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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먹방하겠사옵니다
작가 : 유설
작품등록일 : 201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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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무리에 해오라기 하나
작성일 : 17-07-07     조회 : 251     추천 : 0     분량 : 7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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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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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아아악!"

 

 아찔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것도 무섭고 불안하였는데 갑자기 추락하다니. 정신을 가다듬을 새 없이 연이어 겹치는 불행은 그야말로 대재앙이었다.

 

 "언니! 언니이이! 언니이이이이!!!"

 

 경악에 물든 유나의 얼굴이 발판이 떨어진 틈새로 불쑥 튀어나왔다. 떨어지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른 탓에 순식간에 점이 되어버렸지만 짧은 순간 포착된 동생의 얼굴은 비감(悲感)으로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툭하면 서로를 놀리고 욕을 하며 지냈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옳았다. 유나와 나는 소위 츤데레 끼가 다분한 자매였고 서로가 미운만큼 서로를 아끼고 생각했다.

 

 '지지배, 평소에 좀 잘하지.'

 

 유나가 저런 애틋한 표정을 지을 줄도 알다니. 위급한 상황에서 할 행동은 아니지만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다. 어쩌면 고층에서 추락했기 때문에 가능한 사고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죽음을 앞두고 초연해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곱게 죽고 싶다는 건 아니다. 다만 상식적으로 15층 높이에서 떨어지면 목숨 건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느닷없이 벌어진 일에 차분하게 대처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억울했다. 여태 살아오며 쌓아온 모든 것을 이렇게 잃는 것이 분했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저런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고 방황도 했으나 성인이 된 후에는 개과천선했는데! 나, 열심히 살고 있는데! 그동안 노력한 결실을 좀 보겠다는데! 가난에서 벗어나 돈 좀 만지겠다는데! 착실하게 일하고 좀 쉬겠다는데! 아무리 인명재천의 섭리가 절대적이라고 해도 그렇지!

 

 "크헉!"

 

 잡념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운 와중 엄청난 충격과 통증이 전신을 강타했다. 건물의 가장 낮은 층이 지하 3층이니 지금 내 몰골은 상당히 끔찍할 게 분명했다.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찢어지고 머리가 부서져서 출혈이 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참혹한 장면을,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확인하며 이승과 작별을 고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살고 싶어.'

 

 그리고 정말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을 때,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과거와 현재가 순서대로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뒤이어 기가 빨리듯 몸이 무기력해지는 와중 의식의 불이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어느 순간, 사고가 뚝 정지됐다.

 

 '뭐야? 물? 수, 숨이…….'

 

 그런데 이상했다. 난 방금 죽었는데 금세 정신을 차렸다. 게다가 차가운 물 속에 가라앉고 있다.

 

 '저승사자도 없네. 그래, 개죽음 당한 인간은 인도하기 싫다 이거지?'

 

 영혼 차별도 있구나, 싶은 생각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꼬르륵 소리가 나며 물거품이 생겼다.

 

 '이건 또 뭐야?'

 

 몸을 살피니 옷이 달라졌다. 의식을 잃었을 때 누군가 갈아입힌 건가 싶다.

 

 '죽으면 다 옛 시대 옷을 입나?'

 

 아마도 살아 생전 입었던 옷은 가져갈 수 없으니 이거라도 입으라는 것이리라. 알몸보다는 나았지만 디자인과 색이 맘에 들지 않았다. 문득 다리에 착 달라붙는 스키니진과 흰 블라우스, 신상 구두 그리고 할부로 구입한 명품 크로스백이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이내 추락 당시 내게 울부짖던 유나의 얼굴이 그 위에 겹쳐졌다.

 

 '무사해야할텐데.'

 

 홀로 남을 동생과 내 죽음으로 충격을 받으실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보고싶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포기했거늘 막상 의식이 돌아오니 심경에 변화가 찾아왔다. 갓 싹을 틔운 생존 욕구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개화한 것이다.

 

 '춥다.'

 

 실로 오호통재(嗚呼痛哉)라. 현실에 굴복할 수 밖에 없어 운명에 수긍하였더니 죽어서도 편하지 못한 불행의 아이콘 김유주같으니.

 

 '살고 싶어봤자 이미 다 끝났어.'

 

 나는 진전이 없는 상태에 허무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뭐야? 저 남자는 누구야?'

 

 눈꺼풀을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귓가에 풍덩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낯선 남자가 물 속으로 뛰어들어 날 향해 빠른 속도로 헤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승사자인가? 아닌데. 이상한데?'

 

 저승사자로 보기에는 의복이 지나치게 화려했고 잘 생겼다. 혹 환각이라도 본 줄 알았다. 하나 눈을 몇 번 깜박여도 변하는 건 없었다. 남자와 나 사이의 거리만 좁혀질 뿐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사지를 허우적거리고 붕붕 휘저었다.

