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후 다시 문을 열었다.
방안의 광경은 다시 봐도 처참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고, 한구석에는 쓰레기봉투가 다발로 놓여있었다. 그리고 미쳐 쓰레기봉투에 들어가지 못한 쓰레기들이 방바닥을 장악하고 있었다.
“와.. 이건.. 발 디딜 틈 조차 없이 공을 들여 더럽혀놨는데? 어떤 의미로 존경스럽기 까지 하다..”
그래도 일단은 자신의 방 인듯 하니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방바닥을 장악하고 있는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얘는 평소에 방에 아예 안들어왔던건가? 아무리 그래도 자기방을 이렇게 까지 방치하는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짓인가?”
잠시 인간의 위대함에 대하여 고찰하던 그의 뇌리에 영업이 끝난 후 호재와 나눴던 대화의 일부가 떠올랐다.
[그.. 그게 가능한가요..? 그럼 잠도 안자고 일만하는거예요?]
[원래부터 그랬잖아? 그보다 이 카페가 오픈하고 부터 한번도 안잔 네 입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뭔가 어이가 없는걸]
“그 말이 사실이였던 건가.. 어느순간부터 아예 자기 방을 포기했던건가.. 무서운놈..”
그렇게 잠시 방을 치우는 듯 하더니, 금새 질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쓰레기 더미에서 손을 떼었다.
“아 귀찮아.. 내가 어지른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어야 하지?”
그리고선 대충 발로 쓰레기 더미를 한군데로 밀어서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만을 확보했다.
“뭐 이정도면 되겠지”
누군가 방 꼴을 보았다면 경악할 만한 소리를 태연하게 한 후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우선.. 아무래도 난 이 박지웅이라는 NPC 케릭터가 된게 맞는 것 같고..
“그리고.. 이철현.. 가증스러운 점장놈.. 분노조절장애에다 사디스트인 놈이 감히 대국민 사기를 쳐!? 반드시 네놈의 진면목을 전세계의 여성유저에게 폭로해주마!”
점장과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분노하던 그의 얼굴이 또 다른 인물을 떠올리며 슬프게 변하기 시작했다.
“소영이.. 나의 소영이가.. 나의 소영이가.. 그런 불량소녀 일리가.. 아니야 이건 누군가의 음모야!”
“호재형님..은 그나마 정상인거 같고..”
“일단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대충 이런 느낌인가?”
사람들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 이곳의 근무환경에 대한 분석을 시작했다.
“내가 아는 이곳의 영업시간은 아침 8시부터 밤11시 30분.. 그리고 이야기를 듣자하니 매일 새벽 1시에 내일 영업준비.. 주야행동인가 뭔가 하는 악덕스킬로 NPC들은 잠이 필요 없다라..”
“그리고 점장놈은 영업시간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갔고, 이따가 다시 안온다라.. 그러고보니 이 카페에서 점장놈이 하는 일이 있었던가? 소은이랑 왔을 때도 맨날 음료만드는 카운터 앞에서 서서 대국민 사기극만 펼치고 있었지 뭔가 하는건 본적이 없는데?”
“잠깐..?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갔다고? 아까 내가 카페에서 나가려고 했을 때 소속구역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경고 메시지가 쉴새 없이 울렸던 것 같은데.. 점장놈은 괜찮은 건가? 그리고 난 분명히 카페 밖으로 뛰어나갔는데 정신 차려보니 왜 다시 카페안에 있었던 거지?”
불현듯 떠오른 의문에 잠시 머리를 굴려봤지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아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알게 뭐야, 힘들게 생각할 필요 없이 나중에 직접 물어보면 되지”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점장을 제외한 나머지 종업원 세명은 이 허름하기 짝이 없는 화장실 건물로 쓰면 딱인 컨테이너 박스에서 살고 있는 것 같고..”
“골드는 6,000G가 있긴 한데.. 현재까지 들은 근무 패턴으로는 도무지 돈을 쓸 시간은 없었을 것 같은데.. 이 게임 오픈이 분명 작년 12월 이였지..? 그리고 지금이 6월 이니까.. 바.. 반년치 월급인가!? 이게!?”
