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마치 비명처럼 들린다.
기분 탓이야, 기분 탓이야,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걸음이 내는 비명소리는 내 무거운 몸에서 빠져나가는 체력과 반비례 되었다.
지친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잖아!
“사람이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네···.“
“영, 영이 씨···. 아무리 그래도 그 표현은 너무 삐뚤어졌다고 생각하는데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녀석의 지적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렇게 몇 분을 투덜거리는 발걸음을 내디뎠을까?
나는 보았다.
사람으로 이루어진 파도 속에서, 백발의 여자가 자신의 긴 머리를 흩날리며 유유히 헤엄처가는 모습을···.
그 여자에겐 이런 광경이 익숙한 듯 보였다.
수많은 벌 떼의 동요와 일제히 울리는 스마트폰의 셔터음, 그 모든 게 마치 그 여자의 일상이고 삶인 것처럼···.
점차, 그 여자는 내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관중들의 마법은 풀렸고, 제각각의 일상을 되찾았다.
“우와··· 방금 그 여성 분 엄청 멋졌어요. 키도 크시고··· 서양 분이신 것 같았는데, 되게 유명한 분이신가 봐요. 제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면 완전히 얼어버렸을 거예요.“
“······.”
“앗! 영이 씨 봐요! 인파가 줄었어요.“
대체 뭐였을까···? 아까 그건··· 단지 기분 탓일까?
“영이 씨··· 왜 그러세요?“
김설이 내 손을 잡은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덕분에 나도 이젠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역시 그럴 리가 없겠지···.
내 눈앞에서 흔들리는 그 눈망울을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어설픈 손길로 녀석을 쓰다듬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어서 가자.“
“네. 영이 씨 같이 가요!“
그 여자, 선글라스 때문에 정확히 시선을 읽을 수 없었지만··· 날 보고 웃은 거 같단 말이지.
하아··· 이놈의 자의식과잉. 골치 아프네···.
※※※
“흐음~ 역시 꼬마의 능력은 훌륭해. 몇 달 전에 왔을 때랑은 여자가 또 달라졌잖아~“
심플해 보이는 하얀 벽지에 가구를 최소화한 실내 안이지만, 이곳의 주인이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서적이 빼곡히 줄 서 있었다.
이 수많은 서적들의 주인은 마치 희귀한 동물을 보는 것처럼 날 향해 호기심 짙은 미소를 보냈다.
이 녀석에 대해 짧게 설명하자면··· 머리는 위로 꼬아 올려 볼펜으로 아무렇게나 고정시켰고, 딱 봐도 도수 높아 보이는 두꺼운 렌즈가 박힌 동그란 안경을 꼈다. 그리고 옷은 볼품없이 꼬질꼬질한 츄리닝 차림. 그런 주제에 색기를 뽐내려는 건지 검은색 슬리퍼가 돋보이는 발을 쭉 뻗어 다리를 반대로 바꿔 꼬았다.
의사 가운만 안 걸쳤으면 그냥 지나가는 노처녀였을 텐데··· 아, 지나가는 노처녀도 맞지 참.
“잠깐만요! 여자가 바뀌다뇨? 영이 씨에게 제가 모르는 여성들이 있는 건가요?“
“아니 그건···.“
“맞아, 그 여자들··· 아직도 생각나네. 타이트한 정장을 입은 차가운 눈초리에 섹시한 오피스레이디, 상냥함과 시크함을 도로 갖춘 거유속성의 단발머리 여자아이. 오늘은 보자··· 올~ 납작한 가슴이랑 곱슬머리가 디 메리트인 것만 빼면 완벽한 미소녀잖아!“
“으윽! 가, 가슴··· 납작··· 머리··· 디 메리트···. 별이 씨가 빈약하다고 했을 땐 분명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다른 분한테 들이니 좀 아프네요···. 아, 아닌가···? 많이 아플지도···. ···거유속성의 단발머리 여자아이는 나가 죽었으면···.“
어이 이 녀석아··· 팩트 폭행 좀 당한 거로 기죽지 말라고. 그리고 마지막엔 시무룩해진 걸 틈타 뭐라고 중얼거린 거냐?!
