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이라는 낯선 땅에 도착한 한지예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이승과 유사한 환경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살거나 죽거나 인간이 모이는 장소이기는 분명하기에 최소한의 환경이라도 주워지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검은 땅의 환경은 잔혹할 지경으로 황폐하다.
죽지 않는 영혼으로 영생을 살아가야 할 한지예에게 이만큼 난처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승에서의 불안정한 삶으로 자살을 선택했건만 막상 저승의 삶이 더욱 막막하고 심지어는 자살마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하고야 말았다.
그런 한지예가 의지할 대상은 저승의 안내자, 버질뿐이다.
버질은 발굽으로 바닥을 쿵쿵 두드렸다. 밀폐된 방안의 울림처럼 검은 땅 일대가 웅장한 북소리로 가득 찼다.
“이제 네가 갈 곳을 알려줄게. 이 안내가 마지막 안내일 거야.”
북소리와 동시에 버질은 말했다.
버질의 행동은 마치 문을 두드리는 외지인의 모습이다.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일련의 과정은 궁금증을 더해갔다.
곧이어, 버질의 부름에 응하듯 잔잔한 땅의 울림이 느껴졌다. 곡절과 파괴음이 아닌, 바다의 파도소리와도 같은 울림이.
시야가 흐릿하게 번지기 시작한다.
마치 안개가 가득 낀 것처럼 영문을 알 수 없는 수증기들이 한지예와 버질의 눈앞에 나타났다.
안갯속에서 흐릿한 형태가 드러났다. 검은 그림자는 거대하면서도 웅장하여 압도당할 수준이었다.
“성문?”
연꽃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문짝. 붉은색 문양의 화려한 용마루. 지붕을 장식하는 빽빽한 기왓장. 삐뚤삐뚤한 필체로 사랑 애(愛)라고 집필된 간판.
한지예의 눈에 매우 익숙한 동양풍의 홍예식 성문이었다.
성문의 높이는 드라마나 영화에 접한 이미지보다 크고 웅장했다. 넘어가는 방법은 불가능해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성문을 따라 이어진 성곽은 마치 진나라 시황제 시절의 만리장성과 유사했다. 검은 땅을 반쪽으로 갈라놓는 성곽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왜 이런 곳에.”
한지예는 성문으로 다가가 대문을 어루만졌다. 곱게 칠된 문짝과 나무의 재질로 보아 예상하던 그것과 똑같았다.
잠시 안도하던 찰라, 성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목에 무언가가 막힌 것 같았다. 곧이어 성문은 목에 걸린 무언가를 뱉었다. 정확하게 발치 앞에 떨어졌다.
[이름]
네모난 판자였다.
심지어 단답형이다.
한지예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얼굴로 버질을 애절하게 쳐다보았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언자가 필요한 법이다. 방면에 저승의 조언자는 더는 평범한 상식이 이곳에서 무용지물이라고 말하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하는 염소 다음에는 움직이는 성문이냐?!
한지예는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질문에 답하기로 하였다.
“이름 한지예.”
그녀가 말하고.
툭.
대화를 주고받듯이 새로운 판자가 눈앞에 떨어졌다. 이번에는 [나이]라고 적힌 간판이었다.
“올해 19살………… 아니, 만 18세.”
툭.
[생일]이라고 적힌 판자가 떨어졌다.
“3월 10일…….”
툭
[국적]
“대한민국…….”
툭.
[좋아하는 음식]
“BHC 맛초…… 아니, 그런 걸 왜 물어보는데?!”
신상을 캐묻는 질문들에 묘한 거부감을 느낀 한지예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이곳이 인간의 상식으로 허용범위를 이탈해버린 세계임은 틀림없다. 그녀가 목숨을 내다 버린 이승이라는 세계에서 저승의 상식이란 과대망상일 뿐이다. 말하는 염소도 움직이는 성문은 상상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지예가 혼자 골머리를 앓던 와중 성문이 판자 하나를 던졌다. [나는 뿌링클]라고 적힌 판자였다.
“………….”
의사표현도 가능한가 보다.
기계는 아니다. 그럼 제3자가 있단 말인가?
혹시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성문의 배후에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라면?
온갖 의심을 품어보지만 헛수고일 뿐이다. 곧바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성문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생물임이 틀림없다.
“하아…….”
한지예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저승의 현실은 너무 가혹했다. 19년 인생동안 쌓아온 이승의 상식을 단 하루 만에 다른 세계의 상식으로 탈바꿈하기란 골치 아픈 법이다.
한지예는 하나부터 차근차근 정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곳에 대해 모르는 것이 무수히 많을 것이라고 짐작이 갔지만, 지금의 상황과 저승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건 도대체 뭐야?”
다름 아닌 [버질에게 물어본다.]를 선택했다.
구석에서 여유로이 털을 손질하던 버질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반응했다.
“네가 그토록 가고 싶은 곳.”
그리고 버질은 덧붙였다.
“너와 비슷한 인간과 정반대인 인간, 상관없는 인간과 필연적인 연관을 가진 인간들이 존재하는 공간이야.”
“이 안에는 평범한 사람들도 생활해?”
