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늦은 시간이 되었음에도 시곗바늘은 자신이 맡은 업무를 계속해 나갔다.
내가 너무 강하게 끌어안은 탓에 별이가 「영아, 답답해··· 숨을 못 쉬겠어」라고 말해 포옹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었다.
1년 전, 우리는 매일같이 함께 잠을 잤다.
그때마다 한 명이 완전히 잠들기 전까지 계속 얘기를 나눴다.
아무도 잠들지 않았을 때는 아침까지 이야기한 적도 있다.
이야기의 흐름은 대체로 별이가 이끌었지만··· 오늘은 녀석이 많이 피곤했는지 지금은 주로 내가 말을 붙이고 있다.
아, 지금은 새벽이니 어제인가?
“있잖아··· 궁금해서 묻는 건데···. 아까 언제 방에 들어온 거야? 분명히 옆에 있었잖아.“
“···몰라···.“
“그러지 말고 가르쳐줘. 아까 진짜 놀랐어, 네가 갑자기 사라져서···.“
“···상식, 남녀, 침대···.“
“어···? 그게 왜?“
“남녀가 한 침대에서 자는 건 잘못되었다고··· 네가 말했을 때···.“
“그러니까 그게 왜?“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진짜 몰라서 묻는 겁니다만.“
진짜 모르겠다.
“네가 그 말을 한순간··· 스스로 개를 여자로 인정했다는 거잖아···. 영이 네가···.“
어··· 그런 거였어? 난 그냥 별이 너한테 매달리는 녀석이 애처로워 보여서···.
순간적으로 이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기에 힘겹게 눌러 담았다.
“몰랐어···. 그래서 김설 녀석이 기분이 확 좋아졌던 거구나···.“
또 착각하게 만들었단 건가···?
“···그리고.“
“그리고?“
나는 별이의 말을 따라 하며 다음을 재촉했다.
“···나는 역시··· 네게 여자가 아니구나···.“
“어? 뭐라고?“
느슨해진 포옹만큼, 녀석의 확 작아진 목소리는 더 이상 내게 전해지지 못했다. 이미 오래전 어둠에 익은 내 눈에도 더 이상 별이의 표정은 읽히지 않았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내일 데이트 잘하라고.“
“뭐야? 도중에 사라진 주제에 그건 어떻게 아는 건데?!“
“거실에서 그렇게 크게 날뛰면 다 들린다고. 암캐 주제에··· 너무 텐션 업 됐어··· 재수 없게.“
“오해하지 마. 데이트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냥 녀석 알바자리 구해주러 가는 거야.“
근데 내가 지금 왜 별이한테 변명하고 있는 거지?
“···농담이야. 영이 네가 그 년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질 리 없잖아. 그런 건··· 이미 오래전에 네게서 죽고, 아직까지도··· 되살아나지 못했으니까···.“
어둠속에서, 별이가 내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나에게서 죽은 것··· 되살아나지 못한 것···.
나는 그게 뭔지 알고 있다.
그리고―.
“아아, 그래. 녀석에겐 「동정」이야. 다른 감정 같은 건 없어.“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별이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째깍째깍거리는 울음소리가 시곗바늘의 근면함을 들려주었다.
역시나 그 소리는 자장가였고, 짙은 피로에 더해져 이야기 도중에도 내게 졸음을 선사하기엔 충분한 울림이었다.
아마도, 내가 별이 보다 먼저 잠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항상 내가 먼저 잠이 들면··· 별이가 내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1년 전을 끝으로, 내가 별이에게 함께 자는 걸 그만두자고 한 이유다.
1년 전··· 내가 희미해진 의식 속에서, 그것을 느끼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녀석을 멀리하려고 하는 일 따윈 없었을 텐데···.
하지만 다행이다.
이번에는 잠이라는 것이 내 의식을 확실히 놓아버렸기에···.
다행이다.
별이가 내게 키스하는 걸 느낄 수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
“웬 교복?“
토요일인 오늘, 교복 차림의 김설에게 내가 물었다.
“···다른 옷이 없는 걸요.“
“하나도 없는 거야?“
“네···. 옛날에 할머니가 가져다주신 옷은 다 작아져서···. 그래도 다행히 속옷 같은 건 몇 개 있어요.“
녀석의 말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녀석이 종종 내 집에 올 때마다 교복을 입고 있었다는 걸···. 그때 찢어진 걸 수선해서···.
