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디녀석. 한 눈판 사이에 금세 사라져버렸네.”
후덥지근한 군복을 입은 사내가 광장을 두리번거렸다. 사람으로 붐비는 광장에서 사람 찾기란 여간 좋은 조건이라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많은 사람 속에서 허리높이의 꼬마 아이를 어떻게 찾으란 말인가.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을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윈디라는 소녀를 광장에서 잃어버렸다. 얌전한 주제에 음식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아 오늘은 고기가 먹고 싶다는 꼬드김에 넘어간 것이 화근이리라.
김지용은 처마 어린아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며 자신을 수긍하였다. 많이 먹을 나이에는 많이 먹이는 것이 정답이었으니.
하지만 단지 배만 채우기 위해 김지용과 윈디는 광장에 들리지 않았다.
두아디라 여신상.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저승에 정욕의 성이 건설될 때부터 이 자리를 지켜온 조각상이다.
정욕의 성 영주 ‘아스모데우스’의 모습을 본떠 만든 여신상으로써 탐욕의 성 영주 ‘마몬’과 대장장이 ‘헤이즈’가 함께 조각한 걸작 중에 걸작이라고 전해진다.
두아디아 여신상이 자리한 광장은 정욕의 성 최고의 관광지로 유명하다. 김지용 또한 두아디라 여신상을 보러오기 위한 관광객 중 하나였다.
“혁명에 승리한 귀신들의 왕과 칠죄종의 증인들은 각자가 머물기 편한 일곱 도시를…… …… .”
김지용은 여신상 밑에 도장된 안내문을 하나씩 천천히 읽었다.
[내 성인데 이왕이면 기념물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역시 소녀는 망치보다 조각칼을 집었어야 했구나! 오오! 걸작이로다!]
[사랑이 계획하고 보람이 만듦.]
아름다운 여신상의 품위를 깨트리는 의미불명의 안내문이었다. 안내보다는 사적인 이야기가 가득한 낙서 장 느낌이었다.
김지용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많은 인파의 물결 속에서 윈디의 모습은커녕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는다.
광장에서 윈디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지나친 도보 탓에 체력마저 고갈되고 말았다.
‘왕년에는 산 한 두 개쯤 뛰어다녔는데.’
몸은 세월을 이겨주지 못했다.
그의 나이는 20대 후반이며 곧 30을 마주보는 남자이다. 거친 노동과 자국의 전쟁에서 단련된 몸은 죽음과 동시에 피폐해지고 말았다.
결국 김지용은 투박한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잠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할 생각인 듯했다.
소녀의 걱정은 뒷전이었을까.
윈디는 순수한 아이이지만 무지하지는 않다. 총명하고 똘똘하여 어디에나 쉽게 끌려가지 않는 분발력 있는 아이다. 윈디라면 괜찮을 거라. 그런 위안을 하였다.
그것도 잠시.
마음이 컹 하니 막혀버렸다. 김지용은 윈디의 유일한 보호자이다. 막중한 역할을 짊어진 그는 불안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혹시 유괴를 당하거나 하지 않았겠지.
“……!”
등골이 오싹해진 김지용은 최저한의 체력만 보충한 뒤에 엉덩이를 떼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웠다. 숫자가 가까워져갈수록 긴박감이 심해졌다. 몸은 여전히 피로했다.
“하이고…….”
김지용은 늙은이 마냥 골골 앉는 소리를 내었다.
피로가 덜 풀렸을 쯤. 김지용의 눈앞으로 주민 한 명이 황급히 뛰어다녔다. 분주한 발걸음이 보물을 발견한 모양새였다.
뒤이어 다른 주민도 우르르 달려갔다. 주민들은 한 곳을 둘러싸고 크게 웅성거렸다.
‘누군가 재주를 부리는 걸까.’
호기심이 피어났지만 이내 곧 관심을 끊어버렸다.
‘윈디를 찾아야해.’
두 눈을 글썽이며 자신을 애타게 찾는 윈디를 생각하려니 마음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자식을 길러본 경험이 있는 김지용에게 아이를 지켜야한다는 보호본능은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군인이다. 김지용은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것에 중점을 두는 사내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휴식과 볼거리 따위가 아니다. 한시라도 빨리 윈디를 찾는 것이 급선무다. 고민하는 지금의 순간에도 윈디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김지용은 주먹을 불끈 쥐고 과감하게 벤치에서 일어섰다.
모든 신경의 세포들이 거부반응을 했지만, 오로지 의지하나가 그를 자리에서 일어서게 만들었다.
그 순간 불현 듯 한기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무리가 형성된 그곳에는 노인아이구분 없이 인산인해였다. 분명 호기심이 왕성한 윈디라면.
‘저기 있을지도 모르겠군.’
윈디가 다닐법한 예상되는 곳이라면 전부 찾아보았다.
짐작 가는 곳은 딱히 없었다. 그렇다면 저곳을 의심하는 것도 나쁘지 않는 선택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 무리 속에 끼기로 했다.
*
어지간히 소란스러운 싸움이었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쪽은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어려 보이는 가녀린 여자였다. 반대로 여자와 대치한 자는, 어느 정도 나이 먹어 보이는 사내였다.
