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네가 친히 성물로 만들어주지.”
안경이 회색으로 변했다. 단순히 테가 회색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유리알조차 회색이 되어 시야가 가려졌다. 당황해서 안경을 벗어보니 뿌옇게 보이는 세상에서 이불도 회색이었다. 안경과 이불의 공통점을 생각해낸 나는 핸드폰을 꺼내들었고 액정조차 회색이 되어 화면이 켜졌는지 안 켜졌는지 분간이 안 되는 핸드폰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각각 신력을 부여했다. 안경은 네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게 게임적 패치를 해주었다. 한글패치를 해서 글자는 읽을 수 있지만 사용되는 신력에 따라 고글번역부터 전문가의 번역까지 수준은 천지만별.”
회색이던 안경이 본래의 안경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안경을 쓰자. 루안 왕성이란 글자가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써도 그대로다.
“듣는 것이 해결 안 될테니 핸드폰에 어플을 깔아두었다. 들리는 소리를 문장으로 받아써주지. 또한 배터리와 데이터를 신력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했다.”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말은 와이파이 없이도 인터넷이 된다는 소리인데. 아니, 그전에 기지국도 없는 이곳에서 핸드폰을 쓸 수 있다고? 여기 이계가 아니라 그냥 지구였어?
“그대 같은 이가 쉽게 죽는 것은 크나큰 손실이지. 그대가 가지고 있는 이불에 절대안전을 부여해주지. 신력이 바닥나지 않는 한 노화를 제외한 모든 위험을 방지해준다. 삼대 욕구에도 반영이 되기에 성욕이 제한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건 더 어이가 없는 소리다. 이불 밖은 위험해. 지구에서 유명한 이 말을 실제 물건으로 구현했다는 소리니까. 늙어 죽는게 아니라면 먹고 자고 싸는 위험조차도 방지해준다. 당연하지만 검 같은 것도 막아 줄 테지.
“궁금한게 있는데. 그 신력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죠?”
“그야 성물에서 평범한 물건이 되지. 이계에 것이니 특별하긴 하지만.”
“그 신력 충전기. 아니 신력을 도로 채우는 방법이 있나요?”
“있지. 그대가 나의 사도가 되어 활동하면 된다네.”
사도? 그 예수와 12사도 같은 그런거?
“비슷하지. 하지만 종교를 믿으란 건 아니고 그저 살아가기만 해도 괜찮지. 행운과 불운에 의해 신력은 채워질 것이고 이왕 여동생이 용사가 되었으니 같이 다니면 많이 채우겠지.”
문득 궁금해졌다. 신이란 둘뿐인가? 아니라면 용사는 도대체 무슨 신의 사도가 된 것일까? 행운과 불운의 신으로 추정되는 신적 존재와 같이 나타났다면 용사는.......
“거기까지. 자네 세상 스포일러가 존재하듯이 특정한 진실은 배제하는 것이 좋지.”
머리가 멍해진다. 방금 뭔 생각을 했더라. 기억이 안 난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겠지.
“슬슬 루안 왕이 준비한 신력이 떨어지는 듯하니. 난 가보겠다.”
세상의 색이 흑백에서 컬러풀하게 바뀌었다. 돌아왔다가 맞는 표현이겠지. 멘델을 살펴보니 두 눈을 감고 뭔가를 곱씹고 있었다. 내가 신을 만난 동안 멘델도 신을 만난거겠지.
「용사. 멘델 요한나.」
잘은 모르지만 얼떨결에 좋은 선물을 받았다. 만화에서 많이 봤어. 주인공 보정으로 동료가 강해지는 클리셰. 나 같은 경우 강해졌다기보다는 그냥 쓸모 있어졌다고 해야 하나?
“@@ @@@ @@”
이제는 왕이란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는 중년 남성이 뭐라고 떠들었지만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아까까지 말이 통했던 건 그 신력인지 뭔지 때문인가.
핸드폰을 꺼내보니 새롭게 깔린 어플이 있다. 거기에는 방금 왕이 말한 내용이 한글로 적혀있었다. 아니, 한글이 아닌가. 살짝 안경을 들어 올리니 상형문자 비슷한 무언가가 쓰여있다. 번역 어플이랑 한글패치 안경은 제대로 되나보네.
