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무결도왕
작가 : 천성민
작품등록일 : 201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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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화
작성일 : 16-07-13     조회 : 593     추천 : 0     분량 : 6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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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팽문협의 노한 음성.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날카로운 예기에 팽현수는 살짝 무릎을 꿇었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듯 숨이 막히며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팽현수에게 통증은 익숙한 일이었다.

 팽현수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려 할 때였다. 무릎을 꿇은 팽현수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목을 옥죄어 오던 기운이 사라졌다.

 “친아들에게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형님?”

 “이건 우리 가문의 문제. 문기, 네놈이 상관할 바 아니다!”

 “무슨 소립니까. 이 아인 형님의 아들이지만 제 조카이기도 합니다. 제가 끼어들 자격은 충분하다고 봅니다만.”

 노호성을 터트리는 팽문협과는 달리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팽문기.

 팽문협은 암암리에 공력을 실어 보냈지만 팽문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반탄력에 팽문협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이리도 격차가 컸단 말인가?’

 짐짓 놀란 마음을 숨긴 채, 팽문협은 팽현수에게 소리쳤다.

 “뭐 하는 게냐? 빨리 돌아가지 않고!”

 “아, 알겠습니다, 아버지.”

 다급히 밖으로 나서는 팽현수의 발걸음을 막은 것은 팽문기의 커다란 목소리였다.

 “잠깐! 현수는 형님의 큰아들 아닙니까? 근데 어찌 이리 박대하시는 겁니까?”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혹 저 아이보다 무예가 모자람 때문입니까?”

 팽문기는 땀을 닦고 있는 팽현성을 가리켰다. 확실히 나이에 비해 풍기는 기운이 남달랐다.

 “그렇다면 어쩔 테냐?”

 순간 팽문기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함없으시군요, 형님은…….”

 “기울어 가는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서다! 그것만큼 중요한 게 무에 있겠느냐!”

 팽문협의 외침에 팽문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가문이라는 것에 얽매여 형님은 스스로 한계를 긋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니 발전이 없음이 당연하지요.”

 “무어라?!”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일그러진 팽문협의 얼굴.

 지금으로선 도저히 말로 해결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후우, 좋습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군요.”

 “말이 통하지 않는 건 문기, 네 녀석도 마찬가지다. 네놈의 그 건방진 성격은 여전히 변함이 없구나!”

 “그렇군요. 그럼 어디 이렇게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저 두 아이들을 비무(比武) 시켜 보는 게. 제가 본 현수라면 형님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려 줄 겁니다.”

 자신을 가리키는 팽문기의 손길에 팽현수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무래도 팽문기는 자신이 좌수로 오호도를 수련하던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네 눈이 어떻게 됐나 보구나. 저 아이가 성이의 상대가 될 수 있을 거라 보느냐?”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일이지요. 내공을 배제한 초식만의 승부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을 향해 찡긋 한쪽 눈을 감아 보이는 팽문기의 모습에 팽현수는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좋다! 어디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마, 성아!”

 “네, 아버지!”

 “네 실력을 숙부에게 보여 드려라. 절대 방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알겠느냐?”

 “물론입니다.”

 자신감 넘치는 대답과 함께 자신의 도를 든 팽현성이 연무장의 한가운데에 섰다.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뭐 하는 게냐? 현수, 너도 내려오지 않고!”

 팽문협의 외침에 팽현수는 한숨을 내쉬며 연무장으로 나섰다.

 이젠 어쩔 수 없이 비무를 해야 했다. 그렇다고 쉽사리 자신의 비밀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

 ‘적당히 져 주는 수밖에…….’

 팽현수는 천천히 오른손으로 도병을 움켜쥐었다. 순간 팽문기로부터 전음(傳音)이 들려왔다.

 - 뭐 하는 게냐? 왜 좌수로 잡지 않는 거냐?

 대답 대신 팽현수는 팽문기를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 숨기겠다는 거냐? 하핫! 현수, 넌 역시 재미있는 녀석이로구나. 하하핫!

 귀가 아플 정도로 웃어 대는 팽문기의 전음에 팽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팽현수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귓전을 찔러 왔다.

 “훗! 또 당하고 싶어서 왔나 보지? 어디 지난번에 당한 데는 좀 괜찮아?”

