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삼형제(三兄弟)
초선과 헤어진 이후 세류는 초국으로 돌아와 스스로를 갈고 닦았다. 동향 사람들은 당연히 조조의 연줄을 타고 관리가 될 것이라 짐작했던 세류가 여전히 백신인 상태로 돌아오자 수군수군 말이 많았지만 세류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뱉는 말이 자신에게 영향을 줄 리 없었으니까.
세류가 입을 다물자 동향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들 역시 세류를 놓고 가벼이 입을 놀릴 만한 대상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세간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고 이런 저런 생각에 몰두했다.
그중 제일 많이 고민한 대상은 바로 현실이었다. 자신이 알던 역사와 다른 이곳. 실제 역사에서 초선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살아 숨 쉬는 분명한 사람이다. 그것은 세류에게 혼란을 주었다.
‘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자신이 아는 삼국 세계? 맞는 것 같지만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 미묘하게 맞으면서 다르다. 그래서 초선을 데려간 백연화란 인물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이런 저런 것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왕윤과는 관계없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한 가세가 기울어 애지중지 기른 딸인 초선을 가기(歌妓)로 팔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어떤 세상일까. 자신이 알던 곳과 다르다. 없던 인물이 나오니, 있던 인물도 사라질 수 있을까? 자신이나 초선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보지 않을까.
“초선……. 그리고 이곳…….”
세류는 그 생각에 가슴이 묵직해졌다. 그리고 새삼 느껴졌다. 자신이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나누는 사람들의 온기가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실제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보던 판타지 소설의 등장인물이나, 게임의 NPC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만일 자신이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법치로 다스려지는 대한민국의 살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깊이 자각했다.
세류는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다시 겨울이 오고 가기를 몇 번. 그 긴 시간이 지나가도록 스스로를 다잡았다. 자신의 행동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세류의 고민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누가 사람을 죽이고 목숨을 앗는 것을 고민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하지만 마지막까지 망설이고 번뇌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기에.
사람이 성숙하게 되는 것은 세상에서 부딪치고 깨질 때. 세류 역시 그랬다. 오랜 시간을 살아왔지만 목숨의 무게를 감히 잴 수 없었기에. 그렇기에 부딪치는 것밖에 없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동란의 시기가 오고 있다. 후우, 결국 부딪쳐야겠지.”
세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아직 모르는 미지에 대해, 그 두려움에 먹힐지언정 물러서지 않겠다고. 그리고 자신은 먹힐 생각도 없었다. 결코.
그 때는 초선과 맺은 칠년지약을 이 년 정도 남긴 때였다.
“후우, 형님도 참…….”
세류는 한숨을 쉬며 서신을 내려놓았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조조는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듯싶다. 벌써 사람을 보내어 자신에게 독촉하듯 서신을 보낸 게 세 번째였다.
세류가 아는 조조라면 행동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강하다 못해 흘러넘칠 지경이니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무슨 수라도 쓸 것이다. 서신의 내용대로 말이다.
“떠나야겠네.”
문제가 되는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올해에도 자신에게 오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겠다는 뜻이었다. 만일 조조가 온다면 자신은 세상을 둘러보지도 못하고 그에게 코가 꿰여버릴 것이다. 조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얽어매려 들 것이다. 조조는 세류를 무척이나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동시에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를 무척 오랫동안이나 갈망해 온 사람이니까. 다만 그것은 세류가 바라지 않는 일이다. 아직 누군가를 주군으로 섬기고 싶진 않았다.
세류는 서신을 읽은 즉시 행장을 꾸렸다. 사실 꾸릴 것도 없었다. 이미 오 년 전 칠년지약을 맺을 때 꾸린 행장을 그대로 써도 될 정도였으니까. 바꿀만한 것은 타고 갈 마필 밖에 없었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출세의 길이었지만 준비는 완벽했다. 마음의 고민만 없었으면 몇 년 전에 나왔어도 나왔을 테니까.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하던 세류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예전에 유비를 맨 처음 목적지로 잡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탁군 탁현. 탁군 탁현으로 가야겠다.’
세류가 그렇게 마음을 정했을 때 밖에서 누군가 세류를 찾았다.
“신원. 신원 거기 있는가?”
귀에 익은 무척 익숙한 목소리. 세류는 반가운 마음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화 님? 하하!”
