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감은 새로운 것으로 씻어버리면 된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행복한 꿈을 꾼 건.
아마 다시는 이런 꿈··· 못 꾸겠지.
만약 내가 그 꿈을 다시 만난다 해도···. 만나서, 내게 한 번 더 행복을 가져다준다 하더라도··· 그건 역시 거짓이겠지.
짊어진 것들이 있기에, 내게 있어 행복은 거짓이다. 행복이란 꿈은 단지 처절한 희망고문에 불과하다.
두꺼운 이불이 내 몸을 따뜻하게 짓눌러줄 때, 무언가 다른 따뜻함이 내 몸에 엄습해왔다.
“···아직 집에 안 갔냐?“
누군진 안 봐도 뻔했기에 딱히 놀랍지도 않다.
“그건 내 마음 아닌가~?“
너··· 뭘 그렇게 제멋대로 웃냐. 심장 아프게.
“당신 마음을 존중해주면 너무 위험해져. 나라던가, 여자들이라던가, 다른 가정의 평화라던가···.“
애석하게도 넌 쌍년이니까.
“나~ 그렇게 막나가는 애 아닌데~?“
이나연이 「나는 모르오~」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당신 애 아니고 30살 접어든 노땅이잖아.“
자기를 애라고 말하다니 너무하시잖아요.
“그런 노땅이랑 한 이불 덮고 흥분한 주제에~“
“흥분 안 했···.“
젠장, 남자의 아침이 저주스럽다.
“그럼 야한 꿈이라도 꾼 거야~? 젊어서 그런지 되게 건. 강. 한. 걸~♥“
“···망할 치녀.“
“괜찮아, 괜찮아. 이런 미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 안서면 그건 둘 중 하나니까~ 발기부전 or 동성애자~“
뭐··· 둘 다 해당사항이 아니라 일단은 다행입니다.
“이 손 놓는 게 좋을 거야.“
녀석이 익숙한 손놀림을 취하려하기에 나는 재빨리 그 손목을 붙잡았다.
“왜~ 나한테 뿌려버리게~? 그것도 나쁘지···.“
“그랬다간 별이가 우리 둘을 죽여 버릴걸?“
“······.“
뭔가를 깨달았는지 굳은 표정을 취하며 손을 놓는 이나연. 나 또한 잡고 있던 녀석의 손목을 놓았다.
별이에 의문의 승이군.
“다른 녀석들은?“
지금 방 안엔 이나연과 나뿐이다.
“아~ 설~!은 「아침 식사 준비 할게요」 라면서 거실로 갔고~ 꼬맹이는 「영이 건 내가 할 거야!」 라면서 설~!을 따라 갔어.“
정리하자면 김설이 요리하는 걸 별이가 방해하러 갔다는 소리네···.
잠이나 다시 자야겠다.
“어이 꼬마~ 일어났는데 왜 또 이불 뒤집어쓰는 거야~?“
이불 안으로 얼굴 들이밀지··· 마···.
“···어제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다시 자야겠어.“
“그건 흘린 것도 아니잖아~ 진짜는 사악해서 파악하는 거야~“
녀석이 과장된 몸동작을 이용해 생생한 이미지를 내게 불어넣었다.
물론 이불속에서.
“그, 그나저나··· 넌 왕진 같은 게 익숙한가봐? 정신과로 옮긴 후론 이런 거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아~ 이건 꼬마 네 전용이야~ 넌 병원 같은데 안 가잖아~ 그래서 이것저것 준비해둔거야··· 언제든 달려갈 수 있게.“
이나연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또 나 때문이냐···.
“그래···. 어제는 고생했다. 이제 집에 가버려.“
그럼에도 나는 양손으로 벌레를 쫓아내는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이제 나 울면 되는 거지~? 그렇지? 어제보다 확실하게 울각 나온 거 같은데~?“
응, 가볍게 무시.
“나 실밥은 언제 풀어? 아, 지금 이 상태로 그냥 걸어도 되는 거야?“
“왠지 무시당한 거 같은데~?“
이나연이 자신의 큰 눈을 거의 울기 딱 직전수준으로 촉촉하게 만들었다.
“기분 탓이야. 울지 말고 내 상처가 언제 아무는 지나 말해.“
“기분 탓이 아닌 거 같지만··· 생각보다 상처가 예쁘게 잘 찢어졌어. 그러니 음··· 한 2주? 아니다~ 한 10일 정도면 풀어도 될 거야~ 걷는 것도 목발 없이 그냥 조심히 걸어. 걸을 때마다 찌릿찌릿 몸이 흥분되는 건 인센티브~“
지랄하고 있네!
“흥분 필요 없으니까 목발 내놔!“
“환자님~ 요즘 목발 더럽게 비싸답니다~ 꼬마는 키가 180이 넘으니까 넉넉하게 5만원은 필요하겠어~“
“왜··· 그렇게 비싸? 너 지금 2~3만 원짜리를 5만원에 뻥튀기 시킨 거 아니지? 그렇지?“
“칫···.“
이 녀석··· 방금 표정 바꾸면서 혀 찬 거냐?
