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팽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어째서 싫다는 게냐? 내 진전을 잇게 된다면 가문의 어느 누구도 널 무시할 수는 없을게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숙부님의 권을 배운다는 것은 그 또한 도망치는 길일 뿐입니다.”
“무슨 소리냐?”
“도로써 가문을 뛰어넘는 것. 그것만이 진정 가문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팽현수는 저도 모르게 도병을 꽉 움켜쥐었다. 팽문기를 바라보는 팽현수의 눈빛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물끄러미 팽현수를 내려다보던 팽문기는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핫! 도망친다라…….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네 말대로라면 난 비겁하게 도망친 거나 다름없구나.”
“그,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되었다. 네가 그리 생각한다니, 어쩔 수 없구나. 도를 버리라고 하진 않겠다. 대신 내가 권을 가르치는 것을 막지는 말거라.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
팽문기의 단호한 어조에 팽현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핫! 좋다. 지금 당장 시작하자꾸나!”
***
불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사아란은 인상을 찌푸리며 손에 든 작은 종잇조각을 구겼다.
“기어이 신권을 따라갔단 말이더냐?”
조금 전 전서구로 전해진 사영의 보고에 사아란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사영을 보냈는데 역시나였다.
이대로 몇 년이 지난 후, 팽현수가 가문으로 돌아온다면 자신의 아들 팽현성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만에 하나 무공을 배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팽문기가 그 뒤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끝까지 방해하겠다는 거냐?”
뿌득 이를 갈며 사아란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순간 뇌리를 스쳐 가는 생각에 사아란은 저도 모르게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돌아오지 못하게 하면 될 것 아닌가. 돌아오지 못하게 하면 될 것이야.”
***
머리를 스치는 바람이 시원하다. 처음 이곳에 올 때와는 달리 주위가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팽현수는 자연스럽게 도를 뽑아 들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팽현수의 머리칼을 휘날렸다.
“좋다, 와라!”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팽문기가 손짓했다.
길게 숨을 내쉬며 팽현수는 눈앞의 팽문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파팟!
눈앞을 어지럽히는 수십 개의 도영(刀影).
어디에도 피할 틈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팽문기의 몸이 도 사이를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앗차 하는 순간, 팽문기의 주먹이 팽현수의 턱에 닿았다.
“어떠냐? 네게 맞춰 많이 다듬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오호도 특유의 빈틈은 남아 있지.”
그대로 동작을 멈춘 채로 팽문기가 히죽 미소 지었다.
순간 팽현수가 몸을 반 회전시키며 길게 뻗어 낸 도를 가로로 휘둘렀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절묘하게 팽문기의 주먹을 피해 내며 날아드는 팽현수의 도.
하지만 팽문기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가볍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팽현수의 공격을 피해 냈다.
“쳇! 또 갑니다!”
혀를 차며 팽현수는 다시 몸을 날렸다.
연이어진 수십 번의 공세.
하지만 팽문기는 단 한 번도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물론 낭인으로서의 경험을 십분 발휘한다면 공격을 성공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
무공 수련을 위한 비무에서 바닥까지 드러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찌된 일이냐? 겨우 이 정도 실력으로 내 권을 거부하고 도를 택했다는 거냐?”
이죽거리는 팽문기. 그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다. 하지만 팽현수는 흔들리지 않고 팽문기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각인했다.
마치 구름 속을 거닐 듯 부드러운 팽문기의 움직임은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던 팽현수의 도를 가볍게 피해 내고 있었다.
“헉, 헉!”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팽현수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흘러내린 땀이 이마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이제 끝난 거냐?”
“후우, 아직…… 입니다.”
호흡을 몰아쉬며 팽현수는 다시 도를 곧추세웠다. 망설임 없이 팽문기를 향해 달려드는 팽현수.
어느샌가 그의 도에는 자연스럽게 파르스름한 도기가 맺혀 있었다.
‘훗! 이제 진짜라는 거냐?’
달려드는 팽현수의 사나운 기세에 저도 모르게 근육이 긴장했다. 팽문기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고 조심스레 약간의 내공을 끌어 올렸다.
