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20년을 뚱뚱하게 살아왔던 몸이 갑자기 날씬해지는 건 일평생 앞으로만 걷던 사람이 갑자기 뒤로 걸어야 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간 유지해 왔던 식습관을 모두 뜯어고치고 활동량도 비약적으로 늘려야 했다. 먹는 양은 반으로 줄이고 운동량은 두 배로 늘려야 살이 빠졌다. 이마저도 정석적인 루트라 한없이 더딘 속도로 빠졌다. 77kg이 한 달에 일이키로씩 빠졌다. 돌아버릴 것 같아서 먹는 걸 반의 반으로 줄이고 운동량은 세 배로 늘렸다. 생지옥이었다.
흔히들 공부와 다이어트를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를 한다. 살을 빼기 전까지 주변 어른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공부는 그렇게 잘하면서 왜 살은 못 빼냐였다. 어불성설이다. 공부와 다이어트는 완전히 다르다. 둘 다 의지로 하는 건 맞지만 그래도 공부는 인간의 삼대 욕구 중 하나를 짓눌러가면서 해야 되는 일이 아니었다. 공부가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냥 앉아서 될 때까지 하면 되는 거니까 할 만했다. 하지만 다이어트는 하고 싶은 걸 참아야 했기에 공부와는 생판 다른 별개의 어려움이었다. 살을 빼고 싶으면 운동을 하라고 하지. 개소리다. 운동만 해서 뺄 수 있었으면 십 년도 전에 뺄 수 있었을 거다. 하루 8시간씩 운동하는 생활 패턴이 아니면 무조건 먹는 걸 줄여야 한다. 줄인다 뿐일까. 아예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이 투성이로 생긴다. 아니, 먹을 수 있는 걸 고르는 게 압도적으로 빠르겠다. 같은 칼로리라도 현미밥 한 그릇과 과자 한 봉지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매일 먹고 싶은 게 새롭게 떠오르는데 기약 없이 무작정 참기만 해야 했다. 그 참는 짓을 매분, 매초마다 해야 하는 것이 다이어트였다.
그러다 보면 꿈도 먹는 꿈을 꾸고 옆집에서 라면 끓여 먹는 냄새만 들어와도 쌍욕이 나온다.
“아, 이런 씨…….”
바로 지금처럼. 어디선가 솔솔 풍겨 오는 라면 냄새에 눈이 번쩍 뜨였다. 한창 치즈 소스를 듬뿍 뿌린 나초를 입에 털어넣던 와중이었는데. 꿈에서도 생생했던 그 바삭한 식감과 리치한 맛이 아쉬워 입맛을 다시다가 다시 한번 코를 훅 스치고 지나가는 짜릿한 MSG의 향기에 얼굴을 확 구겼다. 잠결에 다시 잘까 말까 하던 상황이었는데 요동을 치는 위장의 움직임 덕에 잠기운이 몽땅 달아났다. 짜증이 머리 끝까지 솟아 발바닥으로 벽을 몇번 차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거는 너구리……아니 오동통인데. 아, 진짜……맛있겠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한숨이 폐를 꽉 채웠다.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제일 먼저 끊은 게 인스턴트와 패스트푸드였다. 원래도 자주 먹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것까지 먹어가면서 하는 다이어트를 다이어트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빼다 보니 한 달에 한 번 먹는 것도 꽤 치명적이라는 걸 깨닫게 되어서 아예 안 먹게 되었다. 혹자는 조금만 먹으면 크게 지장 없다지만 조금만 먹는 것보다 안 먹는 게 더 쉬워서 그냥 안 먹었다. 그렇게 안 먹어 버릇하면 맛 자체를 까먹게 돼서 생각도 잘 안 나는데 문제는 이렇게 냄새를 맡으면 귀신 같이 먹고 싶어진다는 거다.
라면 냄새를 반찬 삼아 바나나를 하나씩 까서 먹었다. 라면맛 바나나를 먹는 기분이었다. 개 같다는 소리다.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 하니까 먹었다. 사람의 몸은 칼 같아서 먹어야 할 때 안 먹으면 나중에 두 배, 열 배의 식욕으로 돌아온다. 그걸 모르고 처음에 무작정 굶었다가 요요, 폭식을 거쳐 거식증까지 겪었다.
개강 D-3
몇 년을 혼자 살았더니 밥 먹을 때 TV나 폰 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무심코 들여다 본 액정에 떠 있는 글자가 속을 들었다가 놨다.
학교는 반 년만이다. 처음으로 했던 휴학은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끝이 났다. 애초에 휴학을 한 이유도 같잖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김윤석: 연수야 어떻게 지내 너 이번에 복학한다고 들었다
오진호: 연수 서울이야?
강범종: 연수야ㅎ 잘지네?
카톡 채팅방 리스트에 무수히 떠 있는 빨간 점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복학해서 얌전히 학교나 다니려고 했더니 발 없는 말이 천 리나 가 있네. 참 관심들도 많다. 난 너네한테 관심 일 그램도 없는데. 이렇게 쉬운 걸 전에는 몰랐지. 이렇게, 갓난애 손목 비틀듯 간단한 건 줄 알았으면 그렇게 목 매지도 않았을 텐데.
사람의 내면이 중요하다는 말에는 큰 함정이 있다. 바로 외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외면만큼 중요한 게 내면이라는 소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까지 근근히 느껴왔던 것을 대학에 들어오고 절감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지야 학생이 공부만 잘하면 되지, 다른 건 다 대학 들어가고 나서 하면 돼! 하는 어른들의 말씀을 지침 삼아 핑계 댈 수 있었지. 대학 들어가고 나니 도망갈 곳이 없었다.