“당연하고말고.”
한지예는 금방 순응하였다.
‘이 안은 비교적 정상이란 말이지.’
적어도 말하는 염소랑 움직이는 성문은 없을 것이라.
버질의 증언을 토대로 생각해보았을 때 성문 너머에는 인간이 산다.
한지예와 동일한 ‘죽은 자’가 모여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하나같이 평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죽은 자들 가운데는 원치 않게 죽은 자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는 불행한 운명 아래에 모인 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살해당한 자들과 혹은 사형을 집행당한 자들, 그리고 한지예처럼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까지.
과연 그들과 역이게 된다면 그녀의 저승생활에 커다란 지장을 줄지도 모른다.
‘섣불리 판단하면 안 돼, 더욱 침착해져야 돼.’
한지예는 염려했다.
평온한 저승라이프를 기대하는 그녀가 만약 불가촉사망자들과 역이게 된다면, 자살을 선택하기 전 이승의 삶보다 더욱 역겨운 삶이 시작되리라.
장난스러운 삶은 이제 없다. 진지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녀는 죄를 범하였고, 지옥이라는 활로에 놓여있다. 앞길이 평탄하지 않은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하지만 기대돼.’
방면에 한지예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 묻어있다.
비록 문 너머의 세계에는 어떠한 두려움들이 도사릴지는 예상할 수 없다.
저승이라는 세계에서 만들어진 인간을 위한 공간. 동시에 죽음이라는 단계를 거친 인간들이 속속히 모인 장소이다.
산 자들의 틈 속에서 살아온 인간이,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그녀가 살아온 세계, 이승의 상식이 뒤 밖인 세상에서 사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죽음이라는 공통적인 조건에서 생전의 과거에 얽매인 채,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곳 저승의 삶이다.
그리고 이후의 삶이 그녀에게 어떤 결과를 초려할지는 아무도 알 수는 없지만, 그녀가 짊어질 죄에 무게는 한없이 무겁다는 점에서는 저승의 삶이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앞을 나아간다.
그녀가 살아온 인생의 허무 속에서, 오늘날 새로운 지표를 그리는 것으로 그녀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밟은 미래를 상상하니, 기대를 주체하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이리라.
이렇게 상상에 부풀어버린 것이 언제였더라?
한지예는 까마득한 유년시절의 기억을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다. 허망된 꿈 따위 꿈꾸지 않으리라 결심했건만, 죽음 뒤의 삶에서 새로운 꿈을 꿈꾸게 되었다.
오늘날 그녀는 한번.
다시 태어나는━━━감각을 느꼈다.
성문이 열린다.
문틈사이로 눈 부신 빛이 쏟아져 내린다.
아침햇살과도 같은 맑은 빛을 동반한 따스한 온기가 그녀와 그녀를 지탱한 검은 땅을 녹인다.
한없이 어둡던 땅에 생명의 빛이 쬐이고 백색으로 물들어간다. 그 곳이 검은 땅과 차별된 공간임이 느껴졌다.
한지예가 고개를 돌려 염소에게 물었다.
“같이 가는 거지?”
앞으로의 여정에서 버질의 도움이 필요할 순간은 얼마든지 많을 것이다. 한지예는 자신의 안락을 위해서, 또한 지옥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버질이 절실히 필요하다.
“아니야. 너 혼자 가야 해.”
하지만 버질은 거절했다.
한지예는 실망한 기색이 가득했다.
“미안하지만 나에게 도움 받아야 할 사람은 언제든지 나타나, 너희랑 똑같이 태평하게 지낼 수는 없어. 나는 하늘의 영이니깐.”
버질은 하늘의 영이다.
이들은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이다.
하늘의 영들은 하늘의 피조물들과 다르게, 자유의지가 자리 잡은 자리에는 하늘에게 받은 사명감이 대신 깃들어있다.
그리고 버질에게 사명감이란, 저승에 밀려온 사망자들을 각자의 길로 인도하는 것.
그는 평생을 안내자의 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다.
한지예는 그를 말리지 못한다. 그저 각자의 방향을 가리킨다. 한지예는 죽은 자들의 도시로, 염소는 죽은 자들의 안내자로서 각자의 의미를 다할 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사명감이 깃든 존재는 나무판자를 뱉었다.
[한지예 = 신원확인. 정욕의 성 = 입국허가]
한지예는 이 의미를 깨달았다.
잠시의 인연과 작별할 때라는 것을.
“그럼 안녕.”
한지예는 작별을 고하고, 버질은 떠날 채비를 한다.
“안녕.”
버질은 냉정하게도 익숙한 걸음걸이로 뒤돌아 걷는다.
안타까움이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이별을 수없이 경험한 버질은 안타까움을 남기지 못하도록 냉혹해져야 했다.
그렇게, 버질은 고개도 돌아보지 않고 끝이 없는 검은 바닥을 향해 걸어간다.
가는 길마다 발굽 자국이 새겨졌고 그 발굽 자국은 새하얀 털빛과 어울리는 새하얀 발자국이었다.
한지예도 뒤돌았다.
찬란한 광채가 그녀를 환영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