순간.
파파팍!
예리하게 찔러 들어오는 팽현수의 도.
하지만 여전히 빈틈이 보였다. 팽문기는 여유 있게 그것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사락!
팽현수의 도가 자연스럽게 팽문기의 퇴로를 따라 들어왔다. 다시 몸을 반 회전시키며 떨쳐 내려 했지만 금세 팽문기의 뒤를 따라붙었다.
‘제법!’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팽현수의 변화에 적잖이 감탄한 팽문기는 좀 더 내공을 끌어 올렸다.
문득 팽문기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팽문기의 뒤를 쫓아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팽현수의 다리.
그것은 조금 전 자신이 팽현수의 도를 피하기 위해 사용했던 보법과 흡사했다. 아니, 서툴기 그지없었지만 확실히 동일한 보법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내 발의 움직임을 외운 것인가?’
팽문기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완전하진 않았지만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자신의 보법을 흉내 낼 정도라니.
‘정말 대단한 녀석이로군. 어째서 이런 아이가 형님에게 버림 받은 거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설픈 보법이지만 빠른 속도로 팽문기의 품속을 파고든 팽현수의 도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팽문기는 살짝 혀를 차며 그대로 내공을 실은 주먹을 들어 손등으로 도면을 후려쳤다.
카캉!
커다란 금속성과 함께 팽현수의 도가 허공 높이 날았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팽현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하핫! 이제 끝이로구나. 정말 제법이었다. 그 순간에 내 보법을 흉내 낼 줄이야. 하나 네 도법에는 아직도 빈틈이 너무도 많구나. 아무래도 그것을 좀 더 다듬어야겠다.”
팽문기의 말에 팽현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즉흥적으로 팽문기의 보법을 흉내 내 따라잡을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공격을 성공시키지는 못했다.
팽현수는 거친 숨을 계속 몰아쉬며 몸을 일으켜 바닥에 꽂힌 자신의 도를 갈무리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팽문기가 입을 열었다.
“자아, 이제 잠깐 쉬고 점심이나 먹자꾸나.”
히죽 웃으며 팽현수의 어깨를 살짝 두드린 팽문기는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먼저 팽현수가 방으로 들어간 찰나.
후드드득!
조금 떨어진 나무 사이로 십여 마리의 산새가 날아오르는 것이 팽문기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어째 요즘 들어 비둘기가 많이 보이는군.”
중얼거리는 팽문기의 시선이 산새가 날아오른 커다란 나무로 향했다.
흠칫!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며 커다란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숨겼다.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영은 호흡을 멈추고 최대한 기척을 지웠다.
사아란에게 정기적인 보고를 위해 전서구를 날리던 순간, 자신을 향해 날아든 매서운 살기에 사영은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저절로 이마에 땀이 맺혔다. 긴장에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는 날에는 자신의 목숨은 없다. 자신을 향한 시선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심장을 옥죄어 오는 긴장감.
숨도 쉴 수 없는 긴장감이 사영을 맴돌았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사영을 향한 시선이 사라졌다. 분명 시선이 느껴진 곳은 팽문기와 팽현수가 있는 곳이었다.
사영의 무공은 은신에 유리한 살수의 무공. 거기에 극성으로 익힌 보법과 보통 무림인의 몇 배는 넘는 극도의 안력(眼力)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기척을 팽문기는 느꼈다는 것이다.
사영은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삼십 장 밖의 기척까지 느꼈다는 건가, 신권…….”
***
홍매루(紅梅樓).
팽가의 인근 마을에 있는 가장 큰 기루 중의 하나.
그 입구에 은밀히 사아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하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채 빠른 걸음으로 삼 층에 올랐다.
“어서 옵쇼! 어라? 여긴 여인네가 올 곳이 못 됩니다만…….”
잽싸게 다가와 인사를 한 점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사아란을 쳐다보았다.
한쪽 볼에 커다란 검상이 있는 데다 덩치가 커 주먹이 꽤 세 보이는 사내였다.
