니다.]

 [제 피가 어떻게 약으로 제조될 수 있는지를 말하는 건가요?]

 [네. 저를 따라오도록 하세요, 요엘 님.]

 

 등잔불을 들고 복도를 앞서서 걷던 그녀는 약간 불안해 보이는 눈으로 뒤를 계속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게 될 때마다 나는 속이 답답해져갔다. 갑자기 체증이라도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떤 한 방문 앞에 멈추어 그곳을 열었다. 방 내부는 전등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고, 어떤 사용인도 살지 않아 냉막한 공기만이 흘렀다. 아야코는 천천히 그곳에 들어갔고 맞은 편 벽에 붙은 미닫이문으로 갔다.

 

 새하얀 바탕에 핏빛처럼 붉은 매화꽃잎이 수놓아진 미닫이문은 황량한 방에 비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아야코는 그 문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방금 보았던 방과 똑같은 방이 나타났다. 이곳 역시 매화꽃의 미닫이문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었다. 아야코는 문을 또 열었다. 우리는 문을 끝없이 열어야 했다. 결국 지쳐 내가 먼저 물었다.

 

 [문이 몇 개나 있는 거죠?]

 [이 문이 마지막 문입니다.]

 

 아야코는 단호하게 마지막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이번에 미닫이문이 없었다. 또한 유일하게 벽면에 빼곡히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등불이 환하게 방을 밝히고 있었다. 다만 수십 개의 수납공간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수납장이 있었다. 그리고 방 안의 공기는 아까는 느끼지 못했지만 문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더욱 차가워졌다.

 

 마지막 방인 이곳에서는 내 숨결이 하얗게 부서지는 게 보일 만큼.

 

 […사토시 님께서는 요엘 님께 당신의 피가 어떻게 약이 될 수 있는지 말하라 했습니다.]

 [네.]

 [하지만 저는 그 과정을 말해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위해서가 아닌, 요엘 님을 위해서요.]

 

 아야코는 힘겹게 말하며 수십 개의 수납장의 문 중 하나를 떨리는 손으로 잡았다. 수납장을 열기 전까지 그녀는 수없이 많은 갈등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가(家)의 사람인 그녀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당사자인 내가 꽤 보기 힘든 장면일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제가 알아야 할 것인 건 틀림없겠죠.]

 

 나는 마치 남 얘기를 하는 마냥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직도 문을 열지 못하는 아야코의 손 위로 내 손을 덮었고 그대로 힘을 주었다.

 

 수납문이 열었고, 그 안에 있던 무언가를 아야코는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믿을 수 없는 절망만이 존재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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