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 이환이 말을 이끌고 움직이자 무천과 그 일행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무천이 전음을 보내왔다.
[태자마마, 그 아가씨는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이미 출발했음이야. 그리고 이 여인은 내가 태자인지 모른다 . 그러니 걱정말라]
[아가씨로 인해서 저희의 움직임이 들킬 수 있습니다. ]
[알고 있다. 일단 이 여인과 대화를 나눠보고 추후 계획을 판단하자]
[존명!]
태자는 본인의 신분상 여인을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태자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니 평소 여인들에게 하듯이 냉기를 둘러싼 태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었다. 이 여인에게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의원을 진압하고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평소 자신에게 다가오던 약하디 약하고 꽃과 같은 아가씨들과 다른 모습이 조금 그의 맘에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똑바로 보는 그 눈빛은 날것 그대로의 생생함이 느껴졌다.
미색이 뛰어난 여인들을 하도 많이 보았지만 지난번 도성에서 스치듯 만났을 때에도 쉽게 잊혀질 수 없는 무엇 인가가 그를 이끌고 있었다.
태자는 빈민촌을 지나자 말을 달려 도성의 뒷산, 자주 내려다 보던 둔턱이 있는 언덕으로 말을 몰고 갔다. 여인은 설렁잡았던 자신을 말이 달리자 꼭 안는 것이 왠지 웃음이 비집고 나오는 이환이다. 강단지게 자신에게 모습을 당당히 보이라며 똑바로 바라보던 여인이 이런 점에는 여지없는 소녀 같아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어느 여인이 이리 자신과 가까이 한적이 있을까 . 이 여인은 잘 모르겠지만 이환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달빛이 거의 없는 밤 산길이지만 태자와 무천일행이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들의 기감은 범인의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서랑은 뒤에 앉아서 속도를 높여 산길을 달리는 이들에게서 다시 한번 실력자들 임을 느꼈다. 잘 못 하다가 이 커다랗고 빠르게 달리는 말위에서 바로 죽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뉘우치고 있었다. 일단 자신의 앞에 탄자는 눈빛이 날카로움이 서려있지만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눈빛이 아니 였는데 혹시모르니 일단 맘의 준비를 하는 서랑이다.
잠시 후 목표지인 너른 바위가 있는 둔턱에 도착을 하자. 이환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랑은 긴장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내릴 수 있습니다.” 서랑은 그의 반대편으로 말에서 내려왔다.
환은 여인의 날렵한 움직임에 조금 놀랐다. 꼬챙이를 들고 있을 때도 평범한 여인이 아닌 태도를 보이긴 했는데 . 자신의 덩치 큰 애마에서 여상히 내려오는 그녀가 매우 특이했다.
서랑은 그와 5보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오면서 오는 길을 잘 기억해 두고 지형물을 파악해야 했다. 혹시 이들이 자신이 생각한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면 퇴로를 모색해야 한다.
“ 무애를 하는가?”
“ 조금은 할 줄 압니다.” 그의 질문에 서랑은 시선을 그에게 두었다.
“ 이곳은 한적하니 그대의 신분부터 이야기를 들어보지.”
“ 관직에 계시다고 하니 믿고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강하지역에 사는 서랑이라고 합니다. 1년간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 유람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도성에 온 것은 태자전하 생신 도성 축제를 보러 왔사온데 그 아이들을 우연히 만나 아이들의 수상한 심부름 이야기를 듣고 이리 참견하게 되었지요. 간단히 설명해 드렸으니 저 아이들이 무슨 일에 끼어 들게 되었는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저는 모두 내보여 드렸사온데 호완님도 얼굴을 보여주셔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전 신분패를 보아도 누구신지 모릅니다. 시골의 여인이 신분패를 자주 볼 일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 좋소. 내 그대를 믿고 얼굴은 보여주지.” 환이 손을 들어 그의 복면뒤의 매듭을 풀어내면서도 시선은 올곧게 그녀를 응시하며 서서히 복면을 끌어 내렸다.
그의 짙은 눈빛이 서랑에게 잔잔한 파문을 주었다. 어디선가 느껴본 가슴떨림이..
서랑은 무심코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흰 피부에 눈에는 속 쌍커플이 있는 짙은 다갈색 눈매..날렵한 턱선과 오똑한 콧날 그리고 적당히 보기좋은 얇은 입술 , 이 사람은 서랑이 전생에 만나 사랑에 빠졌던 헌월장군님!
그 입술이 열리고 흘러나오는 매력적인 저음의 음성
“ 어떠하오. 맘에 드시오?”