“잠깐 기다려.“
“네? 영이 씨? 왜 그러세···!“
조절한다고 했지만 내 몸은 역시 말을 듣지 않았다.
쾅!! 하고 닫힌 문짝은 제법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침대에서 자고 있던 별이는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성큼성큼 별이에게 다가가 녀석의 몸을 흔들었다.
자고 있는 애를 강제로 깨우는데도 딱히 죄책감 같은 게 들지 않았다.
내게 따로 우선순위가 있어서겠지.
“별아··· 잠깐만 일어나봐.“
새근새근 자고 있던 별이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에도 나는 별이를 재촉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별아.“
계속 가볍게 흔들었지만 별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별아, 일어나.“
이번엔 조금 더 쌔게 흔들었다.
“망할···! 일어나보라니까!“
급기야, 내 행동이 거칠어지고 말았다.
“···흔들지 마, 이 바보야···. 너, 나한테 욕했어···. 나 다 들었어···.“
잠결에 힘없이 뜬 눈이지만, 날카롭게 뜨인 눈빛은 별이가 제법 화가 났다는 걸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너도 어제 나한테 욕했으니까··· 이건 쌤쌤이야.“
내 입에서 나온 거지만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을 것이다.
“흐아암~ 너 나중에 죽었어···. 「누나 미안해, 한 번만 봐줘」라고 울면서 빌어도 절대 용서 안 해줄 거야···.“
“하품하면서 말해서 하나도 안 무섭거든?! 그것보다··· 옷 좀 빌려줘.“
“뭐야··· 너 역시 여장이 취미였어? 그거라면 엄청 오랜만···.“
뭔가 끔찍했던 순간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으으··· 그 생각만하면···.
“아니야!! 나 말고 김설이 입을 거야! 김설이!“
“또? 어제 내 파란색 땡땡이도 뺏어갔잖아. 내가 두 번째로 아끼는 잠옷인데···.“
“어쩔 수 없잖아···. 찢어진 교복도 수선해서 입는다고, 불쌍하지도 않아?“
“···그냥 불쌍해서야?“
당연하잖아!
“그, 그래··· 불쌍하잖아!“
“좋아, 알았어. 엄마가 준 거 빼고는 아무거나 다 입혀도 돼. 대신··· 오늘도 같이 자도 돼···?“
“응, 돼! 오늘도 같이 자자, 고마워 별아.“
별이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잠깐만! 나도 부탁할 게 있는데···.“
그런 나를 침대에 누운 별이가 불러 세웠다.
“급한 게 아니라면 밤에 들어도 될까? 약속시간까지 촉박해서.“
“어···? 그래····· 알았어. 데이트 잘 다녀와.“
“나 참, 데이트 아니라니까···.“
처음엔 그렇게 거칠었던 문소리였지만, 이제는 그 소리가 내 귀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거실로 나오자마자, 내 눈에 비친 것은 나를 보며 한하게 웃어주는 김설이었다.
녀석의 미소 속에 있는 온화한 아름다움과, 그 안에 섞여 있는 이질적인 슬픔이 날 그녀에게로 멈추게 했다.
시간이 흐르지 않던 그 짧은 순간―.
“영이 씨?“
그 짧은 순간 탓에 시간이라는 것이 내게서 아예 결렬된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순간은 말 그대로 순간일 뿐. 어느새 다시 활동을 시작한 시간.
그리고―.
“약속까지 30분밖에 안 남았잖아!“
“네, 그러니 이제 출발을···.“
나는 김설의 손목을 잡아끌며 우리에게 흐르는 시간을 재촉했다.
“자, 빨리 옷 갈아입으러 가자.“
“네? 잠깐만요! 영이 씨?!“
※※※
아···. 토 할 거 같아···. 여기도 사람··· 저기도 사람··· 바로 옆에도 사람···.
“영이 씨,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너무 많잖아. 외출 전에 괜히 들떠서 이런 걸 깜박하다니···. 걸어서 10분이면 가는 거리가 인파로 꽉 막혀버릴 줄이야···.
“주변에 무슨 행사 같은 걸 하는 걸까요? 시내 근처라고 해도 사람이 너무 많네요.“
알게 뭐야! 내 눈앞에서 다 사라지란 말이야!
