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앞서도 되는 걸까>
“절대 안 돼!!!“
혹, 걸어 잠근 문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을까? 그런 엉뚱한 걱정이 들 정도로 큰 외침이었다, 별이의 그 외침은.
이 상황에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다니···.
오늘은 꽤 지친 모양이다. 아마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녀석도 나만큼 지쳤겠지만.
하지만 별수 없다.
해는 이미 저물었으니.
“별아.“
“안 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어쩔 수 없다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아니, 난 몰라! 모른다고! 어째서 영이 네가 저 여자를 신경 쓰는지··· 진짜 모르겠어···. 정말로···.“
별이가 복받쳐오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모양이다. 울먹이며 떨리는 작은 어깨가 또렷이 내 눈에 박힌다. 나로 인해 별이의 가면이 또 한 번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소중한 것을 상처 입히면서까지 선택한 것, 그 선택의 시작은 어디이며 또 끝은 어디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왜···! 어째서 나는 이 순간까지···.
“저 아이, 김설은 옛날에 나와 비슷해. 내 옆엔 네가 있지만, 저 아이 곁엔 진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 내 선택이 널 실망시키고 상처 입힌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부탁할게. 난 별이 네가 나에게 그랬듯이 저 아이를 도와주길 바라···.“
김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영아··· 넌 너무 잔인해···. 네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바로 네 옆에 내가 있으면서···.“
별이가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를 감추려는 듯이 말이다.
“별아···.“
내가 그 떨림에 걱정스러움을 내비치자, 별이는 스스로 얼굴을 거칠게 닦으며 자조어린 미소를 지었다. 살짝 충혈 된 눈망울과 채 지워지지 않은 눈물 자국이 그녀의 억울함과 내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나타냈다.
“이제 괜찮아. 미안해··· 내 고집만 부려서.“
왜 사과하는 입장이 바뀐 걸까···.
“진짜 괜찮아?“
“응, 나는 괜찮아.“
별이의 그 선의의 거짓말이 날 죄악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줄래.“
“···말해.“
“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날 혼자 두지 않겠다고···.“
“그건··· 너도 알잖아··· 절대 내가 널 먼저 떠나지 못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자꾸 불안해···. 요즘 들어 영이 네가 날 자꾸 밀어내려고 하니까···.“
순간, 단편적인 기억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4년 전, 불안해하는 나에게 별이가 어떻게 해줬는지···.
나는 별이의 팔을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익숙하지 않던 탓에 조금 거칠게 끌어안은 느낌이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건 이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어느새 별이의 곱던 단발머리는 내 손길에 헝클어져 있었다.
역시 이 녀석의 다정함은 아무나 흉내 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제 안심이 돼?“
별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질하며, 내가 조심스레 말했다.
“응···.“
“앞으론··· 네가 불안해하지 않게 할게···.“
“응···.“
“미안해···.“
“응···.“
진심이다. 항상 별이에겐 미안한 감정이 앞선다.
정말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하지만 김설에게는―.
얼마 지나지 않은 듯싶다.
시간이 멈춘 듯 내 품속에 고개를 묻고 있던 별이가 얼굴을 들었다.
“오늘은··· 같이 자도 돼?“
이거··· 오랜만이네···.
“···좋아, 그걸로 네가 안심할 수 있다면.“
옛날엔 항상 같이 잤기에 별이의 이러한 응석이 내게 낯설지 않았다.
익숙해지면 나에게도 별이에게도 좋지 않지만··· 가끔, 아주 가끔 정도는 괜찮겠지···.
미뤄두었던 숙제를 푼 기분이다.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지만··· 지금은 꽤 홀가분해졌다.
“일단 김설하고 얘기하고 올게. 그다음엔··· 조금 늦었지만 같이 저녁 먹자.“
“응!“
별이는 내 말에 답하며 해맑게 미소 지었다. 오로지 별이만이 지을 수 있는 최고로 예쁜 미소로.
그 미소를 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눈물 짓던 별이는 거짓으로 느껴졌다.
둘 다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별이 씨와는··· 얘기가 끝나셨나요?“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니, 소파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던 김설이 내게 말했다.
“그래.“
나도 녀석을 따라 소파에 기대앉았다.
푹신한 쿠션이 내 몸과 함께 쌓여 있던 피로를 부드럽게 지탱해주었다. 그리고 극상의 매끈한 것이 내 하반을―.
“어이, 쫓아내기 전에 다리 치워.“
스타킹에 둘러싸인 녀석의 긴 다리가 내 허벅지를 옭아매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제 옆에 앉으시기에 아까 그게 기분이 좋으신 줄 알고···.“
네 얼굴을 보는 게 껄끄러우니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는···.
“에이, 치우라고!“
나는 녀석의 다리를 거칠게 집어 던졌다. 그와 동시에 김설의 입에서 꺄아악! 하는 짧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은색 스타킹에 가려진 살결이지만 쓸데없이 부드러··· 아, 아니 그냥 기분 나빴다.
