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로맨스
버려진 시간들
작가 : 장서진
작품등록일 : 201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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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작성일 : 17-06-06     조회 : 446     추천 : 0     분량 : 5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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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두 발이 눈 속에 푹푹 파묻혔다. 나는 몇 걸음 걷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눈보라너머 저 멀리서 어린 동생이 눈밭을 헤치며 걸어오고 있었다.

 

 

  쏟아지는 폭설에 동생의 모습은 이따금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나는 그의 모습이 선명히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이런 날씨라면 차라리 업고 가는 것이 빠를 것이나 내 걸음으로 족히 사나흘은 더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곳에 동생을 데리고 가기란 힘들었다. 날이 맑았다면 벌써 달음질쳐 도망치고도 남았을 것을, 나는 동생의 서러운 울음소리에 번번이 길을 멈추고 마는 것이었다.

 

 

  내가 밟고 지나온 이 길은 주변이 모두 논밭이었다. 전에는 식구끼리 밀도 일구어먹고 보리도 일구어먹던 곳이었다.

 

 

  그때는 우리 집도 널찍이 땅을 빌려다가 소작하여 생계를 꾸려갔다. 식구들 모두 새벽닭 우는 소리에 깨어나 밭으로 달려가기 바빴다. 연이은 풍년으로 모자람이 없던 시절이라 사람들 모두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로웠다.

 

 

  일이 재미있고, 천하가 태평하던 때였다. 아버지는 그 좋아하던 술도 끊고 진종일 땡볕에 그을리며 살았다. 그러나 풍족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막냇동생을 낳은 어머니가 산고로 세상을 떠날 무렵 가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동생은 이제 겨우 다섯 살이었다. 어려서부터 친어머니 대신 나를 어미 삼아 커온 아이였다. 나는 동네 아낙들에게 젖동냥을 다니며 동생을 먹였고, 밤낮으로 일어나 천기저귀를 갈아주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나니 나는 그 아이들의 부모나 다름없었다. 어미나 아비를 잃은 집 아이들이 대부분 그러했으나 내 동생들은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막내는 내가 곁에 있지 않으면 아무리 어두워도 잠들려 하지 않았다.

 

 

  한참동안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에일 듯하여 견딜 수 없었다. 터벅거리며 걷던 것도 마다하고 아예 멈추어 서자 동생 역시 그 자리에 멈춰 울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울 태세였다.

 

 

  그것은 돌아오지 않으면 언제든 울다 죽을 수도 있다는 일종의 협박과도 같았다. 나는 버티고 버티다 동생을 향해 힘껏 달렸다. 손발이 시리고 눈에는 눈물이 흘렀지만 동생을 내치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가, 지금 너는 내가 얼마나 크고 대단한 것을 포기하였는지 모르겠지.

 

 

  순간 눈물이 울컥 솟았다. 나는 두 눈이 벌게진 채 안아 달라 조르는 동생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 내어 울었다. 내가 주저앉자 녀석은 내 목을 끌어안고 큰소리로 울었다. 내 나이 열여섯, 어린 동생을 두고 떠날 수 없음을 한으로 여기며 나는 그를 한 팔로 안고 집으로 향했다. 속에 찬 눈물을 다 토해내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동생이 입은 옷이 너무 얇았다. 눈에 띄는 헤진 부분에 내 마음이 다 닳아빠지는 듯했다.

 

 

 

 

  집 앞에 다다르자 싸리비를 든 아버지가 성난 얼굴로 달려 나왔다. 얼굴이 벌겋고 악취가 나는 것이 낮부터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그는 약간 비틀거리며 다가와 나를 매우 세게 매질했다. 보나마나 또 노름을 하여 빚을 졌겠지. 나는 아버지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나는 죽는 소리도 내지 않고 땅바닥에 쓰러져 계속 매를 맞았다.

 

 

  몸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는데도 이미 살이 얼어 감각이 없었다. 옷 위로 조금씩 배어나오는 핏물에 놀란 막내가 또 다시 큰소리로 울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방에 있던 다섯째가 튀어나왔다. 열두 살짜리 아들과의 몸싸움에서 밀린 아버지는 몹시 분했던지 바닥에 비를 내던지고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귀신같이 도망갈 땐 언제고 왜 다시 돌아와? 막내도 네가 데려갔지?”