“헉!” 서랑은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소리를 손으로 가렸다.
그녀는 그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부러 떨어진 거리를 좁혀 다가갔다.
“ 헌월 장군님? 이십니까?”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헌월이라니 . 관직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더더군다나 장군이라면 무릇 내가 알터 인데.. . 그런 이름은 없소. 금시초문이군. 나와 같은 이목구비가 흔하지는 않을 터인데. 그와 내가 닮았소?”
서랑은 당황했다. 분명 시대가 다르고 나라가 다른 곳. 자신이 환생했으니 헌월 장군 또한 분명 아니거늘 서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그를 기억하고 있으니. 혹여 날 기억하실까?
“ 혹시 저에 대해서 생각 나시는 건 없으십니까?"
"난 오늘 그대를 처음보오.“ 환은 조금 기분이 오묘했다 왠지 그녀가 바라보는 자신에게 누군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보는 것이 왠지 모를 짜증이 났다. 자신은 그리 흔한 얼굴이 아님을 알고 있는데 자신을 닮은 자가 있었나?
“ 그대가 생각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 난 분명 헌월 이라는 자가 아니오.”
서랑의 눈은 일렁이며 흔들렸다. 그녀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분과 닮은 부분이 있어. 밤이 어두우니 잘 못 보았습니다. ” 서랑은 시선을 내려 그의 발끝만 바라보았다.
그는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 바로 말을 이었다.
“ 그 아이들은 방금 만났던 의원의 약제 운반책으로 쓰인 듯 하오. 오랫동안 의원의 유통책과 그 약에 대해서 조사를 하던 터에 몸통을 잡기위해 그 의원을 감시하고 있었소. 그가 운반하는 약의 목적지를 하나하나 확인하기 위해 잠복중이 였는데 공교롭게 그대가 복병으로 나타났지. 그대로 인해서 그들이 꼬리를 자를 수도 있을 것이요. 그대가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내가 처리할 요량 이였소만. 이리 일이 꼬였군.”
“ 아이들이 위험한 일에 끌여 들이는 것 같아서 가만히 지켜볼 수 없어서 그리 하였습니다. ”
“ 알겠소. ”
“ 제가 의원을 그리 만들어서 어찌 처리하실 것 이온지요?”
“ 아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아이들이 의원이 말한 것을 해주어야 할 것이오. 그래야 그들이 계획대로 움직일 것인데. 아이들은 내가 잘 지켜 주겠소.”
서랑은 담하와 담덕을 생각하면 걱정스러웠다.
“ 전 그 의원이 아이들에게 요구한 것을 모두 들었습니다. 아이들 대신 제가 나서겠으니 아이들은 그냥 두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 그대를 어찌 믿고 일을 벌리 겠소?”
“ 그럼 그 어린 아이들은 어찌 믿고 그 험난한 일을 시키시렵니까?”
“ 그대는 아이들과 큰 인연이 아니라면 이만 물러나시오 .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일이 복잡하니 여인으로써는 힘들 것이요. 아이들은 이번 일이 처리되면 내가 잘 보호하리다.”
“ 아닙니다. 전 호완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쓸모가 많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그런 일에 절대 쓰이도록 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단둘이 사는 아이들인데 하나라도 다치거나 큰일이 생긴다면 그 삶이 너무 박복하지 않습니까?”
“ 그대의 부모님또한 그대를 그리 생각하지 않겠소?”
서랑은 결심했다. 이리 말하는 사람 예전 생에서도 그는 올바르고 정의로웠다. 분명 그의 환생이라면 그를 도와야 한다. 서랑은 호완을 돕는 것이 자신의 업보를 풀 수 있는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 저에게는 형제가 많으니 저 하나 크게 된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으십니다. 저로 인해 일이 꼬일 수 있다 하셨으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가 눈을 날캄하게 뜨고 그녀를 응시했다.
“ 그렇게 말해도 일단 나의 대답은 바로 들을 수 없소. ”
“ 네 . 지금 대답을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저의 신분을 조사하셔야 겠지요. 호완님 이라면 이틀내로 저에 대한 조사를 하실 수 있으실 터이니. 그때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이환은 그녀를 응시하며 팔짱을 끼었다.
“ 좋소. 내일 그 아이들의 거처에서 술시에 봅시다. 그때 대답해 주리다.”
서랑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다시 만나다니 상제님께 감사드려야한다. 자신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모든 그녀가 기억하니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그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환은 자신을 보며 따뜻하고 맑은 시선을 주는 서랑을 잠시동안 응시했다.
