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장남 팽현수의 존재가 문제였다. 비록 능력이 많이 부족하다고는 하나, 장남이라는 사실은 그것을 어느 정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앞뒤가 꽉 막힌 가문의 장로들이라면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팽현수를 지지할 지도 몰랐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그저 가문의 부흥에 도움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의혹 어린 팽문협의 질문에 팽현수는 담담하게 대응했다. 팽문협은 한참동안 아무런 말없이 팽현수의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런 욕심도,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
태어나면서부터 오랜 시간을 지켜봐 왔지만 지금의 팽현수는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마치 인생을 다 산 노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무심한 눈길에서는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너무도 낯선 팽현수의 모습에 의아함을 감추며 팽문협은 입을 열었다.
“정말 그 이상의 아무런 뜻도 없는 것이냐?”
팽문협은 목소리에 약간의 공력을 실었다.
순간 팽현수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크윽!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전신을 짓누르는 팽문협의 내공에 팽현수는 낮은 신음을 토해 냈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다.
팽현수는 최대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팽문협은 그대로 공력을 거둬들였다. 지금의 팽현수는 자신이 알고 있는 평소의 모습과 차이가 없었다.
타고난 능력이 모자란 탓에,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항상 눈치를 보던 장남의 모습.
“불가(不可)하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은 꺼내지 말거라. 알겠느냐?”
“어째서……?”
“비록 모자람이 있다 하나 넌 내 아들이다. 내 자식을 어찌 다른 곳에 맡기겠느냐.”
듣기에는 팽현수를 위해서 하는 말인 듯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저 자신의 치부를 외부에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일 뿐.
그것을 알면서도 팽현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그럼 소자, 물러가겠습니다.”
팽문협의 단호한 거절에 팽현수는 미련 없이 일어났다.
물론 겉보기에는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듯 보이게 말이다.
“앞으로 내게 할 말이 있으면 이렇게 불쑥 찾아오지 말고 총관에게 미리 일러두거라. 내가 따로 부를 테니…….”
인사를 마치고 막 밖으로 나가려던 팽현수의 귓가에 팽문협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는 찾아오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팽현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 습니다.”
가주전을 나선 팽현수는 곧바로 난화각으로 향했다. 좀 더 확실히 해 두기 위해서였다.
사아란의 방 앞에 걸음을 멈춘 팽현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르륵!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 나오던 사아란과 눈이 마주쳤다.
“네가 여기까지 어쩐 일이냐?”
사아란의 날카로운 눈빛이 팽현수에게 닿았다. 팽현수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 의논할 것이 있어서 왔다가 인사나 드릴 겸 잠시 들렀습니다, 어머니. 무고하신지요?”
“그럭저럭. 그런데 상공과 의논할 것이 있다고?”
“네, 어머니. 실은 제가 외가에 가서 지낼까 하고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외가에? 어째서냐?”
“성이가 가문을 이어받는 데 혹여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더군요.”
팽현수의 말에 사아란은 팽현수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팽현수의 표정은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느 누가 보기에도 진심을 담아 입을 여는 것 같았다.
조금씩이지만 사아란의 날카로운 눈빛이 점점 누그러지고 있었다.
“상공께서는 뭐라시더냐?”
“아니 된다 하셨습니다.”
“그래…… 그러시겠지. 어찌 됐건 너도 팽가의 직계이니……. 그래서 앞으로 어쩔 셈이냐?”
“최대한 조용히 지내야겠지요. 아버지께서 그걸 원하시니 말입니다. 그럼 이제 가 보겠습니다, 어머니.”
말을 마친 팽현수는 사아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팽현수를 바라보며 만족한 미소를 짓은 사아란이었다.
二章. 신권 팽문기(神拳 彭聞技)
팽현수가 내원에 다녀온 지 채 열흘이 지나지 않아 감시의 눈길은 사라졌다.
자신이 가문의 뒤를 잇는 것에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피력한 덕분이었다.
이로써 당분간은 스스로의 힘을 기를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모든 무예의 기본은 내공.
하지만 심법의 수련으로는 내공을 쌓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심법을 운용해 보았지만 이전의 생과 마찬가지로 심법으로 인해 받아들인 자연의 진기는 극소량을 제외하고는 흩어지기만 했다.
팽현수는 금세 심법 수련을 포기하고 도를 뽑아 들었다.
오호도를 좌수(左手)에 알맞게 변형시키는 것.
그것이 지금의 팽현수가 하려는 것이었다. 반 백 년의 낭인 생활의 경험과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무공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좌수로 도를 펼칠 때면 자연스럽게 기운이 흘러 내공이 조금씩 쌓여 갔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낭인 시절, 수많은 격전을 겪은 후에는 항상 조금씩 강해짐을 느낀 팽현수였다.
좌공(坐功)보다 동공(動功)으로 인해 내공을 더욱 손쉽게 쌓을 수 있다는 것. 어째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심법의 수련만으로는 내공을 쌓을 수 없는 팽현수로서는 다행이랄 수 있는 일이다.
조금씩 강해져 가는 팽현수.
그러면서도 그는 머릿속에 항상 무결진해를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깨달음의 무공.
이제야 무인으로서 첫걸음을 떼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팽현수에게는 아직은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무결진해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좀 더 강해져야만 했다. 강해지기 위해 매일을 고된 수련의 나날로 보낸 팽현수였다.
그렇게 석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후아아…….”
왼손에 쥔 도를 허공에 내리그었다.
분명 오호도의 형을 취하고 있음에도 달랐다.
웅혼하고 패도적인 기세로 상대를 압박해 들어가는 일반적인 오호도와는 달리 팽현수의 손에서 펼쳐지는 것은 날카롭고 유연한 모습이었다.
