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무결도왕
작가 : 천성민
작품등록일 : 201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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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화
작성일 : 16-07-13     조회 : 585     추천 : 0     분량 : 6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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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가주전(家主殿) 부근을 산책 중이던 팽문협은 자신의 앞에 선 수석 장로, 팽도환을 바라보았다.

 팽도환은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수를 외원으로 내치셨다 들었소, 가주.”

 “그렇습니다만…….”

 “어째서 그러신 게요?”

 따지듯 물어 오는 팽도환의 목소리. 하지만 팽문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앞으로의 가문을 위해섭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비록 능력이 모자란다 하나 현수는 가문의 장손이오! 그런 아이를 어찌…….”

 팽도환의 탄식에 팽문협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현수는 가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다른 무가들의 무시를 받고 사실 셈입니까? 긴 세월이었습니다. 그동안의 멸시를 잊으셨단 말입니까?”

 “그, 그런…….”

 팽문협의 윽박지름에 팽도환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팽도환을 남겨 둔 채 팽문협은 다시 걸음을 옮겨 가기 시작했다.

 “제 앞에서 다시는 현수의 얘기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장로님.”

 싸늘한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 팽문협의 뒤를 바라보며 팽도환은 나직한 탄식을 흘렸다.

 “허어, 앞으로 현수를 어이 해야 할꼬…….”

 

 ***

 

 죽음을 겪고 과거로 돌아온 지 이틀.

 살 집을 정리한 팽현수는 작은 초옥에 앉아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새로이 얻은 삶의 기회.

 이것을 헛되이 낭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의 삶을 반추함으로써 앞으로의 길을 생각해야 했다.

 눈을 감은 팽현수의 머릿속으로 이전의 생이 빠르게 스쳐 지나쳤다.

 약관의 나이에 가문을 뛰쳐나온 후 뒤이어진 낭인의 삶.

 도귀라는 별호(別號)를 얻었지만 그것은 자신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수많은 격전의 현장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것, 단지 그것 때문이었다.

 무인으로서 비참하기만 했던 낭인의 삶.

 다시 그런 인생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했다. 이미 가문에서는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전의 생과 동일한 상황이다. 하나 지금은 달랐다. 비참했던 이전 생의 기억이 있고, 무결진해가 있다.

 이전과는 다르다.

 아니 달라지게 만들 것이다.

 누구보다 강해져 자신을 얽매고 있는 가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것. 가문을 위함이 아닌 자신만의, 스스로를 위한 길을 만들어 갈 것이다.

 굳은 결심을 하며 팽현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후웁! 훕!”

 짧은 숨을 토해 내며 팽현수는 손안의 도(刀)를 좌우로 내그었다.

 팽가의 가전도법(家傳刀法) 오호도(五虎刀)의 일수, 호조참공(虎爪斬空)이었다.

 원래 상대를 압도할 정도의 강맹한 기운을 실어 좌우로 베어 버리는 오호도 특유의 웅혼(雄渾)함을 잘 살린 초식이다.

 하나 팽현수의 손에서 펼쳐지는 것은 웅혼함은커녕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힘껏 곧게 좌우로 뻗어 나가야 하는 도세(刀勢)는 삐뚤빼뚤했고, 전혀 기운이 실려 있지 않았다.

 뒤이어지는 초식 와호출림(臥虎出林)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오호도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엉성한 도세. 무예를 전혀 모르는 아이가 막대기를 휘두르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후우…….”

 한참 동안을 그렇게 엉성한 오호도를 펼치던 팽현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도를 갈무리했다.

 심장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통증.

 오른손으로 도를 휘두를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 탓에 팽현수는 채 이각도 되지 않는 시간만 도를 휘두를 수 있었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초옥의 그늘로 발걸음을 옮긴 팽현수는 이마의 땀을 닦아 내며 조금 떨어진 곳의 커다란 나무를 쳐다보았다.

 바람도 불지 않고 새도 날아오르지 않았음에도 나뭇가지가 눈에 띌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무에 다가가 흔들리는 나뭇가지 근처를 자세히 살피던 팽현수의 눈에 거의 지워진 발자국이 보였다.

 “역시나……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었다는 소린가?”

