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야!!!]
망할 내 귀청! 걸자말자 1초도 안 돼서 받는 것도 모자라 소리까지 지르다니.
“···작게 말해도 알아들어.“
[왜 전화 안 받는 건데?!]
“서점이라 무음이었어.“
[거짓말하지 마! 일부러 그랬잖아!]
그치만··· 집중하는 데 방해받기 싫으니까···. 그리고 부탁이니 소리 좀 지르지 말아 줬으면 좋겠습니다.
“애초에··· 서점에 간다고 문자 보냈잖아.“
[3시간이나 지났잖아, 3시간이나! 조금 있으면 8시인데···. 너랑 같이 먹으려고 저녁도 안 먹고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야. 손수 요리도 했는데···.]
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왕이면 먼저 드시지 그러셨습니까. 당신의 요리 실력이 너무 훌륭해서 차마 식욕이···.
“지금 가고 있으니 먼저 먹고 있어.“
전부 다 먹으면 좋고.
[얼마나··· 얼마나 걸리는데···.]
“걱정하지 마. 20분 안에 갈 테니까.“
오랜 시간 걱정 끼쳤기에,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는 별이에게 믿음을 가져다주기 힘들겠지···.
[···알았어···. 다 와 가면 전화해줘, 마중 나갈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다해 날 걱정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그런 작은 떨림 탓에 나는 우물쭈물해줬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아주 잠시뿐.
“그래.“
나는 심플한 대답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별이에게 나는 애완동물 같은 것이다.
혹은 불쌍하기에 지켜주고 싶은 동생이거나.
처음에는 작은 관심이었다.
그 관심은 별이의 마음에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문 너머에 있는 동정심이라는 것이 발현시켰다.
동정심이라는 바이러스는 점점 그 수를 늘려갔고, 결국엔 과잉되어 내면으로는 다 채울 수 있는 선을 넘어버렸다.
흘러넘치는 것을 억제하지 못하기에, 그것이 행동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물론 시초는 나이며 원흉도 나다.
별이가 나에게 가지는 감정은 「동정심」이다.
반면에 내가 별이에게 가지는 감정 또한 「동정심」이다.
이렇게 말하면 같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것과 별이의 것은 근본부터가 다르다.
내 것은 불쌍한 놈이 동족에 가지는 감정. 동족임을 강요하는 감정. 내 불쌍함을 가리기 위해 상대방이 더 불쌍하다고 단정 지어버리는 감정.
같잖은 동정심.
그것이 나만 알고 있는 「내 것」의 정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것이 또 한 번 발열되었다.
※※※
태양이 비치면 그림자가 생기는 법.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 나에겐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걸어서, 서점에서 집까지 빠른 시간 안에 가기 위해선 이곳을 지나쳐야 한다.
나는 지금 인적 드문 골목길을 걷고 있다.
이 골목을 벗어나면 이름 모를 폐공장이 하나 나온다.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도,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든 지도 모르는 그 공장은, 때때로 사용 용도가 바뀐다.
꼬마들의 놀이터, 노숙자들의 쉼터, 비행 청소년들의 만남장소, 범죄자들의 범행현장 등.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해 쓰일지는 개개인의 마음이다.
그래서 내가 그 폐공장을 싫어하는지도 모르겠다.
옛날에 나는 버려진 그 공장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래서 마음을 편하게 해줄 만큼 익숙한 장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는 그곳이 너무도 싸늘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나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변한 느낌. 소중한 것을 영영 잃어버린 느낌.
나는 한동안 이 골목을 걷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만에 만난 골목길이 마치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N 극을 갈망하는 S극, S극에게 미칠 듯이 욕정 하는 N극처럼 말이다.
나는 골목의 끝에서 걸어 나왔다.
하지만 내 두 눈이 먼저 포착한 것은 허름한 폐공장이 아니었다.
여자다.
누군가의 아래에 깔려 힘겹게 저항하는 여자. 아니, 짐승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에 소녀였다.
그 장면을 보자 말자 내 스스로가 이성을 컨트롤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아예 이성이라는 것이 끊어진 것만 같았다.
나는 메고 있던 가방을 거칠게 벗어 던지고 그 짐승을 향해 무작정 돌진했다.
맞는 법.
그게 운동의 기초라고 한다.
내가 배운 복싱도 예외는 아니었다.
폭력이 두려웠던 나는 정신과 담당 의사의 조언에 따라 복싱을 시작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봤을 때 대성공이었다.
상대방의 타격이 내 몸에 새겨질 때마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공포감은 점점 사라져만 갔다.
그렇게, 2년의 노력으로 내 안에 있던 「학대」의 기억을 덮을 수 있었다.
여기까진 좋았다.
여기까진···.
띠리링~ 띠리링~
스마트폰에 기본으로 설정된 벨소리가 자고 있는 나를 깨웠다.
자는 동안 나는 악몽을 꾼 듯하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내 앞머리를 젖히고 턱 선을 따라 그리며 떨어졌다.