이 게임의 화폐 단위인 골드는 1G=10원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게임 내 물가도 현실과 비슷하며, 그 예로서 이 카페의 과일쥬스 메뉴는 대부분 150~300G 사이의 가격대로 판매되고 있다.
“자.. 잠깐 이거.. 지금 상황을 정리해보면 어떻게 되는거지..?”
그리고 방금까지 자신이 했던 이곳의 근무환경 분석의 내용을 되돌아 본 그는 경악했다.
“뭐야 이거!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고! 새벽에도 일하고! 숙소도 카페 뒤에 있는 이 썩어빠진 곳이고! 월급도 최악! 그렇다고 탈출하려 하면 요상한 경고메세지나 울려대고!”
“이거 완전히.. 현대판 노예잖아!?”
“뭐야.. 뭐냐고.. NPC는 스트레스 받을 일 없이 그냥 시키는 것만 하면 되는 거 아니였냐고! 숙식 같은거 신경 쓸 필요 없는거 아니였냐고!”
“내가 생각했던 NPC의 삶은 이런게 아냐.. 이런게 아니라고오오~~!!”
이곳에 온 후 몇번째 인지 모를 절규를 하는 그에게 화답하듯 방문이 큰 소리를 내며 난폭하게 열렸다.
“내가 아까 분명 조용히 하랬지!? 말이 말같지 않아? 네놈의 회로코드에 직접 새겨줘야 알아듣겠냐? 앙?”
방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곳엔 누가 봐도 엄청나게 분노한 듯한 아우라를 온 몸으로 풍기고 있는 소영의 모습이 있었다.
“역시 안되겠다. 점장님 말씀대로 고장난 기계는 때리면 고쳐지는지 어떤지 널 대상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옥에서 막 돌아온 악마를 몸에 빙의시킨 듯한 포스를 뿜으며 다가오는 소영으로부터 그를 구해준 것은 옆방의 호재였다.
“자자.. 소영아 그쯤하고 시간도 됐으니 슬슬 가자, 쟨 가끔씩 이상한 소리 할 때 있잖아?”
“오빠! 그래도 오늘은 너무 심해요!”
“내가 생각해도 오늘은 좀 많이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곧 괜찮아지지 않겠어?”
“에휴.. 알겠어요.”
‘사.. 살았다..’
안도하는 나에게 싸늘한 소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은.. 말 안해도 알지?”
“넵!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영님!”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일하러 갈 준비나 해!”
그녀는 싸늘한 눈총을 준 후 컨테이너 박스를 나가 카페로 향했다.
“벌써 1시구나, 지웅아 우리도 가자”
그리고 그녀를 뒤따라 호재도 발걸음을 옮겼다.
“하아..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
느긋느긋 발걸음을 옮겨 카페에 들어가자 호재와 소영이 음료카운터와 연결된 창고에서 과일이 한 가득 담긴 바구니를 꺼내오고 있었다.
어기적어기적 다가오는 지웅을 보자 다시 열이 뻗쳐 오는지 소영이 한마디 쏘아붙였다.
“야! 빨리빨리 안오냐?”
“워워~ 소영아 진정해, 오늘 뒷정리 지웅이가 했으니 그정도는 이해해줘~”
“흥, 그건 자업자득인거잖아요.”
소영이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호재가 중재를 시도했다.
“지웅아, 너도 오늘 많이 이상하다. 평소부터 장난끼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어딘가 나사 빠진 놈 같아. 소영이가 화날만 해.”
“네.. 죄송해요.”
“그래그래, 소영아 너도 기분 좀 풀고”
“오빠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알겠어요.”
“자! 둘다 어느정도 정리된 거 같으니 얼른 작업하자.”
“네” / “네”
그리고선 호재는 과도 3자루와 작은 바구니 몇 개를 가져와선 두사람에게 과도를 나누어주고 가져온 바구니들은 과일이 담겨있는 큰 바구니 옆에 나란히 내려 놓았다..