 

  격앙된 듯하면서도 몹시 비꼬는 말투였다. 그는 나를 쏘아보면서 내 한쪽 어깨를 발로 툭툭 쳤다.

 

  “재우고 나왔는데 애가 알고 쫓아온 거야. 절대 내가 데리고 나온 거 아니야.”

  “도망간 주제에 아버지 소리는 잘도 하네. 나갔으면 끝이지 왜 다시 와?”

  “나 도망갔다고 아버지가 다른 자식 팔아먹을까 봐! 종현이 이제 열두 살이고 막내 다섯 살밖에 안 됐는데 아버지가 팔아먹음 어떡해?”

  “이년이! 동생들 핑계대지 마라! 너같이 약아빠진 년이 잘도 그런 생각을 했겠다!”

 

 

  마구 악다구니를 치자 솥뚜껑만한 손이 내 머릴 세게 내리쳤다. 나는 몸이 휘청거렸지만 울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악에 받쳐서는 “어느 집에 몸종으로 가 살아도 여기보단 낫겠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그는 다시 한 번 나를 때렸다. 이번에는 힘이 제대로 실렸는지 눈가에 뜨끈한 무언가가 주룩 흘러내렸다.

 

 

  동생 둘이 내 얼굴을 보고선 아연실색하더니 이제는 아버지를 질타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매질은 더욱 거세졌다.

 

 

  “아버지, 그만 좀 해!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이러다 누이 죽어!”

  “썩을 년! 어디 함 죽어보라지! 아예 죽어 없어졌음 좋겠네!”

  “죽여! 차라리 죽여! 소원대로 죽여!”

 

 

  제일 울고 싶은 건 나인데 울부짖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는 울면서도 나를 때렸다. 술기운에 지쳐 고꾸라지면 좋겠건만, 그는 곡주만 마시면 힘이 세졌다. 계속되는 고통에 더는 아프다는 비명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저항할 힘도 잃고 될 대로 되라는 듯 그만 누워버렸다. 벌게진 옷자락도, 아버지의 얼굴도, 마음속 멍울도 모두 잊은 채 아주 긴 잠을 자고 싶었다. 정신을 잃은 후엔 절대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겨우 정신을 잃을 만하면 머리채를 몇 번이고 잡혀서, 나는 이 지옥 같은 일을 두 눈뜨고 겪어야했다.

 

 

  아비(阿鼻)같은 내 아버지, 먼 훗날 당신이 나보다 이생을 먼저 떠난다 하여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테니 이런 나를 똑똑히 지켜보세요. 혹 내가 먼저 떠나거든 숨 참고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내가 그 누구보다 선명한 분노와 증오로 당신의 지옥행을 기도할 테니까요. 설사 나 또한 지옥 불에 떨어진다 한들 당신과 떨어져 사는 곳이라면 천국이 아니라도 괜찮을 테지요.

 

 

 * * *

 

 

  시간은 무심히 흘렀고, 일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날은 추워졌고, 먹고 사는 일도 더 팍팍해졌다. 동생들은 놀러도 나가지 않고 아버지를 피해 건넛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안방에는 아버지가 아랫목에 누워 종일 앓는 소리를 냈다.

 

 

  엊그제 저녁, 아버지는 매일 가다시피 하는 주막에서 술을 한 잔 하고 돌아오는 길에 넘어지고 말았다. 말이 한잔이지 그는 늘 취해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평소에도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든데 꽁꽁 언 눈길 위에서야 오죽했을까. 그 탓에 나는 아버지 병수발 들랴, 동생들 끼니 챙겨주랴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가 아파 누운 동안은 맞지 않아도 돼 사는 게 나쁘지 않았다. 행복하진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며칠은 더 버티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여기가 노름꾼 김가네 맞는가?”