호흡이 불안정하기에 숨을 힘겹게 헐떡인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스마트폰은 갓난아기의 울음을 내뱉고 있다.
그 덕분에 나는 지금 내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나는 자고 있던 게 아니다.
이성이 결렬된 육체가 남자의 멱살을 잡은 채 주먹을 내려 꼽으려던 참이었다.
내 밑에 깔린 남자는 이빨이 깨져서인지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이성을 잃고 사람을 때려눕힌 것이.
몸속의 피가 들끓으면 육체가 자동으로 움직였고, 정신을 차리고 나면 항상 이런 식이다.
제정신이 돌아오면서 스스로를 지탱하던 힘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 때문에 나는 부여잡고 있던 남자의 옷자락을 놓치고 말았다.
내 이상과 동시에, 누워있던 남자가 두 손으로 내 몸을 밀어제쳤고, 나는 힘없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다.
바닥에서 일어난 남자는 힘겨워 보이는 행동 거짓으로 죽을힘을 다해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나는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어느샌가, 땅에 떨어진 스마트폰은 나를 따라하듯 그 기능을 정지시켰다.
얼마나 땅바닥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을까?
힘겹게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 있네···.
나는 가다듬은 정신으로 몸을 일으켜 세워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여자아이의 긴 검은 머리는 헝클어지고 흙 알갱이로 얼룩져있었다.
입고 있는 교복과 스타킹은 심하게 찢어져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
그 때문에 흰 피부와 함께 무늬 없는 하얀색 브래지어를 노출됐다.
그녀의 초점 잃은 갈색 눈은 어딘가 어긋나 있는 허공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방에 항상 챙기고 다니는 학교 체육복을 꺼내 그녀에게 입혔다.
찢어진 교복 위에다가 바로 저지를 입힌 후 바지를 입히려고 했을 때, 그녀의 다리 부근이 축축하게 젖어있는 걸 발견했다.
시큼한 냄새까지 동반되는 걸 보니 무엇 때문인지는 뻔하디뻔했다.
어쩔 수 없이 교복 상의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허벅지 부근에 물기만을 대충 닦은 다음 바지를 입혔다.
그녀는 내 서투른 손길에도 전혀 저항하지 않았고, 몸이 힘없이 축 처친 탓에 옷도 수월하게 입힐 수 있었다.
옷을 다 입힌 후, 주의를 둘러보니 땅바닥에 떨어진 베이지색 헤어슈슈가 눈에 띄었다.
아마도 남자와 몸싸움을 하던 도중 벗겨졌겠지···.
나는 그것을 주워들고는 손으로 가볍게 먼지를 털어 그녀에게 건넸다.
아까까지만 해도 초점이 어긋나있던 갈색 눈은 어느새 내가 내밀고 있는 것에 집중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큰 눈망울은 요동치듯 흔들렸다.
“왜··· 왜···.“
울먹이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가···르쳐···주세요···. 왜 저에게만··· 왜 저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요···! 왜! 대체 왜!! 어째서··· 왜 이런 일들만···.“
그녀는 울부짖으며 나에게 물음을 구했다.
그 눈물을 보니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보였다.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으로 말이다.
거의 조건반사적이었다.
내가 울먹이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것은.
불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위선적인 내 행동도 스스로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이겠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내면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하지만 상처 입은 이 곁에 누군가가 있어 주는 것만으로 그 상처를 완화시키고, 고통을 조금이나마 누그러트릴 수 있다.
나는 내가 경험한 걸 토대로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질적으로 붙어있는 흙 알갱이와 거칠게 헝클어져있는 머리카락은 마치 내 손길을 거부하는 것만 같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그녀를 쓰다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전부, 전부 사라지고 없는데···. 아무도··· 아무도 없는데···.“
어디선가··· 지금과 비슷한 일을 곁은 적이 있다. 껴안아주던 따뜻한 온기, 부드러운 손길, 상냥한 목소리···.
그녀가 흐느껴 울면 울 수록 그 안에선 짙은 호소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 호소에 응답하고 싶었다.
“세상에···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 네 주위에 있는 것들은 언젠가 부서지고, 언젠가 사라질 거야. 넌 이미 다 사라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소중한 게 네게 생길 거야. 그럴 때마다 잃지 않으려고, 부서트리지 않으려고, 견디며 발버둥 쳐봤자 결국엔 다시 잃게 될 거야.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상처입고 피 흘리며 아파할 날은 계속되겠지···.“
깨지고 부서지고 사라진 끝에 마음속에 남는 공허함.
그 공허함이 얼마나 끔찍하고 괴로운진··· 나는 잘 알고 있다.
겪어보았기에, 느껴보았기에···.
그녀를 껴안았을 때부터··· 아니, 그녀의 눈물을 보았을 때부터일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제대로 엮인 것은―.
“그럼에도 혼자가 싫다면, 내가 네 아무도가 돼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