파팟! 파파팟!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충분한 시간을 들인다면 원하는 만큼의 그릇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팽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도병(刀柄)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팽현수는 최대한 느린 속도로 오호도를 펼치기 시작했다.
팽현수의 도가 스물네 번째 초식인 혈호등비(血虎登飛)로 허공을 갈랐을 때였다.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좌수의 오호도라?”
***
“도대체 무슨 일인데 백부님께서 날 찾는 거지? 세가에는 다시는 안 돌아온다고 큰 소리치고 뛰쳐나갔건만……. 한 이십 년 만인가?”
중년 사내가 투덜거리며 어깨에 멘 봇짐을 고쳐 멨다.
얼마나 오랫동안 여행을 한 것인지 누렇게 변한 옷은 낡을 대로 낡았고, 신은 거의 닳아 발가락이 튀어 나올 듯했다.
하나 초라한 행색과는 달리 사내의 인상은 강인한, 전형적인 무인의 것이었다.
칠 척(七尺)의 장신에 커다란 덩치.
두꺼운 눈썹과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매서운 눈빛을 발하는 갈색 눈동자.
굳게 다문 두 입술에서 풍기는 준엄함.
그리고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되어 보임 직한 굵직한 주먹이 그가 권사(拳師)임을 말해 주었다.
“아차차! 그냥 이렇게 가다간 백부님께 경을 칠지도 모르겠는걸?”
사내는 주머니에서 작은 끈을 꺼내 산발한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고는 수염이 무성한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뭐, 그래도 별다를 게 없구만.”
드문드문 나무가 있는 돌산을 지나 사내의 걸음이 향한 곳은 팽가가 있는 곳이었다.
슈슉!
무언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더벅머리 중년 사내의 귓가에 들려왔다.
귀에 익은 소리.
그것은 날카로운 병장기를 휘두르는 소리였다.
‘이런 곳에서 누가 수련을?’
흥미가 동한 중년 사내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통 커다란 바위로 둘러싸인 작은 공터에서 도를 휘두르고 있는 열일곱, 열여덟은 되어 보이는 소년을 볼 수 있었다.
‘오호도?’
소년의 손에서는 사내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도법이 펼쳐졌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가 알고 있는 오호도의 특성과는 너무도 달라 보였다. 오히려 검법에나 어울릴 듯 유려함마저 느껴지는 소년의 도법.
다른 것은 특징만이 아니었다. 원래 우수(右手)로 펼치는 데 최적화된 오호도가 소년의 좌수를 통해 펼쳐지고 있었다.
‘형태가 조금 달라 보이는 건 저것 때문인가?’
사내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오호도의 새로운 모습을 본 탓이었다.
‘그런데 외원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서 수련이라니, 방계인가? 아니, 오호도는 직계에게만 전수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으음, 어찌된 일이지?’
하지만 사내의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새로운 형태의 오호도를 몸으로 경험하고픈 충동이 궁금증을 완전히 억눌렀던 것이다.
사내는 몸을 숨긴 바위에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호오? 좌수의 오호도라……. 재미있겠는걸?”
팽현수는 흠칫 놀라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핏 보기에 거지처럼 보이는 낡은 옷차림의 중년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뉘시오……?”
팽현수의 목소리가 호의적이지 않다.
외원이라고는 하나 팽가의 영역. 함부로 침입한 자에게 호의가 있을 리가 없다. 팽현수는 날카로운 눈으로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넌 누군데 이런 곳에 있는 게냐?”
대답 대신 날아든 사내의 질문.
하지만 팽현수는 대답 대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질문은 내가 먼저 했소만?”
여전히 경계의 눈빛을 풀지 않는 팽현수.
“훗! 그렇긴 하다만……. 어른에 대한 예의가 손톱만큼도 없는 녀석이로구나.”
말을 하는 사내로부터 느껴지는 강자의 분위기. 팽현수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반백여 년의 기억과 경험이 가져다준 육감.
자신은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함이 중년 사내에게서 느껴졌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다.
“이곳은 팽가의 영역이오. 함부로 침입한 외인(外人)이 할 말은 아닌 듯싶소만…….”
“외인이라……. 어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만, 아무리 그래도 어린 녀석이 건방지구나.”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팽현수는 도병을 꽉 움켜쥐었다. 손아귀가 식은땀으로 젖었다.
꿀꺽!
팽현수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순간 중년 사내가 한 걸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말로는 안 될 것 같구나, 꼬마야. 사내답게 일단 한판 붙자.”
히죽 미소 지으며 사내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왠지 사내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팽현수는 천천히 도를 고쳐 쥐었다.
후웅!
미처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사내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정권지르기.
팽현수는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다급히 뒷걸음질 쳤다.
“헛!”
하지만 사내의 주먹은 계속 팽현수의 뒤를 쫓았다.
뒤로 물러나기만 해서는 피할 수 없는 사내의 주먹. 팽현수는 까드득 이를 꽉 깨물며 도를 들어 올렸다.
피할 수 없다면 막을 수밖에…….
파캉!
가로막은 도에 사내의 주먹이 닿자 커다란 금속성과 함께 팽현수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사내의 주먹에는 내공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힘이었다.
팽현수는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아 바닥에 착지했다.
몸을 회전시킴으로써 어느 정도 충격을 완화시켰음에도 팽현수는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난 후에야 완전히 멈춰 설 수 있었다.
“훗! 그걸로 끝이 아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
팽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도를 뻗었다.
슈슈슉!
호조단참(虎爪斷斬).
빠른 속도로 허공을 세 번 베어 나가는 호랑이의 발톱과도 같은 날카로운 초식.
오호도의 열일곱 번째 초식으로 웅혼함이 아닌 극쾌(劇快)를 추구한 초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