 

 

  땅에 묻은 장독에서 김치를 꺼내는데 등 뒤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심결에 고갤 돌리자 웬 나이 지긋한 선비가 우리 집 울타리 앞에 서서는 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따위의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동생들 역시 방문객의 정체가 궁금했는지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지금은 좀 만나 뵙기가 곤란한데.”

  “소문 다 들었다. 술 먹고 걷다가 빙판길에 넘어졌다지? 그래, 그래서 네 아비는 지금 병석에 누워있는 게냐?”

  “예.”

 

 

  도포 차림에 갓을 썼지만 양반 같지는 않았다. 그는 위아래로 나를 살피더니 혀를 끌끌 찼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날 살피는 눈빛이 여간 기분 나쁜 게 아니었다.

 

 

  “혼자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지? 오라비들은 전부 밖으로만 나돌고, 하나 있던 언니는 시집 간 뒤 무소식이고. 동생들과 아비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고생이 많겠어.”

  “어쩜 그리 우리 집 사정에 대해서 잘 아세요? 혹시 아버지께서 나리께도 빚을 졌나요?”

  “빚이라……. 빚이라면 빚이지. 하지만 내게 진 빚이 아니야. 빚을 진 상대는 따로 있어.”

  “그럼 도대체 왜…….”

 

 

  당혹스런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그는 정말로 듣지 못했냐는 듯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나는 대답도 못한 채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나보다 상황 파악을 먼저 끝낸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자못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조금 있으면 가마가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예?”

  “서출이라도 양반 댁 자제이니 너에겐 좋은 일이다. 언제 그렇게라도 양반과 연을 맺어보겠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잘…….”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이구나. 그 댁에서 네 아버지 노름빚을 대신 갚아주는 값으로 너를 그 댁 서출과 혼인시키기로 했다. 서출이어도 너보다는 나을 테지.”

 

 

  머리가 쨍하니 아파왔다. 좋게 말해 혼인이지 아버지 노름빚에 팔려가는 것이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것도 놓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김칫국물이 크게 튀자 갓을 쓴 사내가 호들갑을 떨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나는 치맛단이 젖어가건 말건 망연자실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불현듯 아버지가 넌지시 혼인에 대해 말한 것을 생각해냈으나 이 이야기는 아닐 거라고 믿었다. 갑작스러운 것은 둘째 치고 억장이 다 무너지는 일이었다.

 

 

  “듣지 못한 모양이구나. 네 아비가 그럼 그렇지, 쯧쯧.”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낀 듯 종현이가 날 부르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날 일으켜 옷매무새를 정리해주고 마루에 데리고 가 앉혔다. 갓을 쓴 남자는 집을 한 번 휙 둘러보더니 갑자기 뒷짐을 지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동생들이 어려서 걱정이라면 네 아버지를 새 장가들게 해줄 수도 있다. 그게 싫으면 동생들 끼니 걱정은 안 하도록 내 그 집에 말해보마.”

  “도대체 그 빚이 얼마기에 제가 가야한단 말입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아니꼽다는 듯 눈을 흘기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것이야. 그리고 어차피 혼인이야 어차피 하게 될 일인데 뭘 그리 걱정해? 그래도 네 아버지가 최소한의 양심과 명예욕은 있어서 너를 그런 집에 시집보내는 게지. 그리고 너와 네 집안에 이 정도 해주는 집안이 어디 흔하단 말이냐? 평생 꿈에서도 못 누릴 호사이지.”

 

 

  그날, 눈보라가 치고 눈밭에 발목이 푹푹 빠져 걷기가 힘들지언정 나는 이곳을 떠났어야 했다. 평생 지아비와 아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게 이 땅의 여자들이라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혼인이 절대 정상적일 리 없거니와 지아비가 될 사람도 어디 하나 모자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내가 아주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마는, 내 인생이 남의 손에 내쳐지는 꼴은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저희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누이랑 함께 있을 거예요.”

 

 

 라고 말하는 동생들 앞에서 그 전의 단단하게 날이 서 있던 마음들은 한 차례 무너지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손을 잡아오는 종현이와 폭 안겨드는 종인이의 체온을 느끼며 가슴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아직 어리기만 한 이 아이들을 나

  때문에 굶겨 죽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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