대학 들어가면 다 빠진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이며 한 점 틀리지 않은 진실이었다. 순진하고 멍청했던 나는 그 소릴 곧이곧대로 믿었다가 피를 봤다. 대학 들어가면 웬만하면 다 빠지긴 하지. 그런데 그게 성장기 아이의 키가 크면서 살이 쪽 빠지듯 저절로 빠지는 게 아니었다. 다들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빼는 거였다. 그걸 나만 몰랐다.
물건을 살 때도 성분표보다 디자인을 먼저 보게 되는 것처럼 내면이 어떻건 간에 외면부터 보게 되는 것이 순리였다. 빵도 갈라 봐야 속에 팥이 들었는지 크림이 들었는지 아는데 하물며 사람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외면은 방치시키다시피 하고 내면만 갈고닦는 데 주력했던 나는 그 죄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권재민: 누나 이번에 복학한다면서?
권재민: 개강 전에 함 보자 내가 쏠게ㅋㅋ
대학에 들어간 나는 어떤 집단에서든 철저하게 배제 당했다. 학과 내에서든 동아리에서든 나는 투명 인간이었다. 나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언제나 누구 친구, 누구 동기, 누구 후배였다. 남자 선배가 개인적으로 밥을 사는 일은 내게는 없는 일이었다. 살을 빼고났더니 이제는 후배까지 밥을 사 주겠단다. 응한 적은 없다. 비위 상해서 어디 먹겠나 싶었다.
새내기 시절 누구나 한 번씩 겪는 일을 나는 한 번도 겪지 못했다. 훈훈해서 관심 있던 동기가 썸남이 되는 일도, 학과에서 인기 많은 오빠와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 받는 일도, 캠퍼스를 걷다가 선배들이 저 멀리서도 아는 체를 해오는 일조차도. 내게는 없는 일이었다. 항상 내 곁에 있던 동기들의 일상일 뿐이었다.
“후우…….”
숨이 무겁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 생각을 그만 두고 몸을 일으켰다. 생각을 하다 보면 끝없이 파고 들어간다. 떠올려서 좋을 게 없는 것들을 떠올린다. 이럴 땐 뇌를 멈추고 몸을 움직이는 게 낫다. 창 밖을 보니 날이 좋아 보인다. 오늘은 꼭 거울을 사고 먹을 만한 것들을 사 와야지.
*
“파프리카가 두 개에 천원! 바나나가 한 송이에 이천원!”
점심 즈음이라 그런지 마트가 꽤 붐볐다. 목청이 터져라 소리 지르는 청년을 뒤로 한 채 사야 할 것을 카트에 부지런하게 담았다. 바나나, 닭가슴살, 돼지 뒷다리살, 양상추, 양배추, 사과, 고구마. 다이어트를 시작하고서는 장바구니가 단조로워졌다.
“고기 좋아하나 봐?”
“네? 아, 네.”
카드를 든 채 멍 때리고 있다가 갑자기 캐셔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와 깜짝 놀랐다. 대답부터 하고 계산대 위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고기가 좀 많은 것 같기도 하다.
“고기 귀신이에요.”
어른이 말을 거시는데 대답 한 번 달랑 하기 뭐해서 웃으며 덧붙였다. 사실은 고기 별로 안 좋아했었다. 면, 떡, 밥, 빵 같은 거에 환장했었지. 지금도 삼겹살, 목살 같은 걸 좋아하는 거지 결코 닭가슴살을 좋아서 먹는 게 아니다. 하지만 살을 빼려면, 빼고 나서 몸매를 유지하려면 지방이 적은 양질의 단백질을 일정량 이상 계속 먹어줘야 해서 늘 달고 살게 됐다.
“근데 왜 이렇게 날씬해?”
“네?”
“고기를 이렇게 먹는데 왜 몸매가 좋으냐구.”
별 생각 없이 한 소린데 뜻밖의 말이 돌아와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살을 뺀 이후로 몸매 칭찬은 항상 들었지만 이런 데서 이렇게 뜬금 없이 듣는 건 처음이었다.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면서 타박하는 아주머니의 말에 적잖이 당황한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얼른 봉투에 물건을 집어넣었다.
“아, 아닌데……. 감사합니다.”
“아니긴 뭘 아니야.”
손사래를 치면서 얼른 마트를 빠져나왔다. 인사를 몇 번이나 꾸벅대고 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농담을 던지는 아주머니 덕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민망함은 둘째 치고 참, 생경했다. 뚱뚱했던 시절에는 마트에 엄마 심부름만 가도 지나가던 아줌마나 할머니들이 그만 좀 먹어, 맨날 이렇게 먹으니까 살이 찌지 하고 난데없이 구박하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불과 일이년 사이에 정확히 정반대의 이야기를 듣는다. 세상이 목을 조르고 흔들어 대기에 목숨을 걸고 나를 바꿔 놨더니 포상이라도 주듯이 세상 또한 딴판으로 바뀌었다.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살이 쪄 있을 땐 욕도 걱정도 욕인지 걱정인지 모를 것도 곱배기로 받았다. 하나하나 다 다른 사람들인데 하나같이 입을 모아 살을 빼라고 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했다. 걸핏하면 삶을 통째로 부정 당했다. 하지만 그중 아무도 내가 왜 살이 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 없었다. 덮어 놓고 많이 먹고 안 움직여서 그렇다고 했다.
거울은 사각 거울을 샀다. 원형은 얼굴이 좀 부해 보였다. 젤리와 초콜릿이 진열된 매대 앞에서 서성이다 발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