“그녀는 용사가 되었습니다.”
“오오, @@@@ @@.”
「오오, 자네 내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가.」
“잘은 모르지만 저도 신의 총애를 받아 성물을 만들어줬습니다.”
“@@@.”
「신의 보살핌이군.」
“오빠? 말 알아들어?”
“아, 넌 못 알아듣지.”
내 입장에서는 한글자막 지원과 다를 바가 없다.
“나만 믿어. 오빠가 통역사 해줄게.”
“@@, @@@.”
「용사에게 의사소통을 위한 팔찌를 내리겠노라.」
멘델을 향해 웃어보이던 모습 그대로 굳었다. 무력이 없지만 그래도 쓸모는 있는 동료에서 그냥 짐꾼으로 전락했다. 공기화가 너무 빠른데.
“왕이 뭐래?”
“어, 통역기 준대.”
“아, 다행이다.”
봉긋한 가슴에 손을 얹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멘델은 영락없는 소녀. 난 갑자기 불안해졌다. 용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만화나 소설속 주인공들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우린 소설 속 인물이 아니다.
게다가 개중에는 중요한 등장인물이 죽는, 심지어 남주와 여주 둘 다 죽어버리는 로미오와 줄리엣마저 존재한다. 이 둘은 자살을 한 셈이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점이 뇌리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현대인의 필수 문물을 손에 쥐고 있는 내가 과연 이세계에서 잘 살 수 있을까? 외국도 안 가봤는데.
“나, 힘낼게. 그래서 꼭 오빠 호강시켜 줄게.”
“무리하지마라. 여차하면 나 버리고 혼자서라도 잘 살아.”
반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건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무력한 내가 발목을 잡는 경우도, 미끼의 역할을 자처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이계 떨어진 남매. 믿을 건 서로 둘뿐이지만 그 믿음이 언제까지 될까.
“아니.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말 하면 나한테 혼나.”
멘델이 장난스럽게 손날로 내 머리를 콩하고 때렸다. 평소에도 가끔 하곤 하던 손짓이었지만 이번에는 남달랐다. 날이 둔한 도끼자루로 이마를 내리친 느낌. 눈물이 찔끔 나올정도로 아팠다.
“아파? 미안. 용사가 된 거 깜박했다.”
육체능력이 꽤나 강해진 모양이다. 하긴 괴물들을 잡으려면 현대인보다는 강해야겠지. 그런데 막 만화나 소설 보면 주인공이 싸우느라 주변이 다 파괴되던데. 멘델이 싸워도 내가 곁에서 살아남을 수 있나?
잠시 고민을 해본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바라본다.
“믿을 건 이불밖에 없다.”
이계에서 내 몸을 간수하려면 이불을 한시도 떨어뜨려선 안 된다. 되도록 빨지도 말아야지. 빤다고 성물이 망가질 것 같지는 않지만 이불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왕의 신하는 팔찌와 함께 2 장의 종이를 가지고 왔다.
팔찌는 아까 말한 통역기고 저 종이는 뭐지? 왕이 허락하는 권한 비슷한 건가? 그 암행어사 마패같은 느낌.
「스펠 탈진.」
「스펠 점멸.」
하지만 예상외의 글자가 종이 위에 떠오른다. 탈진은 뭔 뜻인지 알겠는데 점멸은 뭐지? 스펠이 주문이니까 탈진하는 주문. 아니 탈진을 거는 주문인가. 어쩌면 탈진에 영향을 주는 주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아는 한자가 아닐 수도 있지.
한글패치이기에 뭔 한자를 쓰는지 내가 알 길이 없다.
빼앗으며 나아가다라는 뜻일지 뭔지 낸들 어찌 알겠나. 이럴때는 조용히 설명을 듣는 것이 상책이지.
“@@, @@, @@.”
「이것은 스펠. 용사의 임무이다. 모아라.」
“음. 스펠이란 것이 뭐죠?”
왕은 목소리를 깔고 진중하게 말했지만 내가 듣기에는 그냥 솰라솰라. 통역팔찌를 낀 여동생은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대충 분위기로 알아듣는 척을 하다가 슬쩍 핸드폰을 본다.
