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을 주(朱)
바를 정(正)
밝을 명(明)
주정명. 중원을 삼분(三分)하고 있는 적천멸(赤天滅)의 팔공자다. 적천멸의 주인인 주치(朱熾)에겐 8명의 자식이 있으니 그중 막내가 되는 셈이다. 올해로 13살이 된 주정명에겐 다른 사람과 다른 특별한 취미가 있다. 술법(術法), 무공(武功), 선법(善法), 진법(陳法)이나 의술. 유명한 것도 있으며 일부에게만 은밀하게 전승되는 은밀한 비전도 있었고 아는 자가 희귀한 공부도 있다. 하지만 주정명에게 공부하는 것은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 마도(魔度).
그렇다. 주정명은 마도사(魔度士)다.
시작은 한 권의 서책이다. 북방에서 스스로 신교(神敎)라고 칭하던 자들을 징치하고 그들의 재산과 지식을 몰수하였을 때. 우연히 한 권의 서책이 그에게 들어왔다. 그때 나이 7세. 한창 무공과 술법에 흥미를 느껴야할 시기에 마도서 하나가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그 신비함에 주정명은 마도서에 한 번에 매료되었다. 일 년을 입문을 위해 명상을 했다. 다른 공부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내공을 쌓거나 힘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다. 마도사의 명상은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 자신의 영혼을 직시하고 마도의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 마도사의 명상이다. 처음 주정명이 본 영혼의 색은 아무 것도 없는 흰색. 백지였다. 그것을 점차 검게 물들였다. 너무 검은색만 난무하는 건 심심하지 않을까 생각하여 자신의 성을 따라 붉은 색도 섞었다. 검붉은 색으로 서서히 물들기를 1년.
드디어 주정명은 마도사 입문에 성공했다. 물들인 색으로 원을 만들고 그것을 활용해 마법(魔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법은 다른 공부와 차원을 달리했다. 그것의 목적은 실로 근원적이라 할 수 있었다. 목적은 생명체나 의식체를 향한 궁금증. 갈망을 위한 탐색이다. 근본적인 목적이 미지에 대한 탐색이며 해부, 해석이며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응요할 수 있는 방향성은 무한대다. 술법처럼 자연원소(自然元素)를 탐구해 그를 이용할 수도 있었으며 선법처럼 의식의 흐름만으로 대기에 간섭하거나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수도 있으며 무공처럼 스스로의 몸을 강화하여 싸울 수도 있다. 비슷한 것을 나열하자면 세상의 모든 공부가 될 것이니 마도의 길은 무한하다 표현할 수 있다.
거기서 주정명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인체공학(人體工學)과 이계동조(異界同調)다. 그 중에서 요즘 들어 보다 깊게 심취한 것은 바로 이계동조다. 인체공학은 그 재료의 희소성과 엄청난 난이도, 준비기간 때문에 어린 그에게 다소 지루한 면이 있어 최근에는 이계동조에 대해 학습하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아아악!"
온통 별무늬로 가득한 공동 안. 주정명의 개인 연구실이다. 중앙에 그려진 보랏빛 문양들. 마법진을 중심으로 중앙에 인간들이 있었다. 모두 14명.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안쪽으로 몰아넣은 상태였는데 마법진에서 기이한 촉수가 기어나와 그들을 휘감고 있었다. 주정명이 그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좋아. 정상적으로 작동하네?"
이것은 그가 개량한 마법진이다. 본래 7명의 제물을 바쳐 이계를 탐색하는 방법. 탐색이라고 해봤자 주공량이 머무는 본 차원을 중심으로 가장 가까운 차원의 표면만 겉핥기 식으로 살피는 것이지만. 주정명은 이것을 여러 개 겹쳐 새로운 마법진으로 만들었다. 본래 있던 육방의 문양을 32개를 겹쳐 대육방의 문양으로 거대화시키고 제물을 넣는 공간을 확장시켰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저주할 것이다! 죽어서도 저주할 것이야!"
"응. 고마워."
제물 중 하나가 원한을 가득 담아 소리쳤지만 주정명은 태연한 어조로 감사를 표했다. 마도사인 그에게 있어서 타인의 원한과 음적陰的인 감정은 양분이 될 뿐이니 감사할 따름이다.
"라-엔씨아."
마법진의 시동어를 말하자 주정명의 등뒤로 귀신의 형상이 서린다. 주정명의 언어에 반응한 악령. 이때를 위해 주정명이 자신의 영혼 속에 가둬둔 대악귀다. 14인의 제물을 남김없이 먹어치운 촉수가 귀신을 잡아챈다. 인간이 들을 수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반항했지만 소용없다. 촉수가 벌어지며 튀어나온 거대한 아가리에 잡아먹힌다. 그와 동시에 주정명이 크게 소리쳤다.
"제물을 모두 바쳤으니 문을 열어 이면세계를 보여달라!"
아직 소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장중한 음색이다. 영혼의 성숙함으로 인해 생긴 부작용이라고 할까나. 그의 목소리에 마법진이 답했다. 겹쳐진 문양들이 차례대로 밀려난다. 중앙에 공허로 이어지는 구멍을 만들며 원의 가장자리로 물러나는 것이다. 주정명은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육체와 멀어진다.