그 눈빛에 자신의 마음의 빗장이 열릴까 두려웠다. 눈빛 하나에 시선을 뺏기다니 서둘러 손짓으로 무천을 불렀다.
“ 자내가 낭자를 모셔다 드려라”
“ 네. 주군.”
무천은 서랑을 뒤에 태우고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환은 그녀가 떠난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 그대가 바라 보는 것이 누구인지. 궁금하군. 무엇을 믿고 그리 위험천만하게 삶을 살려는 것인지.”그는 혼잣말을 허더니 바로 곁에 있던 다른 무사에게 말했다.
“ 너는 곧 강하지역에 연통을 넣어 서랑이라는 사람에 대해 상세하게 알아오너라 시각은 내일 신시까지다.”
“존명!”
환은 지시를 한 후에 말위에 올라탔다. 모두 연기처럼 빠르게 산에서 내려갔다.
늦은 밤 여각에는 흥취에 취한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작은 등들이 어둠을 밝히기 시작하자 시동아이가 불을 밝히다가 진즉부터 여각 대문만 바라보는 잘생긴 사내에게 다가갔다.
“ 휘 도련님. 따뜻한 차를 다시 내올까요?”
“ 아니다. 신경 쓰지 말거라. ” 휘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네. 그럼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바로 불러주세요”
“ 그래 . 일 보거라. ”
휘는 낮부터 서랑을 보기위해 왔으나 월담이가 전해준 바로는 서점에 간다고 하였으니 늦어도 밤에는 오겠지 . 하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 늦다니 휘는 점점 무슨 일이 벌어 졌을까봐 초초하다 못해 벌떡 일어났다.
그간 보름정도를 그녀를 보지 못했다.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마음도 처음이라 마음이 설레였다. 아비를 따라 일가친척을 어쩔 수 없이 뵙고 인사를 올렸으나 부모님의 이야기에 한번도 거스른 적이 없기에 군말 없이 따라 다녀왔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길었고 서랑이 보고 싶었다.
이리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서점이란 서점을 다 뒤져 봐야겠다. 외모가 꽃같이 고운 여인이니 사내들의 희롱이라도 있다면 휘는 이마를 쓸면서 의자에서 벗어났다. 그때 충길이 달라왔다.
“도련님 오십니다.”
충길의 말에 휘는 뛰다 시피 하며 대문으로 갔다.
서랑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서랑 낭자!”
서랑이 그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도련님! 어인 일로.....”
“그대를 보고자 오늘 낮부터 기다렸는데 서점을 가셨다고... 그런데 왜 이리 늦으셨던 겁니까? 걱정했습니다.” 휘가 서랑의 손을 붇잡아 손으로 꼭 감쌌다.
“아! 도성에서 만난 아이들이 있어서 그 아이들과 놀다보니 이리 되었습니다.”
서랑이 씽긋 웃었다. 그녀의 볼이 분홍빛이다. 그녀의 이런 미소에 걱정은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허. 그리 말씀하시니 할말이 없습니다.”
“너무 늦은 밤까지 기다리시게 해서 송구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의 실력을 보여드렸잖습니까?” 서랑이 살짝 칼을 쥐는 흉내를 낸다.
“그래도 여인이시니 걱정이 되지요. ”
“ 이리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늦었는데 본가로 들어가셔야 하잖습니까?”
“ 저는 사내이니 괜찮습니다. 서랑 고단하시겠습니다. 어여 들어가서 쉬시지요” 휘는 그녀를 잠시 만나자 마자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지만 늦은 시각까지 붙잡아둘 수가 없었다.
“ 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다시 서점을 가봐야 합니다. 참! 나중에 도련님에게 논의 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 언제 시간이 되십니까?”
지금이라도 이야기 하고 싶다고 말이 목까지 올라왔으나 휘는 다정스레 웃었다.
“ 내일 서점에 가신다고 하니 그때 같이 갈까요?”
“ 네.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
“ 점심경에 뵙겠습니다. 어여 들어가 쉬세요 낭자.”
“ 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서랑은 활짝 웃으며 여각으로 들어가자 그녀를 기다렸던 월담이 쪼르르 달려와 그녀에게 이런 저런 잔소리를 퍼부어 댔다.
휘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여각앞에서 한발작도 움직이지 않았다.
“ 충길아 우리도 이만 가자. ” 휘는 웃으며 충길이가 가져온 말위에 훌쩍 올랐다. 내일이 이리 기대되는 것은 어렸을 적 어머님께서 궁에 놀러가자고 했을때 이후로 오랜만이다. 아니 그때보다 더 좋은지도 벌써부터 내일이 빨리 왔으면 하는 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