 

 '구해주겠다는 건가?'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내 입술 위에 검지를 얹었다. 뒤이어 눈웃음을 짓더니 한 팔로 내 허리를 낚아채어 수면을 향해 수영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남자는 천신이 보낸 전령이 분명했다. 날 지옥으로 보내려고 한 이라면 구해주기는커녕 밑바닥으로 끌어당겼을 테니.

 

 "설아!"

 "설아, 괜찮아?"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자 갑자기 속이 메스꺼웠다. 거칠게 숨을 쉬며 헛구역질을 하다가 겨우 땅을 밟았을 때는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뒤이어 몸이 균형을 잃었다. 나는 땅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떨궜다. 그 순간 나와 비슷한 옷을 입은 여자 두 명이 비명을 지르며 다가왔다.

 

 "여기는 어디에요? 나…죽은 거 맞죠? "

 "네가 죽긴 왜 죽어!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몸상태가 급변했다. 마치 오랜 시간 물 속에서 초인적으로 버틴 것에 대한 패널티 같았다. 나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양옆에서 정신 잃지 말라며 다급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여자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시끄러워.'

 

 더이상 속이 울렁거리지 않았다. 하나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그 상황에서 여자 둘이 내게 던지는 말은 마치 칠판을 긁어내리는 날카로운 소음이었다. 거슬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시끄러우니 그만 좀…."

 

 참다 못하여 짜증 섞인 신음을 토했다. 내게서 떨어지라는 의미로 손을 휘휘 내젓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설아!"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기 전 누군가 어깨를 잡아 세웠다. 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뒤이어 가슴이 답답하여 몇 번 기침했다. 다음에는 흠뻑 젖은 머리칼 사이로 새어나온 물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안색이 많이 안 좋구나.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

 

 뺨에 축축한 손이 닿았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흐릿했던 시야가 또렷해지며 남자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 작고 다부진 얼굴과 두꺼운 눈썹, 차분히 틀어올린 머리와 큰 눈 그리고 살짝 아래로 내려간 눈매가 인상적인 미남이었다. 그도 나처럼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섹시한지. 순간 넋을 잃고 빤히 쳐다봤다.

 

 "천사? 혹시 하늘에서 보내주신 전령이세요?"

 

 메마르다 못해 오랜 가뭄으로 쩍 갈라진 연애 세포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 대학교 졸업 후 애인을 만난 적 없어 다시 느낄 수 없으리라 확신했는데. 나는 남자를 보며 풋풋한 설렘을 느꼈다. 전혀 이럼 감정을 느낄 상황이 아님을 알면서도, 붕 떠오르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내가 하늘의 전령이라니. 게다가 천사는 또 뭐고."

 "그럼 누구신데요?"

 "허, 정녕 나를 몰라보겠단 말이냐?"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싼 채 이리저리 돌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묘한 위화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설마…아닐거야.'

 

 불안함이 엄습했다. 가정 하나가 뇌리를 스쳐갔다.

 

 "여기 어디에요? 천국과 지옥의 경계 사이는 아니죠?"

 

 나는 덜컥, 남자의 팔을 잡고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이에 남자는 당혹감이 서린 표정으로 얼굴을 잡던 손을 떼었다. 이윽고 뒷짐을 지고 중얼거렸다. 다 죽어가더니 정말 크게 잘못된 모양이라고 말이다.

 

 "동부 한라국의 매화령, 소오사찬 마휘 장군의 아들 마원."

 "하나도 모, 모르겠는데…."

 

 머쓱해졌다.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니 남자가 탄식했다.

 

 "도련님. 어, 어떡하죠?"

 "설이가 물을 너무 많이 마셨거나 빠지면서 어디에 머리를 부딪힌 게 분명해요."

 

 말을 아끼고 있던 여자들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이를 기회로 주변을 살폈다. 눈치를 보다가 기가 죽은 척 연기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첫째,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추락하여 죽었다.

 

 둘째, 지옥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셋째, 다시 살아난 게 맞다면 김유주여야 하는데 아니다.

 

 넷째, 사람들이 나를 유설이라고 부른다.

 

 다섯째, 갑자기 신분 제도 사회가 살아있는 시대로 온 것 같다.

 

 여섯째, 빌어먹을.

 

 일곱째, 살면서 한라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걸 듣도 보지도 못했다.

 

 여덟째, 목숨을 구해 준 남자는 높은 신분이다.

 

 아홉째, 정황 상 내게 달라붙는 두 여자의 언행으로 보건대 설이인지 뭔지가 신분이 낮은 여자임을 알았다.

 

 "크읍! 우욱!"