 노골적인 비웃음을 담은 동생, 팽현성의 말. 하지만 팽현수는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쓸데없는 얘긴 그만하고 어서 시작하자, 성아.”

 천천히 도를 들어 올리며 팽현수가 오호도의 기수식을 취하자 갑작스레 팽현성이 달려들었다.

 “어디 얼마나 버틸지 두고 보자고, 형!”

 

 “무어라! 문기, 그 빌어먹을 놈이 왔다고? 지금 어디냐! 내 그놈을 당장!”

 팽가의 수석 장로, 팽도환(彭刀煥)은 노기(怒氣)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동시에 주위로 퍼져 나가는 맹렬한 기세에 그의 앞에 선 팽현일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무릎을 꿇었다.

 “아, 아마도 연무장에…….”

 “연무장이라고?!”

 눈을 부릅뜬 채 팽현일을 바라보는 팽도환은 마치 지옥의 악귀와도 같은 형상이었다.

 묶고 있던 끈이 풀려 허공을 너울거리는 긴 백발.

 흥분으로 붉게 충혈된 눈동자. 그리고 얼굴 가득한 주름.

 팽현일은 차마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빠직!

 순간 팽도환이 앉아 있던 의자의 손잡이가 그의 악력에 산산조각 났다. 흥분을 참지 못하고 몸을 벌떡 일으킨 팽도환은 그대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문기, 네 이노옴!”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시끄럽게 만든단 말이더냐. 내 최대한 조용히 다녀가라 했거늘…….’

 겉으로는 분노를 표하는 것과는 달리 심사가 복잡한 팽도환이었다.

 

 

 

 三章. 첫 번째 그릇을 깨다

 

 

 

 한 합, 고작 한 합이었다.

 커다란 금속성과 함께 높이 솟구친 도는 그대로 바닥에 깊이 꽂혔다.

 도를 잡고 있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팽현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떨리는 손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앞에서 팽현성은 귀찮아 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도를 거두었다.

 너무도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

 누가 보아도 무공의 격차가 큰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팽문기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도가 맞부딪치는 순간, 팽현수는 달려들어 오는 힘을 완전히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손에 든 도를 놓아 버렸다.

 굉장한 충격을 받은 듯 보였지만 아마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알겠느냐. 나는 틀리지 않았다.”

 한심하다는 듯 팽현수를 바라보며 팽문협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팽문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웃음기 가신 얼굴로 형인 팽문협을 흘깃 보았을 뿐. 마치 가면을 덮어쓴 것처럼 웃음을 지운 얼굴이 살벌했다.

 

 팽문기는 굳은 표정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팽현수에게 다가갔다.

 “어째서냐?”

 “무엇을……?”

 “어째서냐고 물었다. 내 눈이 삐었다고 말하려는 참이더냐?”

 다그치듯 공격적인 언사, 순간 팽문기는 멈칫했다. 고개를 든 팽현수의 눈을 본 것이다.

 팽현수의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어떤 분함이나 두려움도 없는, 그저 담담한 눈동자.

 그 눈을 본 순간, 팽문기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노옴! 팽문기!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네놈이!!”

 돌연 고막을 찢을 듯 쩌렁한 외침이 귓가에 날아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한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석 장로 팽도환.

 팽문기 자신에게 은밀히 전할 말이 있다고 전서를 보낸 장본인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최대한 은밀히 다녀가라 부탁했던 것이 머릿속에 떠오른 팽문기는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 이 멍청한 녀석아! 내 그리 신신당부했거늘!

 - 어쩌겠습니까? 다 성격 탓인 것을.

 날아든 팽도환의 전음에 태연스레 대꾸하는 팽문기. 하지만 금세 인상을 찌푸렸다.

 주위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몇 개의 강한 기운이 느껴진 탓이다.

 이미 몸을 빼기에는 너무 늦었다.

 팽문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팽현수를 향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귀찮게 됐구만. 너 이따 보자.”

 “…….”

 팽현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심히 일어나 어른들에게 꾸벅 허리 숙여 예를 취하고는 장내를 벗어났다. 지금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원 밖으로 나온 팽현수는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아스라한 어둠이 잦아들고 있었다.

 “한 합이라……. 뭐 이 정도면 이제 완전히 신경을 끊어 주려나?”

 팽현수는 가만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저릿함은커녕 아무런 통증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신권 숙부께는 미안한 짓을 했군, 크…….”