“너무해요!“
“안 너무해.“
“아뇨, 너무하세요!“
“안. 너. 무. 해.“
“너. 무. 해. 도. 너. 무. 너. 무. 해. 요!“
진짜 짜증나게!
“애초에 네 다리를 나한테 언진 게 잘못 아니야? 그딴 개매너는 어디서 배운 거냐?!“
“그러는 영이 씨야말로! 대화할 땐 그 사람을 제대로 쳐다봐야 한다는 것도 안 배우셨나요?! 어디서 그런 시선 처리를 배워선···. 애초에 잘못은 아까부터 영이 씨가 먼저 하신 거라고요!“
“내가 전에 말했잖아, 의사가 나보고 대인기피증이라고 했다고!“
“그건 이미 일상생활 하시는데 문제없을 정도로 괜찮아지셨다고도 하셨는데요.“
“안 괜찮아, 나 아직 아파! 사람 보는 게 싫고 무섭단 말이야!“
“거짓말···! 제가 봤을 때 영이 씨는 그냥 애정표현이 많이 서투신 거뿐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대인기피증이라는 사람이 성폭행당할뻔한 사람을 구하고, 그 사람을 집까지 업고 오냐고요!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아··· 그냥 다시 갖다 버리고 올까···? 지금이라면 늦지 않은 거 같은데···.
“이래서 츤데레는 짜증난단 말이야! 건방지고 표현이 서툰 게 매력이라지만 사람 눈 정돈 쳐다봐야지! 뻔히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는데··· 진짜 너무해, 너무하다고!“
“저기? 김설 양? 말투가 바뀐 거 같은데요? 저만 느끼는 건가요? 그런가요?“
“헤헤, 별거 아니에요. 혼잣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으음··· 혼잣말이 아닌 거 같은데. 신경 쓰지 말라 하는 게 더 신경 쓰이는데. 그리고 그 눈매··· 되게 무서운데··· 아!
눈이 자꾸 가버리는 건··· 정말 내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앗! 영이 씨! 드디어 절 쳐다보시네요. 자, 어서 빨리 시작합시다. 다시 츤츤되시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예.“
근데 있잖아··· 대체 츤츤이 뭐야···?
※※※
“···이 집에서 살아도 좋아. 대신 몇 가지만 지켜줬으면 좋겠어.“
“와아~! 뭔가요? 전 뭘 하면 되는 건가요? 영이 씨의 밤 상대라던가, 영이 씨의 성욕처리라던가, 영이 씨의 섹스프렌드가 되면 되는 건가요?“
잠깐, 네가 말한 거 전부 같은 뜻 아니냐? 이 여자 머릿속엔 나랑 하는 거밖에 없는 건가?
어느새 김설과 마주 보고 있는 나는 녀석의 표현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달리, 녀석의 갈색 눈은 진지함으로 흥분하고 있었으며 양쪽 뺨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상기되어있었다.
“···오버하지 마. 그딴 건 필요 없어.“
“윽···. 쌀쌀맞네요···. 왠지 남편이 상대해주지 않는 부인이 된 심정이네요. 기분이 이상해요···.“
“시끄럽고! 잘 들어. 여기서 사는 동안 별이 녀석 대신 살림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런 거 말이야.“
“네! 그건 자신 있어요. 별이 씨 요리 솜씨는 형편 없··· 꼭 요리는 제가 하고 싶어요.”
그거라면 속마음을 굳이 누설시키지 않아도 너와 난 한마음 한뜻인 거 같군.
“됐어, 그럼. 다음은 달마다 생활비 내놔. 이 집이 방 3개 화장실 2개라곤 하지만 꽤 비싼 집이거든. 그리고 조금 있으면 근처에 종합 체육관도 생겨서 아파트 값이 폭등할 거야. 쉽게 말해 내 집에 세 들어 산다는 개념이지.”
정확히 말하면 실소유주는 「그 여자」지만···. 뭐, 이젠 그딴 거랑은 관계없으니.
“그, 근데 저··· 아시다시피 제가 집세 낼 돈이 없어서 살던 곳에서 쫓겨난 건데요···.“
“알아. 네가 오늘 다 말했잖아. 할머니 보험금도 얼굴모를 네 엄마 빚 갚는데 다 탕진했다고. 돈 걱정은 하지 마. 돈 같은 건 충분히 아르바이트해서 벌면 되니까, 물론 네가.“
“···돈 말고 몸은 안 받나요···? 저, 다른 누구도 아닌 영이 씨라면 기꺼이···.“
“아니, 필요 없으니까, 돈 내놔 돈!“
“그, 그렇지만··· 어느 누가 중학교 3학년짜리 아르바이트 생을 구할까요? 그런 순정로맨스 만화에나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있을 리가···.“
“있어.“
“그렇군요···. 중학교 3학년짜리를 쓰는 곳도 있··· 네? 있다고요?!“
화들짝 놀람에 갈색 눈을 동그랗게 만드는 김설 녀석이 귀엽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아마 나의 크나큰 착각일 것이다.
제발 그렇게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