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 자리는 내가 책임지고 구해줄게. 그러니 넌 달마다 내게 돈을 주면 돼. 한 달에 20···? 아, 아니다. 십 만원···.“
명분을 줘야하지만 20만원은 녀석에게 좀 과도할 거 같다.
“와아··· 방금까지만 해도 이 집 비싸다고 하신 분은 어디계신 누군가요? 가격이 너무···.“
“뭐, 뭐야? 비싼 거야?“
역시 더 내려야하려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너무 싸요, 싸다고요! 방 3개 화장실 2개집이잖아요. 거기다 동거하는 남자가 매력 터지는 츤데레에 잘생기고 상냥하기까지 하잖아요! 다른 여성분한테 뺏기기 전에 할래요! 저 여기서 살래요! 무조건 살래요!“
···잘생기고 상냥한 남자는 누구야? 그리고 츤데레라는 건 대체 뭐냔 말이야?!
“네가 하나 오해하는 게 있는데··· 방 3개 화장실 2개인 집에 널 포함해 사람 3명이 사는 거야. 거기다 넌 별이랑 같은 방에서 잘 거고.“
안방과 안방에 붙어있는 화장실은 내가 쓰고 있고, 바로 맞은편인 작은 방은 별이가 쓰고 있다.
뭐, 작은 방이라 해봤자 크기는 안방과 비슷하지만 말이다.
나머지 한 방은 거실 화장실 옆이다.
거긴 드레스 룸 겸 창고 용도로 쓰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래도 별이가 같은 방을 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면··· 하는 수 없이 김설을 거기서 재웠겠지만.
“전 괜찮아요! 저도 이제 혼자는 싫으니까요. 그리고 별이 씨랑 사이가 서먹해지면 영이 씨 방으로 가면 되고···.“
“아, 맞다. 그리고 내 방은 허락 없이 출입금지.“
“네?! 그건 안돼요! 인정할 수 없어요!“
“걱정하지 마. 네가 내 방에 오려고 해도 별이 녀석이 잘 캐치할 테니까.“
“으으으윽···. ···역시 마음에 안 드는 여자네요···.“
“뭐라고? 안 들렸어.“
“아, 아니에요. 또 당부하실 말씀 있나요?“
“아··· 마지막으로 하나 더.“
“아, 네.“
“내가 옛날에 정신과 상담을 받은 건··· 저번에 말했으니 알고 있을 거야.“
“네···.“
“그래···. 이건 당부라기보다··· 부탁이야. 웬만하면 별이와 내 과거사는 더 이상 묻지 말아줘. 별이 녀석은··· 「그 일」을 싫어하니까···.“
이건 부탁일까? 통보일까? 아니면 경고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다.
우린 벌어진 상처를 아직까지도 치료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저 남에게 감추고 숨길뿐···.
“괜찮아요. 전 다 괜찮아요···.“
“어···?“
김설의 갈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변했다. 그녀만이 짓는 온화한 미소가 내 눈에 박힌다.
그 작은 미소는 상냥함을 넘어 자애롭게까지 보였다.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 잖아요. 물론 저는 별이 씨와 영이 씨의 관계가 궁금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쭉···. 하지만··· 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두 분께 느끼는 감정과, 두 분이 제게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저는 꼭 노력해서 두 분께 신용 받고 싶어요. 신용 받아서··· 제가 제 얘길 했던 그날처럼, 두 분이 제게도 말해주시길··· 기다릴게요···.“
“···신용이라.“
아니, 넌 큰 착각을 하고 있어.
난 이미 널 신용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야.
너에겐 정말 미안하다.
네 과거만 듣고, 내 과거를 감춰서··· 내 아픔의 숨겨서···.
“그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영이 씨, 왜 그러세요?“
“아니야, 아무것도···. 그나저나 빨리 저녁밥이나 해!“
“아, 네!“
녀석은 날 좋아한다고 자신의 감정을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얼마 안 가 자연스럽게 풀리게 될 것이다.