사내는 여자에게 심한 욕설과 막말을 해댔다.
편파적으로 사내의 잘못으로 보였지만 적의를 가득 내뿜는 여자와 노여움을 참지 못하는 사내 중에서 누구의 죄가 큰지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김지용은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 도시는 분쟁이 잦아, 분명 시작의 샘이랑 가까운 탓이겠지.’
이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상황이 커지고 말았다. 사내가 손바닥을 휘두른 것이다. 오히려 김지용은 자신의 뺨이 지끈거렸다. 소리는 크기는 물론이거니와 여자의 왼쪽 뺨에 남겨진 붉은 손자국이 실로 빨겠다.
방면 여자의 눈빛이 살벌하였다. 복수심에 활활 타오는 것만 같았다. 그 시선이 사내에게로 가지 않고 멀쩡한 구경꾼들에게도 갔다. 시민들은 끽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내는 다시 한 번 여자의 뺨을 내리쳤다. 김지용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성이 저 둘을 말려달라고 신호를 보내지만 또 다른 이성이 그 말을 따라주질 않는다. 지킬 것과 기다릴 것이 있는 김지용은 작은 죄라도 피해야만 했다. 그렇게 곧 끝나리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여자와 사내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닥이기 시작하였다. 사내의 표정이 마치 욕망에 사로잡힌 망나니 같은 것이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1초가 1분 같은 살벌한 긴장감 속에서 타협이라도 한 듯 사내가 말을 끝냈다. 여자가 미세하게 부르르 떨더니 씩 웃으며 답했다. 대답은 들은 사내는 얼굴을 확 굳히며……. 주먹을 들었다.
“이런.”
김지용은 잠시 주춤했던 자신의 모습을 어리석고 부끄럽게 여겼다. 과연 이 상황에서 누구에게 죄가 있음을 따져야 하느냐. 죄의 깊이마저 모르는 와중에 한 쪽에게만 높고 낮음을 따져야 하는가.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아라. 과연 누가 죄를 짓고 있느냐. 죄를 행하는 자가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김지용이 무리 속을 헤집고 달렸다.
홀로 11년을 보내고 인연에 굶주렸을 때 윈디가 빈자리를 대신해주었다. 자신에게 무참하게 도륙당한 3명의 남자에게 인식표를 돌려주었다. 용서받아 죄가 씻겨진 몸이다. 새로운 죄는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 유일한 미련만으로도 벅찰 정도다.
과연 누가 죄를 짓고 있느냐.
무관심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죄가 그를 죄인으로 낙인찍어버릴 것이다.
곧 다가올 인연에게, 자신이 죄임임을 밝히고 싶지 않다.
*
“거기까지 하시게나.”
한지예와 치한의 사이를 갈라놓은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
훼방꾼의 등장이 마냥 달갑지 않던 치한은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목을 돌렸다.
곧바로 이들 앞으로 어두커니 서 있는 남자. 짧게 쳐 내린 머리와 손질되지 않는 까칠한 수염, 그리고 시대가 한창 지난 군복. 소리 없는 구경꾼무리 중 하나, 김지용이 한지예와 치한의 관계에 개입하고 만 것이다.
“아앙?! 넌 뭐야!”
치한은 다자고자 막말을 놓았다.
김지용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눈 뜨고 볼 수가 없군. 자네가 한 행동이 얼마나 저급한지 알고는 있나?”
“저, 저급?!”
“분노를 참을 줄 모르다니, 그러고도 대가를 치를 자격이 자네에게 있다고 생각하느냐 묻고 있다.”
“네놈이 뭔데, 꼰대 질이야?!”
치한이 서슴없이 삿대질로 김지용을 도발하였다. 물음에 대답하듯, 김지용이 군복을 들추어 신분을 밝혔다.
“보이는 것 같이 군인이다.”
“구, 군인?”
군번줄에 매달린 인식표가 은은한 소리로 짤랑거렸다. 자신의 신분을 밝힌 김지용을 멍하니 쳐다보는 치한.
“풉!”
그리고 비웃음.
“푸하하하하하하! 뭐라고, 군인? 네놈이 무슨 정의의 사도냐? 도심 속 영웅이야? 망토는 빼먹지 않았겠지? 크하하하하!”
치한이 배를 잡고 폭소하였다. 비아냥거리는 그의 말투에 자동으로 피식 웃는 사람이 나왔다. 웅성거림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김지용은 주위가 어떻든 현혹되지 않았다. 심기를 건드리는 치한의 비웃음도 그의 자존심을 깎아내리지 못하였다. 김지용은 싱거워 보일 정도로 당당한 모습이다.
김지용은 쯧하고 혀를 찼다.
“한심한 사내 같으니.”
역으로 비웃음당한 치한은 억지웃음을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성큼 성큼 김지용에게로 다가갔다. 노여움 가득한 치한의 발걸음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야.”
치한은 김지용을 노려보며 말했다.
“왜 그러지.”
서로 마주 선 두 사내의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서로의 눈빛과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적의와 경계심이 극도로 달아올랐다.
가장 먼저 행동을 나선 쪽은 치한이었다. 치한은 주먹을 검어 쥐고 기습적으로 얼굴을 향해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