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는 그의 말대로 육 개월 후 다시금 효렴에 천거되어 낙양으로 떠났다. 하후 형제와 조홍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다시금 만날 것을 기약하며 이별주를 진탕 마셨으며, 다음날 세류의 배웅 아래 떠나갔다. 때문에 그들의 재회는 꽤나 오랜 시간 후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일렀다.
“형님도 참…….”
세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멀어져가는 사람을 보았다. 자신에게 편지를 건넨 사람은 조조의 사람이 아니다. 단순히 상행에 편지를 부탁한 게 분명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너무 억지 아냐?”
세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신의 내용 때문이다. 서신에는 조조가 두고 온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자신이 직접 가져다 달라고 하는 것이었으니까.
“벌써부터 물밑 작업을 하시는 건가. 지난번에 그냥 갔을 때 왠지 찝찝하더라니.”
인재 욕심이 많은 조조가 이제 지학에 이른 세류를 가만히 두고 간다는 것이 좀 의심스러웠지만 그런 기색을 비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했다. 약관까지 기다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산인 듯하다.
“이렇게 서신까지 보내셨는데 안 가는 것도 도리가 아니고……. 후우, 가야 하나.”
조조의 부탁에 하루 정도 고민한 세류는 결국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행낭(行囊)을 꾸렸다. 하지만 세류의 여정은 무탈하지 못했다. 가혹한 십상시를 정점으로 하는 수탈 구조가 수많은 유민을 만들었고 이에 초적과 산적이 기하급수적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세류 역시 그들과 수차례 마주친 바가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함으로 놓아준 바도 많았다.
아직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희미하지만 국법의 지엄함이 남아있는 만큼 초적이라고 하여 함부로 죽이기엔 꺼려지는 바가 많았고, 아직 세상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누군가를 해하여 죽이고 싶지 않았다.
“이제 곧 낙양인가?”
말을 타고 서쪽으로 달려 온 지 벌써 보름 째. 대충 짐작컨대 머지않아 낙양이 나올 것 같았다.
낙양에 도착한다면 조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년 만에 보는 조조였다. 오년 전의 만남 이후 세류 스스로 마음속에 뜻을 정하기까지 만나는 것을 꺼려했지만 서신에 적힌 간곡한 부탁이 세류의 마음을 움직이고 말았다. 또한 조조의 밑에서 천하를 일통하는 것 역시 나쁘지 않을 것 같았고.
조조의 권속으로 들어간다면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고민할 때 문득 세류가 하늘을 보았다. 거뭇거뭇한 하늘에 짙은 구름, 많은 습기. 태사에게 천문 역시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조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비가 오려나.”
세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은 너른 벌판에 홀로 걷는 상태. 가까운 마을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낙양은 보일 기미도 안 보인다.
‘네비게이션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새삼 현대의 문물이 아쉬워지는 지금이었다. 하지만 갖고 있다고 해도 인공위성도 없이 쓸 수는 없을 테지. 세류는 바람을 한편에 치우며 주위를 둘러봤다.
‘저기로 가야겠다.’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산이 있었다. 큰 나무 아래 있으면 직접적으로 맞는 건 피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솨아아아……!
“후우,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 일 날 뻔했네.”
나뭇잎을 때리는 소나기의 소리. 가슴까지 청량해 지는 시원한 느낌이었지만 가야할 길이 지체 되어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편하게 생각하기로 하자. 어차피 언제까지 가겠다고 약속한 것은 아니었으니.”
세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산의 능선을 살펴보았다. 우거진 수풀에서 은은히 퍼지는 삼림의 향기는 그윽한 것이 참으로 향기로웠다.
기암괴석에 주상절리가 가득한 참으로 기기묘묘한 절경이라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삼림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머니의 품같이 아늑한 무언가가 있었다.
혼연영인술은 영의 세계를 민감하게 느끼도록 돕는 것. 이 덕택으로 수풀의 정취를 더 깊게 느끼던 세류에게 무언가 신기한 것이 보였다.
“어?”
암자(庵子)였다. 지금은 후한 말기. 후한 초기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중원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없어서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이 세상에 들어와 처음 보는 암자에 세류는 신기한 눈으로 연신 살폈다.
“한 번 가봐야겠다.”
마음먹고 움직이니 짙은 비와 질척한 흙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암자에 도착한 그. 주위를 둘러보니 이색적 정취 가득한 풍경에 가벼운 탄식을 흘렸다.
“호오, 내가 알던 것과 다르구나.”
“시주께서 아시는 바와 다르다니, 부처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그 순간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세류는 뒤돌아보았다. 붉은 가사를 걸친 채 공손하게 합장하는 민머리의 노승(老僧). 세류는 같이 합장하며 답했다.
“알기는 하나 많이 알지는 못 합니다. 그저 주워들은 정도입니다.”
“허허, 그것으로도 충분한 호재입니다.”
노승의 어조는 묘했다. 한어(漢語)가 익숙한 것 같기도 했지만 묘하게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자세히 보아하니 이 노승, 한족이 아니었다.
‘한 말기에 중국에 대승불교의 승려 몇 명이 와서 역경을 번역했다고 하던데, 그 중 하나인가 보구나. 이곳이 낙양 근처이니 있어서 어색할 것은 없지.’
대충 상대의 정체를 짐작한 세류는 공손하게 물었다.
“잠시 비를 만나 그런데 머물렀다 가도 되겠습니까?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시주께서 편한 만큼 머물다 가셔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세류는 다시 한 번 합장을 한 후 암자 내를 천천히 거닐었다. 그 때 뒤에 있던 노승이 말을 걸어왔다.