“자 시작하자”
그리고선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를 하나 꺼내 들더니 과도로 껍질을 벗겨낸 후 ‘사과’라고 주기되어 있는 작은 바구니에 집어 넣었다.
‘뭐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이 과일들을 미리 손질해 놓아야 하는 것 같으니 일단은 나도 따라하자’
하지만 평소에도 귀찮아서 과일 껍질을 까서 먹기보다는 대충 씻어서 껍질째로 먹기를 선호했던 그에게 과도로 껍질을 벗겨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아.. 이거 되게 귀찮네.. 그나저나 이거 잔업수당은 주는건가? 야간 작업은 1.5배로 받아야 되는데..’
겉으로는 조용히 일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쉴새없이 불만을 쏟아내고 있자니 기가막힌다는 듯한 소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지금 뭐하냐?”
“응? 나?”
“어, 너”
“뭐하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건 보면 알 수 있잖아?”
“그게?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 거라고?”
소영은 나의 손에 들려있는 사과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네 손에 들려있는 사과 꼬라지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녀의 말에 방금전까지 열심히 껍질을 벗기고 있던 사과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곳엔 사과라고 부르기 민망한 기이한 모양의 물건이 있었다.
“어..어라? 이게 왜 이럴까..?”
“껍질만 깎으랬지 누가 사과 자체를 조각하래?”
“미안.. 잠시 정신을 다른데 뒀나봐”
한마디 더 하려다 의외로 순순히 대답하는 지웅의 모습에 소영도 화를 누그러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자자, 집중해서 하자~”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것을 눈치챈 호재가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을 꺼냈고, 그 말을 신호로 그들은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귀찮긴 하지만.. 분위기상 일단은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해야겠다..’
최대한 내용물에 손상을 주지 않고 사과 껍질만을 벗겨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서 사과의 껍질을 깎아냈다.
그렇게 집중한 끝에 그나마 온전한 모양으로 사과의 껍질을 벗겨내어 사과 바구니에 담으려 시선을 옮기자 그곳엔 이미 깨끗하게 손질된 몇 개의 사과가 들어있었다.
슬쩍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니 그들은 숙련된 솜씨로 빠르게 껍질을 벗겨나가는 중이였다.
‘빠.. 빠르다.. 이게 반복학습의 효과인가?’
그들의 속도에 마음속으로 작게 감탄하며 다시 과일바구니로 시선을 옮긴 그의 눈에 번뜩 빛이 일었다.
‘그래! 굳이 과도로 껍질을 벗겨야 하는 과일만 있는게 아니잖아?’
바구니에는 사과나 배 처럼 과도로 껍질을 벗겨내야 하는 과일 뿐만이 아니라 귤, 오렌지 등의 손으로 껍질을 벗길 수 있는 과일도 함께 담겨 있었다.
‘그래, 굳이 힘들고 귀찮은 일을 선택할 필요는 없지, 거기다 과도를 다루는건 저 두사람이 나보다 훨씬 뛰어나니.. 이것이야 말로 적재적소! 암.. 그렇고 말고’
그리고 우선 만만한 귤부터 집중 공략에 나서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 돼, 작업 능률도 오르고! 못한다고 구박받을 일도 없고!’
그렇게 한동안 귤만을 골라서 작업하고 있자니 두 사람이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짓 안하고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터라 두 사람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자신의 작업에 집중했다.
‘음.. 좋아좋아.. 내가 생각해도 전략을 참 잘 구상했어. 그런데.. 설마 이거 다 해야하는건가?’
그는 귤 하나를 귤이 수북히 쌓인 바구니에 집어 넣으며 남아 있는 과일의 양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대략 1시간정도는 작업한 것 같은데 남아있는 과일의 수는 작업한 수의 족히 두배는 되어 보였다.
‘하아.. 이거 언제 다해.. 아! 그나저나 제일 중요한 걸 안 물어봤네’
다시 또 하나의 귤을 바구니에 집어넣으며 조심스레 호재에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