“너, 너···.“
“꼬마는 키가 커서 꼬마의 세 번째 다리처럼 기다란 걸 써야해~ 그래서 가격이 비싼 거야~ 거기다 병원도 안 갔으니 보험처리도 안 되고~ 아, 원래 목발은 실비 같은 거 안 되지 참~“
“어디서 거짓말이야! 대놓고 그렇게 영업적인 얼굴이 되는 주제에?! 내가 5만원을 너한테 뜯길 거 같냐? 나 돈 없어, 돈 없다고! 정 뜯어갈 거면 다음 달에 받아가!“
“오~ 굉장히 제멋대로인 꼬마네~ 진료비랑 치료비도 안 주면서 목발까지 공짜로 받아먹겠다니~“
없는 걸 어쩌라고!
“그러니까! 다음 달에 준다고! 진짜 강아지 옷 산다고 돈 다 써버렸다니까···.“
“그 강아지라는 게 키 168cm에 몸무게 46kg, 쓰리사이즈···.“
“알았어, 알았다고! 밥 먹고 가버려 젠장!“
“놉! 밥만 먹고 가기엔 밤은 너무 길어~“
뭔 개소리야?! 지금 아침이라고? 쨍쨍하다고? 거기다 이 녀석은 어째서 나도 모르는 김설의 몸무게랑 쓰리사이즈를 아는 건데?!
“그래서··· 어쩌라고 나보고···.“
“꼬마 네가 다 나을 때까지··· 날 여기 있게 해줘.“
“······.“
“뭐야 그 표정? 왠지 남자한테 강간당하기 직전의 여자가 짓는 겁먹은 표정 같은데? 하아~ 이제 진짜 울어야겠다~“
운다면서 웃기만 하는 주제에···.
“···계속 여기 있어봤자··· 이나연 당신이 찾는 건 더 이상 없어···.“
「그 여자」의 온기는 이미 이곳에서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다른 온기 또한···.
“꼬마, 너 오해 하고 있어. 난 널 위해 여기 있겠다는 거야~! 진심으로.“
“그, 그런 거라면···. 그래···. 네 진심 따윈 상관없으니까··· 내 치료를 위해서야.“
나는 못이기는 척··· 이나연을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 츤데레는 매력적인 걸~“
“그 발정 직전의 눈빛은 삼가 해줬으면 좋겠는걸~“
녀석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색향이 깃들어있다. 저건 내가 위험하다는 신호겠지···? 이제 도망칠까?
“그건 불가항력이야~“
“헛소리!“
하아··· 머리가 아파온다.
“···돈 얼마나 주면 돼? 다음 달에 꼭 줄 테니···.“
“아~ 그거라면 이미 넉넉하게 선배한테 받았는데~? 필요 없다고 말해도 끝까지 주시는 거 있지~ 선밴 다 좋은데 돈보단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단말이지~“
“아··· 그 자본주의의 괴물이 이미 계산을 끝낸 모양이군···.“
잠깐만?!
“야 이 의사란 년이 사기를 치려고 했냐?! 다 받았다면서 목발 값 5만원이랑 진료비 치료비는 뭔데!!“
“앗! 데헷~☆ 깜박했다~!“
네놈은 나이 잊은 거냐?! 그러니까! 그렇게 깜찍하게 웃지 말라고···!!
“그럼 계산 끝났네···. 이제 꺼져.“
“에이~ 그러지 말고 좀 있게 해주라~ 아! 대신 내가 좋은 걸 가르쳐줄게! 이거면 아마 2주분 숙박비로 충분할걸~?“
“뭔데?“
“그건 바로~! 두구두구두구두구··· 설~!의 쓰리사이즈입니다!“
“잠, 잠깐만! 그거 진짜 아는 거였어?!“
아까 그게 농담이 아니었단 말이야?! 어떻게 나도 모르는 걸 아는 거야, 이 녀석은!
“엥~?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 의사란 직업이 눈썰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빠르고 정확해야 돈을 번다고~!“
나는 녀석의 돈을 세는듯한 제스처가 환멸스럽기 그지없었다.
자본주의의 괴물은 여기도 계셨군···.
“꼬마의 눈썰미는 고작 신장정도 때려 맞추는 게 고작이잖아, 안 그래~?“
“뭐···.“
정답이다. 나는 내 눈높이를 기준으로 상대방의 키를 대략적으로 계산한다.
“나 정도 되는 여자킬러면 눈대중으로 체형정도는 금방 파악할 수 있다고~! 거기다 어제 밤에 만져보기까지 했으니 더욱 정확하겠지~?“
“왠지 너의 그 변태적인 감각을 나한테 자랑하는 것처럼 들린다?“
일단 칭찬할 일이니 머리를 쓰다듬어줄까?