“만일 시주께서 인연이 된다면 만나실 수도 있을 겝니다만, 너무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노승의 말에 세류는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노승은 신비한 미소를 지을 뿐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세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인연이 있다면 알게 될 것이다.
“초기엔 이런 모습이었나?”
흔히 보던 한국의 불교와는 많이 달랐다. 간다라 양식이 대중적이며, 들어선 불상 역시 한국의 불상과는 달랐다. 인자한 볼 살에 긴 귓불을 가진 인상이 아닌 서양인과 같이 날렵한 턱 선에 오뚝한 콧날을 가진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암자가 작은 만큼 불상도 많지 않았다. 때문에 모든 불상을 세심하게 바라볼 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무언가 시선이 느껴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없다니 놀랄 일이었다.
‘귀신인가?’
세류는 가볍게 혼연영인술을 끌어올렸다. 영법술은 인외의 존재까지 다룰 수 있는 이능(異能). 귀신은 상대할 수 없기에 무서운 것이지, 상대할 수 있다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영법술을 쓰면 목숨이 좀 깎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못 본 척하고 넘어가는 보다는 나을 것이다.
“누구냐?”
세류가 낮게 말했다. 위압이 서린 엄한 목소리. 당장이라도 벼린 칼이 날아올 것 같은 목소리였다. 세류는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걸어갔다. 만일 무언가 잡히면 당장이라도 없이할 수 있도록 준비한 상태였다.
“드러났다. 나와. 다치기 전에.”
세류가 다시 한 번 명령했다. 인간의 말엔 묘한 힘이 있어, 흔히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를 언령(言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런 피상적인 것을 차치하더라도 무서운 카리스마가 담긴 말을 거역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세류가 살아 온 수백 년의 역사, 그리고 혼연영인술. 지금까지 그의 위엄 있는 명령에 많은 것이 굴복했다. 그것은 눈앞의 작은 여자 아이도 다르지 않은가 보다.
“……응?”
쭈뼛쭈뼛 나온 것은 작은 계집아이였다. 이제 여섯 살 즈음 됐을까. 흰 뺨에 붉은 기운 도는 홍조는 깜찍했고, 맑고 큰 두 눈은 두려움으로 일렁였다. 거기에 이목구비는 얼마나 오밀조밀한지 앞으로 십 년 후가 기대되는 아이였다.
“너였니?”
세류가 혼연영인술의 기운을 풀고 물었다. 기운을 푸는 순간, 전신에서 힘이 빠진 듯,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부작용이었다. 세류에게서 날카로운 기운이 빠져나가자 아이는 조금 편한 얼굴로 말했다.
“네…….”
“으응, 그랬구나. 미안. 놀랐지?”
세류가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마 꽤나 놀랐을 것이다. 자신이 무사한 까닭은 무술 실력도 있지만 혼연영인술 덕택도 있으니까. 수많은 초적이 횡행하는 여행길을 뚫고 나온 것만으로도 그 효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아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솔직한 아이였다. 세류는 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을 뻗자 슬쩍 뒤로 물러나는 아이.
세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뒤로 뺐다.
“어쨌든 안녕? 나는 세류라고 해. 자는 신원이지. 네 이름은 뭐니?”
세류의 물음에 아이는 그의 눈을 빤히 보았다. 조금 전까지 무섭다고 하던 사람의 눈을 빤히 보다니. 참으로 당돌했다.
“응? 네 이름을 알려줄래? 아니면 여기 사는 거니?”
세류의 물음에 아이가 작게 입을 열었다.
“초선(貂蟬)이요.”
“초선? 참 예쁜……. 뭐?”
담비와 매미라. 참으로 예쁘다 생각했는데, 어디서 듣던 이름이다.
“뭐라고? 이름이 초선이라고?”
초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류는 어리둥절한 상황에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이게 혹시 옛날 한국에서 보던 몰래 카메라 같은 것인가 하고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이천 년 후에나 있을 일이 지금 일어날 리 없다. 즉 눈앞에서 본인을 초선으로 소개하는 이 아이는 초선 본인인 것이다.
“어…… 그러니까. 어…….”
“바보.”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만나서인가, 세류가 말을 더듬었다. 그것이 초선이의 눈엔 참 재밌었나보다.
“어흠흠…….”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일지 짐작됐다. 다 큰 어른이 어린이 앞에서 말을 더듬으면 바보거나 바보일 테니까.
“어흠, 오늘 날씨가 참 짓궂구나. 그렇지? 조금 추운 것 같기도 해. 어쨌든 만나서 반갑다. 어쨌든 몇 가지만 물어도 될까? 너는 여기 사는 거니?”
세류는 다시 상황을 정리하며 물었다. 초선은 세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 살아요.”
“아, 여기에 산다고?”
초선은 가공의 인물 아니었던가? 정사에선 미지의 시녀로 나오고 연의에서 창작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삼국지의 인기로 중국 사대미녀로 꼽힌 이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세류의 상황을 가장 잘 비유하는 표현은 잡지에서나 보던 연예인이 눈앞에 나온 느낌이랄까.
“신기하네.”
“뭐가요?”
“그냥 그런 게 있어.”
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하겠니. 세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 번 초선을 보았다. 눈을 닦고 보아도 초선의 미모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싱그럽고 잡으면 손을 떠나갈 것 같은 신비로움도 있었다. 참으로 담비의 털 같이 고운 머릿결에 매미의 날개처럼 투명한 피부를 갖고 있으니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이상한 사람.”
초선은 그렇게 말하며 살랑거리는 나뭇잎처럼 멀어져갔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세류가 눈만 껌벅일 때 누군가 그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