“저 여자 말은 다 상술이니 그냥 무시해. 사람 콤플렉스 끄집어내서 우울하게 만든 다음, 상담해준다는 핑계로 돈 뜯어내는 게 저 여자 전문이니까.“
“콤플렉스 아니에요!!“
아니, 미안하지만 분명 맞을 거다.
“흠··· 저 아이는 이미 꼬맹이를 알고 있나 보네···. 하긴 뭐, 그 가슴만 큰 꼬맹이가 꼬마 주위에 있는 여자를 모를 리가 없을 테니~“
알다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내 눈앞에서 티격태격 싸우기까지 한 사이인데. 그리고 어제부턴 같이 살고 있고···.
“아 그래! 넌 꼬마의 몇 번 째 여자야~?“
녀석이 다리를 다시 바꿔 꼬며 김설을 가리켰다.
“네?! 저 말인가요?“
“그래 너 말이야~ 여기 꼬마랑 너 말고 내가 질문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음··· 잘 모르겠네요···. 제 남편은 비밀이 많아서···.“
“누가 네 남편이냐?!“
김설이 어이없을 정도로 혼자만의 망상을 표하기에, 붙잡은 후드 속으로 녀석의 머리를 거칠게 집어넣어버렸다.
“꼬마··· 건방지게 나보다 먼저 결혼한 거야? 나 시집 못 갔다고 지금 무시하는 거야?“
“당신도 입 다물어, 이 노처녀야!“
이 녀석들 왜 이렇게 쓸데없는 말이 많은 거야? 난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그런데 꼬마.“
열기가 잠시 사그라졌을 무렵, 흰 의사가운을 걸친 츄리닝 차림의 여자가 나를 불렀다.
“꼬마 아니야. 적어도 내가 당신보다 20cm는 더 커.“
지금은 앉아있어 모르겠지만··· 옛날에 저 여자는 대략 162~163 정도 되어 보였으니.
“이제 와서 굳이 딴죽 걸 필욘 없잖아?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꼬마라고 불렀으니까~“
“땅꼬마한테 애 취급받을 이유 따윈 없어.“
“물론, 꼬마는 어린 주제에 여자랑 많이 놀아났겠지만···.“
여자랑 많이 놀아났다니··· 그런 유언비어 좀 퍼트리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옆에 있는 놈의 시선이 따가우니까···.
“꼬마, 넌 내면이 너무 미성숙해. 그러니 내가 널 꼬마라고 부르는 거야. 망할 거유 꼬맹이도 너 못지않으니까, 둘 다 나에겐 고객이자, 꼬마 꼬맹이인 거지~“
“으엑···. 의사 주제에 사람을 고객으로 보고 돈으로 보는 거냐?“
“그래 맞아~ 원래 있던 병원에서 나와 내 가겔 차렸으니, 방침이 어떻든 내 맘이겠지? 꼬마 너도 이참에 그냥 고. 객. 님. 이라고 불러줄까?“
녀석의 그 음흉한 미소를 보니 의사가 아니라 룸살롱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러면 안 되지만.
“···됐어. 그런데 40줄 되기 전에 시집가려면 돈 필요하지 않아? 큰 병원에서 꽤 잘 다니고 있었잖아? 난 당신이 원래 다니던 곳 관두고 다른 병원으로 이적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걸 개업할 줄이야. 독신이라 뭐든지 다 독고 다이라는 건가?“
“크으윽···! 내 약점을 잡고 늘어질 정도로 많이 성장했잖아, 꼬마 주제에···. 선배가 여자 앞에선 나이 얘기 꺼내는 거 아니라고 가르치지 않디?“
“아 미안하네요~ 당신 선배는 나한테 무관심해서 그런 걸 교육받지 못했거든, 30대 노처녀 씨.“
“와아··· 영이 씨, 너무하네요. 미인이시다 이렇게 젊으시고 멋진 여성분에게···.“
“윽! 중학교 3학년짜리가 건방지게 젊다는 소리를···.“
“네?! 전 진심으로 말한 건데···.“
옳지 잘했어. 김설, 너도 꽤 쓸모 있잖아? 저 건방진 여자한테 한 방 먹였다고.