공허에는 물질이 들어올 수 없으니 육신을 벗는 수밖에 없다. 영혼만으로 공허에 들어온 주정명은 아찔한 괴리감에 눈을 감았다. 육체와 하나로 이어진 영혼이 비명을 지른다. 어서 육체로 돌아가라고.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눈을 뜬다. 온통 검은색. 은하수와 별무리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것 따위는 없다. 끝도 없는 어둠만이 가득하다.
잠시 기다리자 악령의 모습을 뒤집어쓴 보랏빛 촉수들이 길을 안내했다. 주정명의 입장에선 악령을 제외한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아 현재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몰랐지만 본차원과 한참 떨어진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리는 무한대나 마찬가지지만 옆동네라고 할 수 있는 차원들을 지나 저 멀리 아무도 찾지 않고 찾아서도 안 되는 곳으로 향했다.
지옥(地獄).
변질된 마법진과 변수가 된 제물. 악령의 원한. 제물의 저주. 그 모든 게 하나가 되어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을 일어났다. 지옥의 문이 열리고 주정명은 거기서 한 마리 악마를 본다. 악령과 원혼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보랏빛 촉수를 조종했고 주정명과 한 마리 악마. 그 둘을 하나로 묶었다. 태초에 두 개의 차원이 존재하였을 때, 그 차원이 무수히 많이 갈라졌을 때. 태초의 원신(原神)과 그에 대적한 마신(魔神)으로 인해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두 신조차 인지하지 못한 거대한 악의 집합에서 태어난 곳. 이제는 너무 커버렸으나 쓸모가 없어 방치된 곳. 투쟁과 갈망.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운만이 가득한 곳에 악마가 태어났다.
어떻게 태어난지 알 수 없다. 그저 흘러온 영혼의 조각과 지옥의 정신이 가미되어 태어난 개체일 뿐이다. 그가 기억하는 건 자신의 이름 하나.
칸 드락카르 헬.
드락카르는 어둠을 걸었다. 하나 되어 자신을 공유하고 있는 주정명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로. 주정명은 경악했다.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가득하다. 일단 눈으로 보이는 것부터 다르다. 오로지 물질만 볼 수 있으며 그조차도 빛의 반사로 보는 인간의 나약한 눈과 다르다. 모든 게 흐름이고 에너지다. 하나에서 흘러나온 핏물 같은 에너지가 대지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뢰가 다시 땅에서 반사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고 구름으로 보이는 에너지의 덩어리는 하늘에서 떨어져 땅을 기어다닌다.
지옥의 지상은 거대한 늪으로 되어 있다. 피륙으로 이루어진 강물이 사악한 발자취를 따라 진해지고 그것이 늪이 된다. 늪은 고통이다. 드락카르는 그곳을 걸으며 고통을 느꼈다. 늪을 평지처럼 걷고 있건만 영혼의 이끌림. 늪의 인력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있었다.
으아아!
사방에서 비명이 난무했다. 어쩌다 지옥에 온 존재들. 본래 밖에서라면 고귀했던 자들도, 사악했던 자들도 예외없이 모든 힘을 잃고 지옥의 평등함에 복종되었다. 그들 모두가 아귀가 되었다. 서로를 잡아먹는다. 먹고 먹고 먹다보면 언젠가 이곳을 나갈 수 있다. 세계가 알려준 정보가 그들을 아귀로 만들었다.
드락카르는 약간의 이성으로 본능을 통제했다. 모두 본능만 가득할 때 주정명과 연결된 약간의 의식 덕분에 이성이 살아있는 것이다. 생전의 모든 걸 잊은 아귀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형상에 따라 몸을 움직이고 입을 벌렸지만. 드락카르는 그것이 아님을 느꼈다. 이곳은 육체가 없는 허상세계.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것은 의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아주 미약했다. 지옥에 저항하고 정신체를 제어하는 것은 고난했지만 단 하나. 딱 한 부분, 입. 그곳은 통제할 수 있었다. 인간의 형상이었던 드락카르의 입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탐욕에 미쳐버린 괴물의 형상이 입을 크게 벌려 주위의 것들을 잡아먹었다.
아그적아그적.
씹어먹는 소리는 드락카르의 생각일 뿐이지만 아주 약간 허기가 사라짐을 느꼈다. 거대한 공허를 품고 있는 느낌이지만 물방울을 떨어트린 듯 반응이 인다. 얼마나 잡아먹어야 할까. 그는 끝도 없이 펼쳐진 아귀를 향해 다시 입을 벌렸다.
인간의 시간으로 사흘. 그동안 끝도 없이 먹었다. 아프다. 먹는데도 아프다. 공허함은 가실 줄을 모르고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남아있던 아주 작은 이성마저도 사라질 판국에 그는 다시 한 번 의식을 차리는 걸 느꼈다. 일만이 넘는 숫자를 먹은 덕분인가. 어떤 숫자가, 에너지의 총량이 넘어섰을 때 아귀와 다른 무언가로 변함을 느꼈다. 늪에서 걸어나온다. 늪은 거대한 층과 같은 곳일뿐. 지옥의 전부가 아니다. 사라진 아귀들의 잔재를 짓밟고 위로, 아니 위로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만 드는 공간을 이동했다. 실제로 이곳에는 상하좌우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방향성의 개념은 오로지 지옥에 오기 전 본능 혹은 기억의 잔재 같은 것이다.