「사랑」 같은 것보다, 그저 자신 곁에 누군가가 있어준다는 게 중요하다는 걸··· 이 녀석도 금방 깨닫게 될 테니까.
※※※
“치사해요, 치사해요! 납득할 수 없어요, 횡포란 말이에요! 권력이라는 건 남용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고요!“
···권력이라는 건 남용하라고 있는 거야··· 가 아니라, 어쩔 수 없잖아. 따지고 보면 다 너 때문이라고.
이미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간.
방으로 들어가려는 우리를 향해 김설 녀석이 무언가 납득하지 못했는지 잔뜩 볼을 부풀리고 있다. 동시에 평소의 또렷한 둥근 눈이 잔뜩 인상을 찌푸린다.
“또 뭐가?“
나는 녀석에게 물음을 구하는 투로 말했다.
“모르시는 거예요, 아니면 모르시는 척하는 건가요?“
흐음, 아무래도 전자 후자 다 속하는 거 같습니다만?
“왜 영이 씨는··· 그렇게 귀엽게 고갤 갸우뚱거리시는 건가요···.“
“응? 뭐라고?“
“아니에요···. 카메라가 없는 게 조금 아쉽네요···. 어, 어쨌든! 별이 씨랑 같이 방으로 들어가시는 게 이해가 안 돼요! 두 분이 얼마나 서로를 소중히 여기신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남녀 둘이 같은 침대에서 잔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상식은 상식일 뿐이야. 내가 영이랑 자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잠자코 있던 별이가 김설 못지않게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로 말했다.
핑크색 바탕의 땡땡이 파자마를 입은 주제에 묘하게 박력 넘치는 녀석이다.
“으윽, 상, 상관있어요! 상관있단 말이에요! 신혼첫날부터 방치당하는 기분이 든단 말이에요···. 하, 하다못해··· 저도 영이 씨랑 같이 자게···해주세요···.“
“흥! 거절한다. 누가 너 같은 암캐를 영이랑 같이 자게 둘 줄 알고?“
“암캐라고 매도해도 좋아요, 제발 같이 자게 해주세요···!“
녀석이 별이의 옷자락을 꽉 쥔 채 사정하듯 말했다.
근데 이상하다··· 원래라면 나한테 매달려야 하는 거 아니야?
“절. 대. 싫. 어.“
“제발요, 별이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저도 영이 씨랑 같이 자게···.“
“안 돼.“
“영이 씨···?“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서 빨리 상황을 종결시키고 싶었다.
내가 피곤해서인지, 녀석이 애처로워 보여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목 안에서 감돌고 있던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네가 말한 대로 상식이잖아, 남녀가 한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는 건. 그러니까 안 돼.“
“···아.“
내 말에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녀석.
“남녀··· 상식··· 그래요, 맞아요! 상식이에요! 히히, 역시 그랬었군요. 별이 씨, 저 먼저 자러 갈게요! 내일은 주말에다 영이 씨와 데이트가 있으니까~!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아, 영이 씨도 안녕히 주무세요!“
응? 이 녀석 왜 이렇게 텐션이 올라간 거지?
“자, 잠깐만! 김설!“
방에 들어가려는 녀석을 나도 모르게 붙잡아버렸다.
“네? 왜 그러시는지···?“
“너, 너 갑자기 왜··· 아, 아니다···. 내일은 오후에 갈 거니까 그렇게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돼.“
거절당한 거에 침울해질 줄 알았더니, 녀석은 치켜뜬 둥근 눈을 껌뻑껌뻑 거릴 뿐이었다.
“아, 네! 히히~ 왠지 기분이 좋네요. 영이 씨가 하신 말이···.“
그렇게 볼 붉히며 웃지 말란 말이야!