“영이 씨, 왜 그런 표정으로 강아지 다루듯이 제 머릴 쓰다듬는 건가요?!“
나는 김설의 불만을 가볍게 무시했다.
“별이가 네 걱정 했다고. 병원에서 짤린 주제에 정신 못 차리고 개업까지 한다면서···.“
“건방진 꼬맹이의 상냥한 배려는 사절하겠어~ 그리고 난 병원에서 짤린 게 아니야. 사람들 웅성웅성되는 게 듣기 싫어서 관둔 거야.“
“당신도 자의식 이란 게 있었어?“
그런 게 있으면 좀 더 꾸며서 시집이나 갈 것이지.
“꼬마처럼 우주 급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야~“
“흥! 그나저나··· 진짜 왜 짤린 거야? 무슨 일이길래···.“
“하아··· 꼬마, 난 그냥 관둔 거라니까.“
“···도망치고 짤리고가 무슨 소용이야. 빨리 이유나 말해.“
“별, 별일 아니야··· 그, 그러니까···.“
“닥치고 말하는 게 좋을 걸? 당신 선배한테 당신 비밀 다 꼰질러버린다~?“
“아, 알았어, 알았어···. 으으읏··· 대, 대신··· 선배한텐··· 말하지 말아줘···.“
이 녀석··· 약점이 너무 드러나잖아···. 항상 연상으로서 우위에 서려고 하는 주제에···.
하아···. 그래, 이 녀석도 나랑 다르지 않으니까···.
“걱정도···. 어차피 당신 선배랑은 「영원히」 볼 일 없어.“
“삐뚤어진 녀석···.“
남 이사 신경 끄셔.
“하아··· 그게 말이야··· 병원에서 몰래 사내 연애를 하고 있었어.“
“뭐야?! 병원장 내연녀였다는 게 들켜서 쫓겨나기라도 했어?“
“아, 아무리 내가 남자가 없어도 그렇지! 머리털 다 벗겨진 꼰대랑 사귀겠냐?! 이번엔 똑바로 미혼남이랑 사겼다고!“
흐음, 그 병원 원장은 대머리였구나. 거기다 저번엔 유부남이라 사긴 모양이고···.
알고 싶지 않은 지식이기에 곧바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럼 뭐가 문젠데?“
“사, 사귀던 남자가 어린년이랑 바람 폈어···.“
“음~ 그럼 당신은 자기 남자를 어린 여자에게 뺏긴 게 쪽팔려서 도망친 거야?“
“아니! ···꼬마 넌 내가 그딴 걸로 쪽팔려 할 거 같냐?“
“우와앙··· 바람피우신 분, 엄청 나쁜 사람이네요···.“
이, 이봐, 왜 날 쳐다보는 거냐?
“그래···. 그 자식! 생각할수록 열 받는 녀석이야···. 그래서 복수했지. 옛날 실력 좀 발휘해서 말이야.“
“어··· 당, 당신 설마···?“
“네? 뭔가요? 저도 알고 싶어요! 궁금해요!“
“그게 말이야~ 사귀던 남자랑 바람핀 여자··· 내가 뺏었거든~“
“네···?“
옆에서도 김설의 눈이 동그래진 게 선명하게 보였다.
아마 충격이 크겠지···. 나도 처음 이 녀석이 커밍아웃했을 땐 좀 놀랐으니까.
이나연, 그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여자의 이름이다.
그녀는 유명한 정신과 교수이자, 옛날 내 담당 의사였다.
그리고 이 녀석은―.
양성애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