 

 열째, 불길하다. 느낌이 안 좋다. 한 마디로 개 같다.

 

 "설아?"

 

 갑자기 토기가 치솟았다. 나는 입을 틀어막으며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였다. 하나 남자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우웨에엑!"

 

 아뿔사! 흑역사 한 번 거하게 쌓는구나, 김유주.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 남자의 가슴팍에 물을 세 번이나 토한 것이다.

 

 "……."

 "……."

 

 나는 남자와 거리를 둔 채 마주 보았다. 벙어리가 된 내 앞, 잘생긴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지는 것을 보고 속이 뜨끔했다. 마치 부모님 앞에서 덜 혼나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절망에 절망을 거듭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다고! 다 끝났어!'

 

 자리를 박차고 도망쳤다. 스스로가 저지른 엄청난 실수에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어서였다. 뛰던 와중 숨이 가빠져서 근처 나무에 기대어 쉬다가 기둥에 이마를 두 번 박았다. 방송 도중 사레가 들려 먹고 있던 음식이 역류하고 콧구멍으로 주르륵 흘렀던 사건 다음으로 제일 쪽팔렸다.

 

 "설아! 그 쪽은 사나운 들짐승이 자주 나오는 방향이다!"

 "네?!"

 

 모 아니면 도다. 죽거나 살거나. 나는 남자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로 줄행랑을 포기하고 다시 남자가 있는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다음에는 바닥에 엎드렸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일단 살고 봐야 원인 파악을 할 수 있을 터이니 거듭 사과했다. 용서를 빌고 굽신거렸다.

 

 "벌은 나중에 사가로 돌아가 달게 받아도 늦지 않다. 일단 일어나거라. 젖은 상태로 오래 있으면 고뿔에 걸리기 쉽지 않으냐. 옥아, 희야. 설이가 이렇게 된 건 너희 책임도 있으니 장에 들렸다 오거라. 내 긴히 시킬 일이 있다. 아! 물에 빠지는 바람에 품에 넣어두었던 엽전이 물기가 아주 묻어난다만…장에 가는 길에 바람에 말리면서 치마폭으로 윤이 나게 닦으면 물건 사는 데 지장은 없을 게다. 안 그러냐? 하하!"

 

 물에 폭삭 젖었음에도 불쾌한 기색 하나 없다. 내가 자신의 가슴팍에 물을 토했음에도 경을 치지 않았다. 게다가 유설이라는 여자가 물에 빠진 원인을 제공했다는 두 여자를 크게 혼내지 않고 개인적인 심부름을 보냈다. 성격이 좋은 것인지 대인배인지. 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엽전 꾸러미를 들고 고개를 조아리고선 부리나케 등을 돌려 사라지는 여자들을 향해 입술을 삐죽였다. 괜스레 미웠다.

 

 "자, 죄인도 멀리 떠났으니 사가로 돌아가자."

 "예, 도련님. 슬슬 추워지는 것이 서둘러야할 듯 싶습니다."

 

 저자세로 존대를 하며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힐끔 곁눈질을 하니 굴레를 단단히 박아놓은 말뚝을 손쉽게 뽑기에 감탄했다.

 

 "워, 워. 착하지. 이쪽으로 가자."

 

 남자는 말을 쓰다듬고 어르며 길이 난 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단숨에 안장 위로 올라탄 후 내게 손짓하였다. 나는 어떤 명령을 내리려고 그러나 싶어 긴장했다. 침을 꼴깍 삼키고 앞으로 가 고개를 숙였다.

 

 "쯧. 잡지 않고 뭐하는 게냐?"

 "타, 타라고요?"

 

 상냥하고 사려깊었던 남자는 온데간데 없다. 의아하여 얼굴을 드니 그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나저나 노비와 말을 타겠다는 귀족이라니. 어이가 없어 멀뚱히 서있으니 남자가 피식 웃었다.

 

 "내가 원하면 못할 것이 있나? 또, 너 말고 누굴 태우겠느냐?"

 

 저 표정을 보라! 지금 누굴 놀리려고 드는가! 나는 호의를 가장한 남자의 시커먼 속셈에 이를 갈았다. 능글거리는 눈빛과 장난을 치고 싶어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보며 비웃음이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았다. 혹, 진심이 얼굴에 드러날까봐 재빨리 고갤 숙였다. 이다음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도련님, 소녀는 한낱 노비입니다. 말을 타본 적도 없거니와 감히 도련님과 말을 타다니요."

 

 가당치 않은, 과한 처사라고 덧붙이니 남자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앓는 소리를 내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하여도 아니된다."

 "예?"