“···아 몰라! 머리나 제대로 말리고 자! 너, 생각보다 복슬복슬하니까.“
괜스레 부끄러워진 나는 녀석의 머리를 지적했다.
지금 녀석은 잠자기 직전이라 그런지 평소 착용하던 베이지색 헤어슈슈 빼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자니 나도 모르게 별이와 같은 생머리가 아닌 곱슬기 있는 머릿결이 녀석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버렸다.
“아···. 우읏! 영이 씨는 바보!!“
쾅! 하는 소리가 거칠게 닫힌 문짝의 아픔을 호소해주는 거 같았다.
분명 삐졌겠지···. 뭐, 내일 풀어주면 되니까.
“이만 들어가···자···?“
어라?
아까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던 별이는··· 어느새 사리지고 없었다.
불 꺼진 방 안.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리는 순간이다.
푹신한 침대와 두꺼운 이불 못지않게 별이 녀석의 몸이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따뜻해···.“
내게 바짝 다가온 별이가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언제 방에 들어온 거야?“
“알게 뭐야···. 너 같은 거 정말 싫어···.“
이 녀석은 또 왜 우울해진 거야?
“싫다면서 왜 붙는 건데.“
“가을 새벽은 쌀쌀해.“
그렇게 말하며 천장을 보고 있는 내게 자신의 다리를 올리는 녀석.
“···내가 또 잘못한 거라도 있는 거야? 1년 만에 같이 자는 거잖아, 우리···.“
“넌 항상 내게 잘못해. ···1년 만에 같이 자는 거조차··· 잘못된 거야.“
“그, 그건 어쩔 수 없잖아···. 우린 이제 초등학생이 아닌 걸···. 우린··· 영원하지 않으니까···.“
4년 전 그때,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기 바빴던 우리는―.
“영이가 날 밀어내지만 않는다면··· 우린 반드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어.“
“널 위해선 이건 좋지 않···.“
“닥쳐! 그런 건 내가 판단할 문제야! 넌 잠자코 내 옆에만 있으면 되는 거야! 아무도 돌아보지 말고, 아무것도 시작하려하지 않고··· 지금처럼··· 지금처럼 멈춰 선 채로 내 곁에 있으란 말이야··· 이 바보야···!“
“···미안해···. 울지 마 별아···.“
“안 울어, 안 울 거야! 앞으로 난··· 너 때문에 절대 울지 않을 거야···!“
더 이상 다가올 수 없을 정도로, 별이가 날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마치 떨어졌던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 같이. 가까이, 더욱 가까이···.
“험하게 말해서 미안해···.“
“괜찮아··· 나는 괜찮아···.“
어느새 내 시야는 천장을 비추고 있지 않았다.
N극이 끌어당기면 S극은 끌리기 마련이다. 그 반대로, S극이 끌어당기면 N극은 끌리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 눈에 가득하게 비추어지고 있는 것은 별이가 애써 눈물을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분명 별이를 안심시켜주려고 했을 텐데···.
나는 별이에게 몸을 반짝 가져다댔다.
내 쪽에서도 더는 다가갈 틈이 없을 정도로 가까이···.
이제는 별이 혼자 날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다.
내 쪽에서도 별이를 끌어당기고 있다.
지금은 반쪽과 반쪽이 만나 하나가 됐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서로 파자마와 티셔츠를 입었지만, 얇은 천 탓에 나와 별이의 살결은 선명하게 부딪혔다.
그럼에도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함이 감도는 감촉이었다.
희미하게 나는 치약 냄새와 가벼운 샴푸향이 내게 흘러들어왔지만, 그 역시 날 별이에게서 떨어트리긴 커녕 더욱 강하게 끌어당기는 요소로 작용시켰다.
누가 누굴 안심시켜 주고 있는 건지···.
“···나도 따뜻하네.“
“다행이네···.“
별이는 평소보다 더 낮게 중얼거리듯 답하였지만, 녀석의 체온이 확실하게 그 답을 내게 전달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