사아란은 그대로 자리에 앉으며 징그러운 벌레라도 쳐다보듯 점원을 힐끗 바라보았다.
“가서 루주(樓主)를 불러와라.”
순간적으로 점원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점원은 금세 접객용 미소를 되찾았다.
“루주께서는 지금 안 계십니다만, 무슨 일로……?”
사아란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점원을 노려보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똬리를 튼 뱀이 새겨진 작은 나무 조각이었다.
“남은 두 개의 의뢰 중 하나를 원한다고 전하라.”
경악한 표정으로 탁자에 놓인 뱀 조각과 사아란을 번갈아 바라보던 점원은 허둥지둥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화려하게 장식된 비단옷을 입은 기녀가 사아란에게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사아란은 말없이 기녀의 뒤를 따랐다. 삼 층의 끝에 닿은 기녀는 벽에 매달린 짧은 끈을 당겼다.
덜컹!
나직한 소리와 함께 숨겨진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아란을 안내한 기녀는 계단 위를 가리켰다.
“저는 여기까집니다. 들어가시지요.”
사아란은 조심스럽게 계단에 발을 올렸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계단을 오르자 작은 문이 눈에 들어왔다.
끼이익!
문을 열자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어서 오시오. 그래, 이번엔 어인 일로 이런 누추한 곳까지 방문하시었소?”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
사아란은 눈을 크게 뜨고 사내를 노려보았다. 반라의 여인 둘과 침상에서 뒹굴고 있는 사내의 음탕한 모습에 사아란은 저도 모르게 노한 음성을 토해 냈다.
“내가 왔다는 걸 알면서도 무슨 짓인가!”
“아, 미안하오. 어디 하던 걸 관둘 수가 있어야지. 너희들은 잠시 물러나 있거라.”
아쉬운 듯 중얼거리는 사내의 말에 반라의 여인들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내는 침상 옆에 걸린 겉옷을 걸치며 몸을 일으켰다.
“살막(殺幕)의 주인이 여색(女色)에 빠져 있다니.”
“거야 각자의 취향 아니겠소? 그나저나 팽가의 안주인께서 몸소 이곳까지 오실 일이라……. 그래, 무슨 일이시오?”
“지워 줘야 할 사람이 있다.”
사아란의 말에 사내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밝은 미소임에도 너무도 싸늘해 보이는 미소였다.
“대가는?”
“대가라니! 맹약을 잊었나!”
버럭 소리치며 사아란은 품속의 뱀 조각을 내밀었다. 하지만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거야 선대의 맹약이잖소? 목숨 한 번 구해 준 걸로 무료 의뢰 세 번이라니. 이거 수지 타산이 안 맞지 않소.”
사내의 말에 사아란은 으득 이를 갈았다.
“그럼 어쩌자는 거냐?”
“흐음, 무료 의뢰는 이번이 마지막. 어떻소?”
“좋다……. 대신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언제 우리가 실패한 적 있소이까?”
“믿지.”
사아란은 손안의 뱀 조각을 사내에게로 던졌다.
사내는 히죽 웃으며 조각을 받아 들고는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사내는 소름끼칠 정도로 싸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목표물은?”
***
“후읍! 하아…….”
규칙적인 호흡.
정신은 잡념 하나 없이 잠잠하기 그지없다.
팽현수는 차분한 마음으로 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가문의 독문심법인 혼원벽력심공.
기본은 그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서 변형한 오호도처럼 그것마저도 제 형태가 아니었다.
팽현수의 등 뒤에는 받아들인 진기를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팽문기가 앉아 있었다.
팽문기는 말없이 진기가 흘러갈 방향의 혈도를 손가락으로 짚어 갔다.
소주천(小周天)은 오른쪽에 위치한 심장 탓에 그저 좌우가 뒤바뀌어 있을 뿐이었다.
문제는 대주천(大周天).
한참을 혈맥을 타고 흐르던 진기가 심장 언저리에서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경로를 이탈했다.
하지만 이내 제 길을 찾아 하단전으로 모여든 진기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전신으로 흩어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짜릿한 청량감에 팽현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