 

 숙였던 얼굴을 확 들어올렸다. 무슨 개 뼈다귀 굴러가는 소리인가 싶어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너를 그 몰골로 사가까지 걸어가게 했다가는 내가 죽는단 말이다. 널 가까운 벗처럼 아끼는 연화가 그 광경을 보면 이 나를 가만히 둘 성 싶으냐? 분명 오라버니는 물에 빠진 아녀자에게 어찌 이다지도 매정하시단 말입니까, 라고 말하며 매서운 손바닥으로 등을 마구 때릴 게 뻔하다."

 

 남자가 양팔로 어깨를 감싸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건장한 사내가 저렇게 떨 정도라니. 아마도 연화라는 여자가 제법 거칠고 힘이 장사인 모양이었다. 나는 대충 판단하며 다시 고갤 숙이고 웅얼거렸다.

 

 "그럼 소녀가 어찌해야…."

 "어허, 그거 참! 방금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느냐."

 "자, 잘못했습니다. 소녀의 이해력이 짧아 감히 다시 듣기를 청하옵니다."

 

 내 말에 남자가 뒷짐을 지고 탄식했다. 뒤이어 고개를 들라고 명령했다. 이에 시키는 대로 하여 눈높이를 맞추니 크게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다듬었다.

 

 "설아, 너는 참 특별한 아이다. 다른 종들은 알 지 못하고 아버지께서도 내게 절대 알려주시지 않는 특별한 사유로 어린 시절 때 부터 연화와 각별한 사이로 지냈지. 아버지께서는 긴 세월 연화를 향한 변함없는 네 충정과 우정에 깊이 감복하신 나머지 노비 출신인 네게 큰 아량을 베풀어 특별히 글을 읽고 쓰는 법을 알려주셨다. 비록 네 상태가 좋지 않아 지금은 그 기억이 흐릿할 지언정 내가 한 말은 참된 것이니 믿어도 좋다. 그러고 보니…."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의 행동과 말과 손짓을 주시하며 긴장했다. 청산유수처럼 입을 놀리는 화술에 넘어가기 싫어서였다. 잘생긴 얼굴만 보다가 혹 판단력이 흐려질까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설아."

 "예, 도련님."

 

 나는 원래 싫은 건 죽어도 못하는 성격이다. 하지만 신분의 차이, 이 때문에 원하는 결과는 성취 못할 것이 뻔했다.

 

 '기어코 나를 안고 말에 탑승하려는 모양이네.'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결말에 짜증이 났다. 답답함에 울상을 지으니 남자가 피식 웃었다. 검지와 엄지를 이용하여 딱 소리를 내어 주의를 끌었다. 실실 웃는 꼴이 내 표정을 즐기는 것 같아 한 대 때리고 싶다. 아까 느꼈던 설렘은 어느새 짜게 식어버렸다.

 

 "나는 자주 사가를 비우니 그렇다 쳐도…연화는 기억하느냐?"

 

 남자가 다소 해맑은 얼굴로 물었다. 나는 남자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것이…."

 

 나는 뜸을 들였다. 현재 기억에 손상을 입은 것으로 인식이 되었으니 걸맞는 연기를 해야한다고 여겼다. 이에 머리칼을 헤집는 시늉을 하며 속으로 웃었다. 사실, 답은 스스로 불었지 아니한가!

 

 '탑승 거부할 때 본인이 말해줘놓고선!'

 

 나는 입술이 샐쭉 올라가려는 걸 참으며 대답했다.

 

 "기억이 온전치 않사오나 만약, 틀리지 않았다면 아씨께서는 도련님의 누이 되시는 줄로 아옵니다."

 "오? 그래, 맞았다. 다른 이는 몰라도 연화는 기억해야지."

 

 답이 맘에 들었는 지 남자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마주 웃으며 몇 번 더 고삐를 잡고 걸어가겠다고 고집을 세웠다. 하나 너무 느려서 결사반대한다는 남자의 말에 백기를 들었다.

 

 '낯선 사람과 살 부대끼는 거 정말 싫은데.'

 

 닭살이 돋았다. 젖은 상태에서 붙어있으니 죽을 맛이었다. 얇은 천 하나 사이에 둔 것과 같은 상태이니 말 다 했다. 말이 뛸 때 마다 남자의 근육이 등에 닿으며 생생히 느껴지니 부끄러웠다. 동시에 얼굴에 열이 올라와 더더욱 불편해졌다.

 

 '내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환장하겠네.'

 

 어쨋거나 나는 노비이고 그는 고귀한 집안의 자제이다. 밀착을 유지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이미 거절 의사를 몇 번 표현했으니 이제는 자제해야 했다. 이 이상은 노기를 살 것이었다. 게다가 엎질러 진 물인 것을. 나는 표정 관리에 신경을 쓰며 앞만 바라봤다.

 

 그렇게, 불편한 승마는 매화령 인근에 도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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