 조용히 타오르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던 팽문기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해 보면 그리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시 생을 사는 마당에 팽가라는 틀에 더 이상 얽매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제대로 가족이라 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같은 성씨를 쓰고 있다는 것뿐. 커다란 팽가에서 자신은 그저 멀리 떨어진 섬과도 같은 존재.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팽현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밝은 불빛에 내원의 그림자가 짙었다.

 십팔 년이라는 세월을 지내 왔건만 제집이라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쓰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팽현수의 뒷모습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팽문기는 한 손으로 연신 귓구멍을 후비적거렸다. 앞의 노인네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통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계속 딴청을 피우는 그를 향해 노호성이 날아들었다.

 “건방진 놈! 네놈이 감히 어찌 이리 무도하단 말이더냐! 대팽가가 네놈 마음대로 오가는 시전(市廛) 같아 보이더냐! 네놈을 쫓아낸 것은 다시는 오지 말라는 뜻이었단 걸 몰랐단 말이더냐!”

 “크흠!”

 자신을 몰아치는 장로들의 다그침에 팽문기는 헛기침을 흘렸다.

 “저, 저런 건방진!”

 “내 저놈을 당장……!”

 삐딱한 팽문기의 태도에 장로들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흥분했다. 하지만 팽문기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끝에 뭍은 귓밥을 튕겼다.

 “말은 똑바로 하십쇼. 숙부님들이 쫓아낸 게 아니라 제 발로, 스스로 나간 거잖습니까. 그리고 내 집에 내가 오겠다는데, 뭐가 그리 말이 많으신 겁니까.”

 팽문기의 말에 장로들은 분기탱천(憤氣撐天)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달려들지 않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팽문기를 뛰어넘는 무공을 가진 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비록 가문을 떠나긴 했지만 신권 팽문기의 위명은 무림의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설마 팽문기가 가문의 어른들에게 패악을 부리지는 않겠지만 괜히 먼저 나섰다 낭패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걱정 마십쇼.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원래 조용히 왔다 가려고 했었는데, 일이 시끄럽게 되었군요. 숙부님들께는 죄송합니다.”

 자신을 둘러싼 장로들에게 꾸벅 예를 취하고는 팽문기는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어딜 가려는 게냐?”

 “아무도 환영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가 봐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아님, 그냥 계속 눌러앉아 있을까요?”

 히죽 미소를 짓는 팽문기의 말에 팽도환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되었다. 그냥 가거라.”

 “수석 장로! 저 무도한 놈을 그냥 보내겠단 말이오!”

 “쉽게 보내서는 아니 되오!”

 팽도환의 말에 다른 장로들이 반발하며 소리쳤다.

 순간 팽도환의 날카로운 눈빛이 소리친 장로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럼 누가 강제로 문기 놈을 잡아 보시려오? 어디 한번 해보시구려.”

 핵심을 찌르는 팽도환의 말에 다른 장로들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하핫! 역시 백부님밖에 없다니까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당장 꺼져라. 빌어먹을 놈 같으니…….”

 - 근데 도대체 무슨 일로 절 부르신 겁니까?

 짧은 순간 팽도환에게 팽문기의 전음성이 날아들었다. 한숨을 내쉬던 팽도환은 빠른 속도로 대답했다.

 - 아까 본 그 아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 현수 녀석 말입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 실은 네가 그 아이를 데리고 나가 줬으면 한다. 가문에 남아 있어 봤자 그 아이에게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으니, 차라리 네 곁에 있는 게 현수에게도 훨씬 나을 테지.

 - 흐음, 그런 거였습니까? 안 그래도 그 녀석한테 흥미가 좀 생겼는데, 잘됐군요. 그럼 제 말에 장단이나 잘 좀 맞춰 주십쇼, 백부님.

 - 알겠다만…… 어쩌려는 거냐?

 - 그냥 두고 보십쇼.

 촌음의 시간 동안 대화를 끝낸 팽문기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입가에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팽문기는 입을 열었다.

 “아참! 부탁드릴 게 한 가지 있는데…….”

 “뭐냐?”

 “문협 형님의 큰아들, 현수 말입니다. 그놈 제가 좀 데리고 가도 될까요?”

 “불가!”

 “어차피 그냥 버려 두실 거잖습니까. 그러니 제가 데려가렵니다. 문협 형님께 그리 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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