 분명 동생인 팽현성의 어미, 사아란(厙阿蘭)이 보낸 자이리라. 항상 장남인 자신을 견제하던 그녀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그녀의 뜻대로 이용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남들은 가지지 않는 과거의 기억.

 그것은 앞으로 팽현수에게 가장 큰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내 팽현수는 몸을 일으켜 허리춤의 도를 뽑아 들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왼손에 도를 움켜잡은 팽현수는 천천히 도를 뻗어 냈다. 엉성하기 그지없던 전과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움직임이었다.

 원래 팽현수는 왼손잡이였다. 그러나 좌수의 오호도는 가문을 어지럽힌다는 전승과 왼손잡이는 불길함의 상징이라는 것 때문에 억지로 오른손을 써야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의 문제를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그것에 맞춰 무공을 변형시킬 수 있는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신공, 무결진해.

 너무도 엄청난 신공절학이었지만 지금의 팽현수로서는 익힐 수 없었다. 아니, 깨달을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아무런 바탕이 없는 지금의 상황으로선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는 스스로 힘을 길러야만 했다. 그동안 견제 받고 무시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버텨 내는 것은 팽현수의 몫.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강대한 힘을 얻어 누구보다 당당해지리라.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팽현수는 허공으로 도를 흩뿌렸다.

 

 ***

 

 팽가 내원의 중심, 가주전 근처의 난화각(蘭花閣)의 뜰을 화려한 차림의 중년 여인이 거닐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사아란.

 가주 팽문협의 둘째 부인이자 팽가의 실질적인 소가주, 팽현성의 어머니였다. 십 여 년 전 팽현수의 어머니 정수련(鄭垂蓮)이 병으로 죽은 이후 줄곧 팽가의 안주인을 자처하고 있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중년의 나이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혹할 정도로 그녀의 미모는 출중했다.

 몸매 또한 젊은 여인에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눈초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그녀의 분위기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몸종 하나를 대동한 채, 붉게 물든 해질녘의 뜰을 거닐던 그녀는 한쪽 구석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잠시만 혼자 있고 싶구나. 넌 가서 차나 좀 준비해다오.”

 “예, 마님.”

 대답과 함께 몸종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아란은 인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와라, 사영(沙影).”

 사사삭!

 나뭇가지의 낮은 스침과 동시에 흑의 무복을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복면을 하고 있는 사내는 그대로 사아란의 앞에 부복했다.

 “그래, 그 아이는 어떻더냐?”

 “그동안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주 형편없는 오호도를 선보이더군요.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사영이라 불린 사내의 말에 사아란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 쉽게 볼 일이 아니다. 그 아이는 정수련, 그 계집의 아들이니……. 성이가 좀 더 인정받기 전까진 경계해야 할 것이야. 사영, 네가 좀 더 그 아이를 지켜 보거라.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보고하도록 하고.”

 “존명(尊命)!”

 들려온 대답과 동시에 사영은 사아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가 부복해 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사아란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수련……. 네년은 죽은 다음에도 내 머릴 아프게 하는구나. 어디 네 자식이 어떻게 되는지 저승에서나마 잘 지켜보거라.”

 아름다운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며, 표독스러운 말을 토해 냈다. 마치 흉신악살과도 같은 사아란의 모습에 나뭇가지마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어인 일로 이런 시간에 산책을 다 하시는 거요, 부인?”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사아란은 재빨리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뒷짐을 진 채 느린 걸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팽문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 잠시 바람이나 쐴까 하고 나왔을 뿐이랍니다, 상공. 호홋! 성이는 요즘 어떤가요?”

 “허헛! 생각보다 성취가 뛰어나오. 벌써 혼원벽력심공의 성취가 사 성에 달한다오. 역시 타고난 무재는 달라도 다르더구려.”

 팽문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차남 팽현성의 나이, 열셋. 혼원벽력심공에 입문한 지 고작 오 년 만에 이룬 성과라 더욱 놀라울 뿐이었다.

 십 년 넘게 수련을 하고도 고작 일 성 정도밖에 성취를 이루지 못한 팽현수를 생각하면 그 놀라움은 더욱 컸다.

 “호호홋! 상공께서 그리 기뻐하시니 저도 기쁘답니다. 그나저나 현수, 그 아이는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상공.”