“와아···. 지금 영이 씨 표정, 엄청 불만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네요.“
와아···. 너랑 별이 녀석은 어떻게 내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거냐?
“근데··· 영이 씨, 이 옷 너무 크지 않나요? 꼭 남자 사이즈 같은데···.“
김설이 자신이 입고 있던 후드티의 앞부분을 잡아 펄럭거렸다. 그 때문에 쇄골 언저리와 하얀 속옷 끈이 들어 나왔고, 애석하게도 그 노출된 순간을 내 시야가 포착해버렸다.
이 녀석··· 안에 아무것도 안 입은 거냐···.
“으흠···. 맞, 맞아. 그 옷 XL사이즈야.“
“···역시 그랬군요. 왜 이렇게 큰 걸 제게 입힌 건가요?“
이번에는 녀석이 날갯짓을 하며 소매 부분을 펄럭였다.
에이, 귀찮게! 눈이 계속 움직여지잖아!
“소매 접어.“
“벌써 접었는데요.“
“한 번 더 접어! 요즘은 오버사이즈로 입는 게 유행이란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이거··· 귀엽게 보이려고 환장한 것 같아서 엄청 부끄러운데요···.“
귀엽게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귀여운 걸 더 귀엽게 하기 위해 그렇게 입는 거다, 이 멍청아.
“팔 내놔, 소매 접어줄게.“
내가 명령조로 말했음에도 녀석은 「네···」라고 말하며 고분고분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강아지···.
“이제 됐지?“
“네···. 근데··· 저보다 작은 별이 씨가 이런 걸 입으면··· 엄청 귀여우실 것 같네요···.“
“아니, 그건 무리야. 아무리 오버사이즈라 해도 별이가 입을 거면 한 사이즈 작은 걸로 해야 할걸?“
별이 녀석은 160 초반대인 반면 넌 눈대중으로도 167 이상은 되니까.
“네? 이거 별이 씨 옷이 아닌가요?“
“몰랐어? 그 후드티는 내 거야. 네가 입고 있는 치마랑 스타킹, 신발은 모두 별이 거지만.“
“아··· 그렇군요···. 이게 영이 씨의 옷···.“
“아니··· 후드티만 내 거라니까?“
“히히~ 어쩐지 좋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이 옷이 영이 씨 옷이었군요. 저 이거 절대 안 벗을래요. 죽을 때까지 입고 있을게요!“
녀석의 태도가 갑자기 180도로 달라졌다.
내 옷을 집어삼킬 투로 킁캉킁캉거리는 건 귀엽지만··· 그렇게 대놓고 좋아하니 왠지 변태 같아서 무서운데···.
역시 살짝 귀엽긴 하지만.
지금 김설 녀석의 모습은 충분히 내 눈을 사로잡고도 남을 정도였다.
머리 스타일은 평소와 같이 긴 흑발을 앞으로 빗어 녀석의 보물인 베이지색 헤어슈슈로 묶었고, 위에는 오버사이즈인 검은색 후드티, 밑에는 무릎 위까지 오는 검은색 A라인 스커트, 얇고 긴 다리를 감싸는 검은색 팬티스타킹과 이어진 검은색 구두. 그리고 그 모든 검은색들과 대조되는 새하얀 피부.
안 그래도 별이 못지않게 예쁜 얼굴인데··· 올 블랙패션이 더해지니 한 번 본 걸론 아까워 못 베낄 정도였다.
“···제가 좀 오버했죠···? 그래도 너무 빤히 쳐다보시니까 부끄러운데요···.“
큰 키에 마른 체형이라 그런지 옷 입히는 맛이 쏠쏠했지···. 별이 녀석이 내 코디를 해줄 때 왠지 모르게 들떠 보였던 게 이해가 되네.
“으윽···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 마세요···.“
평소의 기품 있고 온화한 녀석과는 달리, 지금의 귀엽고 섹시한 모습에 갭이 느껴졌다. 내 시선을 힘겹게 피하며 볼을 새빨갛게 붉히는 것도, 이 녀석이 가진 매력에 일부로 보였다.
“흐으에에에에···!! 평소엔 사정사정해도 잘 안 쳐다봐주시면서!“
딴 델 쳐다보면 멀미날 거 같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건 불가항력이다.
역시나 역시, 나의 자기 보호를 위한 합리화가 어김없이 발열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