“에이~ 자랑이라니, 당치도 않아~ 나 같은 건 직업이랑 약간의 경험 덕분인걸. 세상엔 진짜 감각이 천부적으로 뛰어난 녀석들이 있다니까~ 내가 옛날에 어떤 남자랑 자려고 호텔에 들어갔는데, 그 남자가 날 만져보지도 않고··· 아니, 아예 벗지도 않았는데 내 가슴둘레를 소수점까지 정확히 맞추는 거 있지? 그래서 앗! 「진짜 변태한테 잘못 걸렸다~」라고 생각해서 부랴부랴 도망쳤지 뭐야~ 아마 그때 그 남자랑 잤으면 나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육변기로 개조되었을 걸~?“
이름도··· 모르는···.
“이 험한 세상엔 그런 개변태들이 많아요~ 좀 놀아봤다는 녀석들은 웬만한 성형외과 의사나 속옷매장 직원들보다 더 날카로우니까! 꼬마도 그런 아저씨들 안 따라가게 조심해야한다~?“
“그, 그딴 거!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라니···! 너 그러다 진짜 잘못될 수도 있다고!“
“올~ 내 걱정해주는 거야~? 와아~ 감동. 하지만 걱정하지 마. 그런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땐, 그만한 일이 있어서 그래~“
“무슨 일! 어째서, 어째서 너는···!“
“히히~ 꼬마, 알고 싶어? 가르쳐줄까낭~ 어쩔까낭~?“
“하아··· 됐어. 생각해보니 뻔하잖아···. 당신이 좋아하는 선배 과거를···.“
“으아아아앗!! 듣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다고~!“
“귀 막아봤자 소용없어, 이 색정여야!“
“너는 날 너무 잘 안다고~! 꼬마 주제에 재수 없단 말이야!“
“당신이 너무 알기 쉬운 거야! 그러니까 결혼도 못했지.“
“크윽! 결혼 못한 건 아니다 뭐··· 자발적독신주의자라고 난···.“
침울해할 때 미안하지만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자발적이 아니라 자의적이겠지.“
정신 차리라고 이 여자야. 청춘을 즐기기엔 당신은 너무 물렁물렁해.
“···선배가 고등학교 때 임신해서··· 학교 그만두고 검정고시 쳤다는 걸 알고···. 거기까지였다면···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 남자, 제대하고 나서 선배한테 결혼하자고 말했어···. 울지 않게 해준다고··· 행복하게 해준다고··· 그래서 선배도 그 남자한테 안겼고···. 그땐 진짜 세상이 무너질 정도로 충격이었는데···. 그런 주제에··· 행복하게 해준다고 했으면서··· 감히···!“
···그 고등학교 때 생긴 아이가 바로 저 일겁니다···만.
“그만하지? 더 자세히 파고 들면 당신이 아니라 내가 울 수도 있다고?“
“아···. 미안, 미안해···. 「당신」이 나 같은 거 보다 훨씬 더 슬플 텐데···.“
하아, 정말···. 그런 표정 좀 짓지 말라니까···.
“진짜로 미안하면 날 「당신」이라고 느끼하게 부르지 말아줄래? 목소리도 원래의 바보 같은 톤으로 돌리고.“
이제야 내가 이나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손이 많은 가는 여자···.
“바보 아닌데···. 수석으로 조기 졸업했는데···.“
“그럼 조울증 치료나 받으러 가.“
내친김에, 나는 녀석의 몸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내가 정신과 의사인데···.“
“하아··· 이 선배 페티시···. 그 여자가 뭐라고 감정 기복이 그렇게 오르락내리락인 거야? 어제 내가 다쳤는데도 무덤덤하게 말했다며? 그래서 너도 그 여자한테 충분히 환멸 한 거 아니었어? 아직도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아?“
녀석의 풀어헤친 갈색머리를 부드럽게 빗질하며, 내가 물었다.
“always.“
칼답이네···.
“뭐야? 네가 어느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혼혈왕자라도 되는 거야?“
···이 바보 여자가 감히 그걸 인용하다니···.
“···원래라면 이렇게 말했을 텐데···. 이젠, 이젠 아냐···.“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몸을 껴안고 있는 내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찾아온 음성은 내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꼬마.“
“왜?“
“사···랑해···.“
“뭐?“
“사랑···한다고···.“
“어? 뭐라고? 잘 안 들려.“
“일부로 그러는 거 알아. 너 난청연기 엄청 못하네···. 농담이니까 그딴 바보 같은 짓 안 해도 돼.“
···바보 같은 짓해서 미안하군요···.
이나연이 단번에 눈치 챈 모양이지만, 나는 얼버무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뭔 바보 같은 짓? 너 아까부터 혼자서 뭐라고 구시렁구시렁 대는 거냐?“
“하아···“
그거 또한 이나연은 눈치 챘을까.
“왜 하찮은 애송이를 보는듯한 한숨을 짓는 거야? 혼자서 구시렁대고 혼자서 결론 낸 거야 뭐야···.“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내가 사랑한다고 농담 삼아 말했더니 자꾸 꼬마가 못들은 척 하길래~“
···농담.
“음···. 그렇구나···. 그런 끔찍한 농담을 하다니~ 별이가 들었으면 아마 널 찢어 죽였을 걸?“
“···그렇겠네.“
나는 쓴웃음을 감추며 이나연과의 포옹을 풀었다.
아쉬웠지만··· 역시 아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