아귀의 장소에서 벗어난 그는 새로운 세계에 올랐다. 이곳은 늪지대와 다르다. 초목이 있으며 산이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었다. 비록 그 모든 것이 지옥이라는 개념하에 모습만 다를 뿐 본질이 모두 같은 것임에도. 에너지의 형상이 물질의 형상을 띄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지평선 끝까지 살피던 그의 시야에 미약하지만 문명의 모습이 보인다.
지옥의 나무로 만들어진 방책과 작은 울타리. 그리고 집.
거기에서 거주하는 자들은 그와 다른 모습을 가진 자들이다. 드락카르는 인간의 형상과 닮았지만 몸 전체가 불꽃이 일렁이듯 이글거렸으며 색의 구분없이 온통 검붉은 색이었다. 그런데 놈들은 형체가 있다. 마치 물질처럼.
그것들은 아귀의 늪에서 수많은 세월을 거쳐 벗어난 것들이다. 그리고 생전의 본능과 미약한 기억에 의지해 스스로에게 형체를 부여한 것들이다. 처음 시작은 굉장히 다양했다. 타차원에서 오크나 엘프 같은 유사인종도 있었으며 드래곤과 구미호, 늑대인간 같은 부류의 것도 있다. 그들의 숫자가 하나, 둘 늘어나자 그것들을 따라하는 객체들이 점점 늘어나 끝내 종족을 이뤘다. 스스로 번식을 할 수 없으니 늪에서 나오는 것들이 그들의 모습을 흉내내면 동족이 되는 식이다.
드락카르가 보고 있는 종족은 크롤이라는 것들이다. 주로 늪과 가까운 곳에 서식하며 적게는 20. 많으면 100가까이 무리지어 생활하는 놈이다. 상체는 물고기와 닮았고 거기에 팔다리가 튀어나온 모양이다. 무리생활을 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지옥인지라 본능적으로 울타리를 짓거나 그것도 아니면 에너지 덩어리나 마찬가지인 지옥의 나무, 땅, 모래 같은 것들을 먹으며 산다.
드락카르가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웃었다.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웃고 있었다. 먹잇감, 먹잇감이다.
울타리를 부숴버리자 그제야 크롤들이 반응했다. 그리고 드락카르의 모습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걸 인지한다. 다르다는 건 동족이 아니란 뜻이고 동족이 아니란 건 적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괴성을 지르며 드락카르에게 달려들었다.
드락카르도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허공에 몸을 띄운 드락카르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변한다. 잠시지만 등뒤로 날개가 생겨 펄럭였다. 짧은 순간으로 허공에 체공한 시간이 두 배로 늘었다. 그러자 드락카르는 크롤 떼 한가운데에 떨어지는 형국이 되었다. 밑으로 떨어지자 드락카르가 다시 괴성을 질렀다. 그러자 그의 전신이 크게 벌어진다. 늪지대에서 한 것처럼 최대한 입을 벌린다. 전신이 용의 머리처럼 변한 드락카르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의를 내뿜는 크롤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드락카르를 물어뜯었다. 드락카르의 바로 아래에 있던 크롤 네 마리가 씹어먹혔다. 동시에 드락카르의 몸도 크롤에게 물어뜯겼다. 드락카르를 물어뜯은 놈들이 고통의 신음을 흘렸다. 검붉은 덩어리가 속을 태우고 있다. 가슴에서 시작한 화끈한 통증이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변화.
가슴에서 검붉은 색의 불길이 일더니 순식간에 전신을 감쌌다. 스스로를 태워 껍질을 벗는 것처럼. 크롤의 껍데기가 모두 불탔을 때 거기에 있는건 드락카르와 무척이나 닮은 것들이었다. 변해버린 것들은 크롤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동족이었던 것들을 망설이지 않고 찢어버렸다. 몇몇은 드락카르처럼 변형을 일으키기도 했다.
드락카르는 상관없었다. 저것들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저 먹는다. 싸운다. 그것만이 구원이다.
드락카르는 자신처럼 변해버린 것들마저 잡아먹었다. 변형된 괴물들은 갈수록 늘어났다. 수십 마리의 크롤이 그렇게 변했고 드락카르는 그것마저 잡아먹었다. 모두 잡아먹은 드락카르는 크롤이 만들었던 방책과 울타리, 집마저도 모두 집어삼켰다.
커억.
그리고 크게 트림하더니 잔뜩 웅크린다. 그의 등이 꿈틀거렸다. 잠깐 모습을 드러냈던 날개가 등을 찢고 나왔다. 전보다 안정적이지만 보다 흉측한 것. 파충류의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졌으면서 검붉은 불길이 일렁이는 날개는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함을 자아냈다. 전부 먹은 것에 만족한 드락카르가 날개를 크게 펄럭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음 사냥감을 찾아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