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침과 동시에 팽문기는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 장로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저, 저 건방진 놈이!”
“어딜 감히 제멋대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다른 장로들과는 달리 팽도환은 사라져 가는 팽문기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제 떠나는 게 좋겠구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팽현수는 마음을 굳혔다.
조금 전의 비무에서 자신이 패했을 때,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 팽문협의 시선을 느꼈다.
그것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그저 길가에 떨어진 돌을 보는 듯 무심하기만 했다.
자신이 사라진다 한들 아무런 동요도, 걱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스스로 나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동생 팽현성 때문에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사아란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나마도 자신이 떠난다면 없어질 것이다.
비무를 통해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자괴감에 몰래 도망쳤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팽현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딱 이때쯤이었다.
지난 생에서도 세가의 무시와 견제를 감당치 못하고 도망치듯 팽가를 떠나지 않았던가.
그 후로 이어진 삼류 낭인의 길.
그리고 비참했던 최후.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니, 달라지게 만들 것이다.
굳은 결심을 하며 팽현수는 조용히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어디 있으려나?”
팽문기는 처음 팽현수를 만난 곳으로 향하며 기감을 확장시켰다.
그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뒤를 쫓는 기운이 느껴졌다. 걸음을 멈추자 그 기운은 순식간에 자신의 앞에 도달했다.
“문협 형님…….”
굳은 표정으로 팽문기의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그의 형, 팽문협이었다.
“무슨 생각이냐?”
“뭘 말입니까?”
팽문협의 질문에 뚱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팽문기.
순간 팽문협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다 들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 아이를 데려가려고 하는 게냐?”
“벌써 거기까지 소식이 갔습니까? 거참, 장로회에서 방금 전에 한 말인데 빠르기도 합니다.”
“다시 묻겠다. 왜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거냐?”
팽문기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팽문협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차피 버린 자식이나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형님께서 그리 생각하시는 가문을 위해서라도 차라리 없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제 말이 틀렸습니까?”
팽문기의 말에 팽문협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지만 사실 팽문협도 그런 생각을 해 왔던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묵묵히 서 있던 팽문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나 현수는 내 아들이다. 아무리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는 하나, 함부로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냥 솔직히 말씀하시죠? 현수를 외부에 보이기 싫으신 거 아닙니까. 가문의 수치라고 생각하시는 거겠죠?”
“함부로……,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팽문기의 빈정거림에 팽문협은 억지로 흥분을 억눌렀다.
“그러니까 자식 하나 아예 없는 셈 치십쇼, 형님. 어차피 그럴 생각이셨잖습니까. 내가 현수 녀석을 데려간다고 해서 가문에 누가 되는 일은 전혀 없을 겁니다. 둘째 녀석, 현성이라고 했던가요? 그 녀석이 가문을 이어받는 데는 현수 녀석이 없는 게 차라리 나을 겁니다.”
맞는 말이다.
팽문협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자신도 장남이라는 이유로 가문을 이어받지 않았던가.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고 소제는 가 보겠습니다.”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팽문기는 빠른 속도로 팽문협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커다란 봇짐을 등에 짊어진 팽현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가솔(家率)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최대한 인적이 드문 산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후우…….”
팽현수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냈다. 자신이 몰래 연무를 하던 공터를 지나 돌산을 한참이나 올라온 터라 제법 지쳐 있었다.
“어딜 그렇게 몰래 떠나는 게냐?”
순간 날아든 목소리에 팽현수는 흠칫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뭇가지만 남은 커다란 나무 밑동에서 커다란 인영이 천천히 팽현수에게 다가왔다.
팽문기였다.
“문기 숙부…….”
“여기로 올 줄 알았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세가를 빠져나올 길은 이쪽밖에 없거든. 뭐, 예전에 내가 빠져나갔던 길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런데…….”
히죽 미소를 짓고 있던 팽문기의 얼굴에서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이대로 도망쳐서 어쩔 셈이냐?”
“그건…… 숙부께서 상관하실 바 아닙니다.”
무심하게 돌아서는 팽현수.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팽문기가 아니었다.
“녀석, 무게 잡지 말고 생각해 둔 바가 없으면 나와 함께 가자꾸나.”
“거절합니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팽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간신히 자신을 향한 가문의 관심을 사라지게 만든 직후였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신권을 따라가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나 새어머니, 사아란을 자극할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놈! 그래도 고집은 있나 보구나.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내가 네 녀석에게 흥미가 생겼으니 말이다.”
“아니 됩니다, 숙부. 제가 숙부를 따라간다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혹, 네 동생 때문이냐? 그거라면 형님께 잘 말해 뒀으니 걱정할 것 없다.”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팽현수는 짧게 대답하고는 팽문기를 무시한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숙부이긴 하지만 외부인이나 마찬가지인 팽문기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 그저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놈!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딜 맘대로 자릴 피하려는 게냐! 몇 대 맞고 따라나설 테냐!”
“거절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팽문기의 억지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팽문기의 기세로 보아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며 팽현수가 입을 열었다.
“대체 원하시는 게 뭡니까, 숙부?”
그제 서야 만족스런 대답을 얻은 듯 팽문기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네가 숨기고 있는 실력 전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다. 비무에서 일부러 져 줬을 때부터 자신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던 팽문기였으니.
“훗! 결정했나 보구나. 따라오거라.”
팽현수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팽문기가 입을 열었다. 대답 대신 팽현수는 조용히 팽문기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걸음이 멈춘 곳은 작은 공터.
팽문기는 천천히 주먹을 들어 올렸다.
비무의 시작을 알리는 암묵적인 행동.
팽현수는 등의 봇짐을 내려놓으며 허리춤에 매인 도병을 왼손으로 굳게 움켜쥐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어쩔 수 없는 일. 어느 정도 실력을 보여 줘야만 팽문기는 만족할 것이다.