「마왕강림에 쓰이는 책. 한 장 한 장이 마족을 소환하는 제물의 역할도 가진다. 마왕의 부활을 막기 위해 스펠을 수집해라. 스펠은 단순히 종이의 형상이 아니라 물건이나 생명체에게 깃들 수도 있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빼고 중요한 내용만 추리면 이렇다.
“@! @@@@!”
「용사여.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가거라.」
뭔데 이리 번역 수준이 들쭉날쭉하냐. 원본이 뭔지도 모르니 판단할 근거도 없고. 이해는 힘들었지만 왕에게 질문하기보다 나가는 길에 기사나 신하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어.
“@@, @@ @@@@ @@@@.”
“저는 점멸 스펠을 받고 싶습니다.”
“@@.”
“감사합니다.”
뭔 대화야? 별로라고 생각해도 없으면 불편하네. 말하는 건 알아듣는데. 왜 듣는 건 안 되는지. 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 ?????????」
「해당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핸드폰과 연동하여 신력을 소모하면 알아낼 수 있습니다.」
아니. 그리 궁금하지 않아. 뭐 통역팔찌도 있는데 왕이 비슷한 물건이라도 가지고 있나 보지. 어차피 대화를 해본 것은 왕과 신정도. 통계를 내리기에 그들은 너무 일반적이지 않다.
“감사합니다.”
여동생은 왕의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고 왕은 종이 한 장을 여동생에게 내밀었다. 아까 말한 대로라면 저게 점멸인가. 교장선생님의 상장수여식 같은 분위기가 끝나고 여동생이 내게 달려왔다. 빨라!
“오빠. 이거 받아.”
“뭔데?”
“점멸 스펠이라고. 짧은 거리를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능력인데. 기습이나 도주에 유용하니까. 오빠가 가져.”
“싸우는 네가 가지는게 좋지 않아?”
“내가 못 지켜줄 때도 있을 테니까. 그러니 군말 없이 받아.”
멘델이 스펠을 내 가슴에 촥 하고 밀어붙였다. 내 걱정을 해주는 여동생이 기특해서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대 손으로 스펠을 붙잡았다.
「인첸트 가능.」
“어?”
아! 그래. 이게 원래 물건이나 사람에 깃들수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 현상을 게임식으로 표현해서 인첸트라고 인지할수도 있겠구나.
“인첸트.”
「핸드폰과 연동하여 작업을 시행합니다. 신력이 대량 소모됩니다.」
스펠의 종이가 빛으로 변하더니 내 몸을 휘감았다. 여동생이 놀란 눈치였지만 내 안경에는 인첸트 게이지가 차오르는 바가 보였다.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안경, 핸드폰, 이불이 소유자에게서 지근거리를 초과할 경우 소유자에게 점멸합니다. 신력이 소량 소모됩니다.」
지근거리? 그게 얼마인데? 확인 하고 싶었지만 안경은 특별한 문구를 보여주지 않았다. 핸드폰에도 깔려있는 특별한 건 통역 어플 뿐.
“어떻게 된거야?”
“세 물건을 도둑맞지 않게 되었어.”
“아아.”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도 그렇겠지. 안전을 위해서 준건데.
“미안.”
“아냐. 괜찮아.”
여동생은 고개를 가로 젓고 가슴을 두드렸다.
“나만 믿어. 내가 꼭 오빠를 지켜줄게.”
생각해보면 거북이처럼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으면 안전할 것 같기도. 아, 이불이 들춰지면 어쩔 수 없나? 모든 걸 막아내는 방패라도 방패 자체로 막지 않으면 의미 없을 테니. 그건 아까 이마의 통각으로 확인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다행인가. 이불을 빼앗겼을 때. 재빨리 벗어나면 도로 이불을 가져올 수 있으니까.
아, 이것도 내가 속도가 빨라야 되네. 결국 무 쓸모인가.
“그래. 너만 믿을게.”
말은 했지만 썩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일할 의지가 없는 것과 가족이 위험해지는 게 싫은 마음은 별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