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드, 드디어…… 찾았구나.”
파르르 떨리는 힘없는 음성. 얼마나 험한 생을 살아왔음인지 얼굴 가득한 주름과 흰 머리가 노인의 지나온 세월을 말해 주는 듯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손을 들어 노인은 눈앞의 책자를 집어 들었다.
무결진해(無缺眞解)
표지에 거칠게 휘갈겨 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노인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절세의 무공을 구하기 위해 지난 오십여 년간 얼마나 많은 곳을 찾아 헤매었던가.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무결진해의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놀라웠다.
실로 놀라운 무공이었다.
노인은 단 한 글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한 장, 한 장을 신중하게 넘겨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노인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 번 터져 나온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삼 년…… 아니, 일 년만 더 일찍 찾았더라면…….”
노인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힘없이 내려앉은 어깨가 심하게 떨리며 기침을 토해 냈다.
“쿠, 쿨럭! 쿨럭!”
입을 가린 손이 붉게 물들어 갔다.
토혈(吐血).
노인의 토혈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앞섶을 피로 흠뻑 적신 후에야 간신히 기침이 멎었다. 하지만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명이 다했음인가.
억울했다.
이제야 간신히 절세의 무공을 찾았음에도 그것을 익힐 시간이 없었다. 일생을 다해 무학을 추구해 왔건만 남은 것은 결국 병든 몸뿐이었다.
“흐으, 흐하하하.”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것은 웃음이런가, 울음이런가.
자신은 익힐 수 없었던 가전무공을 대신할 신공절학을 구하고자, 약관의 나이에 천하를 주유한 지 벌써 반백여 년.
그동안 그는 싸움에 미친 투귀(鬪鬼)였다.
그동안 그는 무학에 미친 무귀(武鬼)였다.
그렇게 미친 듯 싸우고, 또 싸웠다. 쓰러트린 상대에게서 빼앗은 무공을 마구잡이로 익혔다.
오직 강해지는 것만이, 누구도 자신의 앞에 나설 수 없게 강해지는 것만이 자신을 멸시했던 가문에 복수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것만이 자신에게 드리워진 가문의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 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무학(武學)은 그의 몸을, 그의 생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드디어 신공을 얻었건만 이제 그의 생은 마지막을 고하고 있음이니.
무결진해.
일 년만이라도 일찍 이것을 접했다면 어찌 방책이라도 있었을 것을.
노인은 자신의 눈물과 피로 흠뻑 젖은 무결진해를 바라보았다.
“이제…… 쓸모가 없구나…….”
나직이 읊조리며 노인은 무결진해를 잡은 손에 남은 힘을 더했다.
파직!
순간 불꽃이 튀며 순식간에 무결진해를 재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의 손안에 남은 하얀 재를 바라보며 노인은 힘겹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손안의 재를 휘감아 갔다.
남은 것은 허무함뿐이었다.
내 인생도 저와 같음이런가…….
허망한 눈빛으로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 가는 무결진해를 바라보며 노인은 그대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숨을 토해 내며 그렇게 싸늘하게 식어 갔다.
하북의 팽가, 가주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되 가문에 버림받고 그 이름을 버린 자.
칼에 미친 귀신, 도귀(刀鬼).
세상이 그리 부른 사내의 마지막이었다.
一章. 시간을 거스르다
이상하다.
나는…… 분명히 죽지 않았던가?
혼몽한 의식을 자각했다. 무슨 기현상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뭐야? 고작 이 정도야, 형? 쳇! 약골 같으니라고.”
아득한 목소리였다.
순간, 온몸으로 통증이 갑작스레 밀려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아직 눈앞은 어지럽다.
흔들리는 몸을 억지로 가누며, 앞을 보려 노력했다. 조금은 작아 보이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냥 쓰러져!”
빡!
간신히 돌아왔던 의식이 엄습하는 격통과 함께 다시 멀어졌다. 흐려지는 의식 속으로 투덜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귀에 익은 앳된 목소리였다.
“쳇! 재미없게스리…….”
천천히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리며 팽현수(彭弦秀)는 힘겹게 눈을 떴다.
“이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게냐, 나약한 녀석…….”
묵직한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크윽!”
팽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렸다.
고통을 참으며 침상에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점점 맑아지는 시야에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 사내의 모습이 비쳤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못난 놈……. 내일부터 외원(外院)에서 머물거라. 준비시켜 놓으마. 그리고…….”
익숙한 상황이었다.
채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임에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팽현수는 알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팽현수는 기억 속의 대답을 끄집어냈다.
“알겠…… 습니다.”
“네가 잘 처신할 거라 믿겠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어투.
중년인은 팽현수의 대답을 확인함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묵묵히 멀어지는 중년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팽현수의 입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버지…….”
도대체 무슨 일인가.
팽현수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에 빠져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기억하고 있는 늙은 모습이 아닌 한창 때의 젊음을 지닌 얼굴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아직도 분명히 떠오르는 이 죽음의 순간의 기억은 뭐란 말인가.