“후읍! 그럼 갑니다, 숙부!”
짧게 호흡을 뱉어 내며 팽현수는 크게 도를 휘둘렀다.
***
“뭐라! 신권이 그 아이를? 대체 왜!”
사영이 전해 준 말에 사아란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팽문기의 앞에서 한 비무에서 팽현성이 한 합 만에 가볍게 이겼다는 얘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신권 팽문기.
비록 가문에서 쫓겨난 인물이었지만 무림에서 그 이름은 아무도 경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강자가 어째서 팽현수 같은 모자란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팽문기를 등에 업은 팽현수가 나중에라도 다시 가문에 돌아오게 된다면 자신의 아들인 팽현성이 가문을 이어받는 데 엄청난 장애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아란은 까드득 이를 악물었다.
“사영, 넌 앞으로 계속 신권과 그 아이의 뒤를 쫓아라. 최대한 들키지 않게 은밀하게.”
“존명!”
대답과 동시에 사영은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방 안에 홀로 남은 사아란은 밀려오는 두통에 다시 이를 악물고는 중얼거렸다.
“이대로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정수련, 네년의 아들이 어떻게 되는지 저승에서 잘 지켜보거라.”
***
십 수 개의 권영(拳影)이 허공을 수놓았다.
비록 내공이 실려 있진 않았지만 그 하나하나에 실린 힘이 만만치 않다.
도저히 피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팽현수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파파파팍!
팽현수가 서 있던 자리에 주먹이 내리꽂히며 흙이 튀었다. 완전히 충격을 없애기 위해 몇 바퀴를 구르던 팽현수는 튕기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슈슉!
순간 눈앞을 덮쳐 오는 커다란 주먹.
팽현수는 혀를 차며 온 힘을 다해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동시에 좌수에 든 도를 힘껏 찔러 넣었다.
파카카칵!
마치 단단한 바위를 두드리듯 손을 타고 진동이 전해졌다. 하지만 팽현수는 이를 악물고는 도병을 더욱 거세게 움켜쥐었다.
“제법이로구나. 하나…….”
짐짓 감탄한 듯한 팽문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팽현수의 도가 그의 목덜미 어름에서 딱 멈춰 있었다. 아니, 도의 날을 팽문기가 맨손으로 잡고 있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낮게 소리치며 팽문기는 팽현수의 도를 튕기며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팽현수는 도가 튕겨져 나오는 힘을 이용해 멀찍이 몸을 날렸다.
“헉, 헉!”
비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팽현수의 호흡은 이미 거칠어져 있었다.
하나 이대로 끝낼 수는 없는 일.
팽현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도를 치켜들었다.
이미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상대를 쓰러트려야 한다는 일념뿐.
팽현수의 눈빛이 전에 없이 날카로워졌다.
기세가 변한 것을 눈치챈 팽문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팽문기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순간.
파팟!
제법 예리한 기세로 팽현수의 도가 날아들었다.
하나 너무도 직선적인, 솔직한 도세. 팽문기는 가볍게 그것을 피하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좀 변한 듯하더니 별것 아닌……, 어랏!’
완전히 피한 줄 알았던 팽현수의 도가 바짝 뒤를 쫓아왔다.
반걸음 뒤로 물러나며 피해 냈지만 팽현수의 도는 금세 각도를 변화시켜 팽문기를 노렸다.
일격이라도 성공시키겠다는 필사의 의지가 느껴졌다.
이대로 피하기만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결정을 내린 팽문기는 날아드는 도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파창!
유리가 깨지는 듯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팽현수의 도가 중간 어림부터 조각났다.
핏!
날아드는 작은 금속 조각이 팽문기의 볼을 살짝 스치며 싸한 통증을 전해 왔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팽문기는 부러진 도를 쳐 내며 눈앞의 팽현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팽문기의 주먹은 그저 텅 빈 허공을 갈랐다.
어느새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진 팽현수를 찾아 팽문기가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파악!
도를 버린 팽현수가 몸을 낮춘 채 각법(脚法)으로 낮게 하단을 쓸어 왔다.
미처 예상치 못한 일격.
종아리를 강하게 후려치는 힘에 팽문기의 무릎이 살짝 꺾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연이어 공격을 하려던 팽현수는 금세 자세를 바로잡은 팽문기의 모습에 다급히 몸을 빼냈다.
투콱!
육중한 소리와 함께 조금 전까지 팽현수가 있던 자리가 움푹 파였다.
피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큰 부상을 입었으리라.
하지만 팽현수의 눈길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제법…… 이로구나.”
이상했다.
그저 날아드는 주먹을 피하기에만 급급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은 차분해져 갔다.
낭인으로서 수많은 격전을 치러야 했던 지난 생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쳤다.
목숨을 잃을 뻔했던 순간순간이 폭발할 듯 점멸해 갔다.
몸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몸에 배인 대로 움직여 갈 뿐.
지극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가슴속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줄기 따뜻하고 맹렬한 기운.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것이 혈맥을 타고 흘러갔다. 막힌 것이 뚫리듯 상쾌하기 그지없다.
팽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기운이 혈맥을 타고 흐를 때마다 조금씩이지만 힘이 더해지는 것만 같았다.
파창!
순간 팽문기의 주먹에 도가 부러졌다.
이미 예상한 바, 흔들림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도병을 놓고 그대로 비어 있는 하단으로 다리를 휘둘렀다.
파악!
일격의 성공.
하나 더 이상 공격할 틈은 없었다. 재빨리 도를 빼내자 팽문기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제법…… 이로구나.”
말없이 다시 몸을 날린다. 이대로 좀 더 혈맥을 흐르는 기운을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