 순간 팽문협의 입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 아이 얘긴 다시는 입에 담지 마시오! 알겠소?”

 “괜히 제가 심기를 어지럽혔나 보군요.”

 “크험! 아니오. 내가 괜히 언성을 높였구려. 미안하오, 부인. 바람이 찬데 그만 들어가시구려.”

 팽문협은 헛기침을 토해 내며 다시 왔던 길로 걸음을 옮겨 갔다.

 멀어져 가는 팽문협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아란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고 있었다.

 

 ***

 

 스르륵!

 작은 소리와 함께 초옥 근처에 묶어 둔 은사(銀絲)가 풀렸다. 팽현수의 시선이 초옥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로 향했다.

 주위에서 초옥을 감시할 수 있는 유일한 곳.

 팽현수는 감시자가 드나들 수 있는 진입로와 퇴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은사를 묶어 두었다.

 일정한 무게 이상의 충격이 가해질 경우, 곧바로 매듭이 풀려 감시자의 등장을 금세 확인할 수 있는 장치였다.

 매일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수련을 위해 밖으로 나올 때면 항상 감시자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그 탓에 죽음에서 새로이 깨어난 지 두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제대로 된 수련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지켜보고 있을 참이지?”

 팽현수는 주위를 둘러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동안의 흔적으로 보아 감시자는 한 사람뿐이었지만 제대로 수련을 하지 못하는 팽현수로서는 불평이 나올 뿐이었다.

 팽현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형편없는 오호도의 도형을 반복했다. 자신을 견제하는 사아란의 눈길을 떼어 내기 위해서였다.

 하나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감시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발전이 없는 팽현수의 모습에 경계심이 느슨해질 법도 하건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도무지 무결진해를 수련할 시간이 날 것 같지 않았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가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감시의 눈길을 피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내원을 다녀와야 했다.

 팽현수는 그대로 내지른 도를 거둬들이고는 초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오늘은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땀으로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은 팽현수는 곧장 내원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이 향한 곳은 아버지, 팽문협이 머무르는 가주전이었다.

 “아버지, 소자 팽현수, 문안 인사 드리옵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

 팽현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 긴히 드릴 말이 있습니다.”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팽현수는 가만히 팽문협의 방 앞에서 기다렸다.

 드르륵!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문이 열렸다.

 문고리를 잡고 있는 팽문협은 언짢은 표정으로 팽현수를 바라보았다.

 “내 함부로 찾아오지 말라지 않았더냐! 그래, 무슨 급한 일 때문에 온 게냐!”

 “성이에 대한 것입니다, 아버지.”

 “무슨 소릴 하려는 거냐?”

 순간 팽문협의 표정이 변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남이 들어 봤자 좋을 게 없으니 말입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팽현수를 바라보던 팽문협은 말없이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르는 팽현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팽문협의 방은 가주의 처소라고 하기에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작은 옷장과 침상, 그리고 차를 마시기 위한 탁자 하나가 전부였다.

 마침 차를 마시려던 참이었던 듯 탁자 위의 작은 주전자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의자에 앉은 팽문협은 탁자 위에 놓인 찻잔에 물을 따랐다.

 미리 넣어 둔 찻잎이 우러나며 구수한 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팽문협은 우러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난 후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동안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치 못한 불초 소자, 외가(外家)로 갈까 합니다.”

 팽현수는 최대한 유약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팽문협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외가로 가겠다……. 내가 외원에서 지내라 한 것이 그리 서운하더냐?”

 팽문협의 눈길에 담긴 노기(怒氣)를 읽은 팽현수는 주눅 든 듯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그저 제 능력이 모자람을 탓해야지요.”

 “네 뜻은 잘 알겠으나 허락할 수는 없다. 그런데…… 성이에 대한 얘기라 하지 않았더냐?”

 예상대로 팽문협은 허락하지 않았다.

 하긴 어찌 보면 집안의 치부랄 수도 있는 자신이다.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팽현수의 노림수는 그것이 아니었다.

 “물론 성이와 관계있는 얘깁니다. 나중에 성이가 가문을 이끌게 되면 저란 존재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제가 외가로 가게 되면 자연스레 성이에게 모든 것이 집중될 수 있을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팽문협은 앞으로의 팽가를 차남인 팽현성에게 맡기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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