한낱 꿈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뚜렷한 기억. 도귀라 불리던 반백여 년의 기억이 너무도 뚜렷이 남아 있었다.
저도 모르게 한쪽 손이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팠다.
꿈이라 생각했건만 꿈이 아니었다. 혼란한 머릿속이 진정되지 않았다.
“으윽!”
문득 잊고 있던 통증이 전신을 자극해 왔다. 생각을 더 이상 이을 수 없을 정도의 통증에 팽현수는 신음성을 토해 내며 그대로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때였다. 팽현수의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낡은 종이의 거친 느낌.
팽현수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 정도의 타다 남은 작은 종잇조각이었다.
반쯤 검게 타들어 갔지만 팽현수는 종이에 쓰인 한 글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결(缺)
그것을 알아본 순간, 팽현수는 통증을 잊었다.
‘설마……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
하북 팽가.
칠파일방을 제외한 정도 무림의 주축, 사대무가의 일원으로 패도적인 강함을 추구하는 도(刀)의 명문이었다.
하나 알려진 위명(威名)과는 달리 팽가의 위세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이백여 년 전의 절대 강자, 절혼도제(絶魂刀帝) 팽무혁(彭武奕)의 진전을 제대로 이은 후손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팽가의 현 가주, 팽문협(彭聞俠)의 가장 큰 고민이 바로 그것이었다.
강대한 문파들 사이에서 입지가 약해져 가는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자신은 도달하지 못한 절대의 경지에 닿을 수 있는 후손을 기르는 것.
그것을 위해 팽문협은 필사적으로 영약을 끌어모으고, 신중히 선별한 여인으로부터 후사를 얻었다.
장남 팽현수.
태어남과 동시에 벌모세수(伐毛洗髓)로 탁기를 깨끗이 씻어 내고 수많은 영약을 복용시켜 무공을 익히기 위한 초석을 다졌다.
그리고 걸음마를 배워야 할 세 살 무렵부터 팽가의 독문 심법인 혼원벽력심공(混元霹靂心功)을 익히게 했다.
처음의 성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팽현수는 혼원벽력심공은 물론 방계들이 주로 익히는 건곤심법(乾坤心法), 건곤연환도(乾坤連環刀), 미허신보(彌虛神步)를 비롯해 직계에만 전해지는 오호도(五虎刀), 어기신풍(御氣神風), 벽력신장(霹靂神掌)에 이르기까지 모든 무공의 구결을 한 번 읽고 모두 외워 버린 것이다.
팽현수의 총명함에 가문 어른들의 기대는 더욱 커져 갔다.
그러나 오 년의 세월이 흐른 후, 팽문협은 좌절했다. 팽현수의 성취가 고작 일 성에도 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좌절한 팽문협의 눈에 들어온 것이 다른 여인에게서 얻은 둘째 아들, 팽현성(彭弦聲)이었다.
팽현수와는 달리 기본적인 벌모세수조차 제대로 받지 않은 팽현성. 그의 성취가 오히려 더 뛰어났던 것이다.
천부적인 무재(武才).
팽현성의 자질은 보통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팽문협의 관심은 팽현성에게로 향했고, 팽현수는 조금씩 잊혀 갔다.
가문의 장남임에도 팽현수의 존재는 일부 방계(傍系)를 제외하고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그렇게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쪽입니다, 도련님.”
누렇게 바랜 마의를 입은 중년의 사내가 눈앞의 허름한 초옥(草屋)을 가리켰다.
가만히 그 뒤를 따르던 팽현수는 걸음을 멈추고 초옥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버려 둔 것인지 마른 풀을 얹은 지붕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었고, 두꺼운 거미줄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것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팽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곳이 내가 지내야 할 곳이더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가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더군요. 시끄럽지 않게,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내시라고.”
아비 팽문협의 말을 전하는 중년 사내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멸시(蔑視)가 담겨 있었다.
고작 팽가의 가솔, 그것도 하인에 불과한 자가 가주의 장남인 팽현수를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하긴…….’
팽현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허물어져 가는 초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이제는 흔적만 남은 울타리의 문을 살짝 건드리자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질러 댔다. 두껍게 쌓인 먼지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후우, 그래도 조금만 수리하면 지낼 만하겠구나.”
“그럼 소인은 가 보겠습니다, 도련님.”
낡은 방 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리는 팽현수의 귓가에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중년 사내는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후였다.
하인 하나 없이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신세. 자신의 신분에 비해 너무도 터무니없는 대우였지만 팽현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미 오랜 기억 속에서 한 번 겪은 일인 탓이었다.
처음 팽무협에게 버림받았을 때 그를 얼마나 원망했던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혼자가 될 수 있어서 고마울 뿐이었다.
팽가의 방계들이 모여 사는 외원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팽현수의 거처.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고 힘을 기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팽현수는 호기롭게 숨을 토해 내며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