“잘 있었는가? 별 볼 일 없는 유생 나부랭이가 왔다고 박대하진 않겠지?”
“원화 님이라면 어찌 제가 박대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환영입니다.”
세류는 곧장 화타를 집안으로 들였고, 화타는 한눈에 세류가 어디론가 떠날 행장을 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어디로 가려는가?”
“하하, 이제 약관을 넘었으니 한 번 쯤 세상을 둘러볼 때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세류의 말에 화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조금 늦은 감이 있지. 이미 맹덕은 건석의 아재비를 때려죽여 명성을 쌓기 시작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신원의 출세(出世)는 늦은 감이 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려는가?”
“일단은 북향을 바라고 갈 생각입니다.”
“이유라도 있는가?”
화타의 질문에 세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아직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유비를 보기 위함이었지만 어찌 말할까. 유비는 일개 한량이요 유협 중 하나인 것을.
화타는 세류의 말에 더 이상 궁금증을 보이지 않고 이 때다 싶어서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세상을 어찌 보는가?”
“여러 영웅들이[群雄] 나누어 근거를 찾는 때[割據]가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이군. 맞는 말이야.”
원화는 그렇게 말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것은 세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언제 세상의 풍진(風塵)이 가라앉겠나?”
“때가 되면 가라앉겠지요.”
원화가 날카롭게 세류를 살폈다. 하지만 세류는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그 때를 만들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뜻인가?’
하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세류라는 청년은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신기한 인물이었다.
“원화 님께서는 어떻게 세상을 보십니까?”
“크게 다르진 않겠지.”
“그렇다면 언제 가라앉겠습니까?”
“때가 온다면 가라앉겠지.”
“그렇겠지요.”
화타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점차 세상이 혼란해지기 때문이다. 당고의 화로 인한 유능한 재사의 축출, 이로 인한 간신배의 득세……, 매관매직, 수탈. 이 나라의 망조가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디 작은 풍진으로, 다시 우뚝 설 나라를 기대해 보지만 가까워 보이진 않았다
“그래, 당장 오늘 세상으로 나갈 생각인가?”
“제 나이가 올해로 약관이니, 잠시 둘러보고 올 생각입니다.”
원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세류는 고작 초현에 앉아 세상을 피할 인물이 아니었다.
“둘러보고만 올 생각인 게야, 아니면 이 길에 오래 오래 나가 있을 생각이냐?”
원화의 질문에 세류는 고민 없이 답했다.
“장부가 한 번 세상에 발길을 두었으면 그 뜻을 이룰 때까지 있어야한다 봅니다. 제 스스로 족할 때까지 있다 올 것입니다.”
세류의 말에 화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떠나는 청년의 갈 길을 이미 늙어버린 중년이 잡는 것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지. 하하!”
화타의 농담에 세류는 고개를 저었다.
“원화 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말이라도 고맙구먼. 하하.”
세류는 빙긋 웃었고 화타 역시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려고요? 조금 더 계시다 가지 않으시구요.”
“어차피 잠시 들린 길이었네. 갈 길 떠나는 장부의 길을 막는 건 할 수 없지. 어차피 나야 서책이나 혼자서 주절주절 대다가 환자를 봐주어야 할 테니…… 이만 가보겠네. 배웅은 않겠어. 그럼 잘 다녀오게. 걱정은 하지 않겠네. 하하. 자네는 어디가든 잘 살아갈 것이라 보이니까.”
화타의 말에 세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덕담 감사합니다.”
“그럼 잘 갔다오게. 하하!”
세류는 화타의 등에 대고 깊게 고개를 숙였고 화타는 손을 두어 번 흔든 후 올 때처럼 휘적휘적 멀어져갔다.
화타 원화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지만 배웅까지 받으니 더 이상 출발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세류는 빠르게 북으로, 북으로 나아갔다.
북향을 바라고 떠난 세류는 얼마간 달리자 말이 지쳐가는 것이 느껴졌다. 곧 말을 진정시켜 천천히 걷게 했다.
‘아직 더 올라가야 하는데, 얼마나 가야 하려나.’
세류는 말의 헐떡거림이 멈춰지고 땀이 어느 정도 식었다고 느껴지자 다시금 달려 나갔다.
“멈춰라!”
얼마나 달렸을까, 눈앞에서 열댓 명의 사람들이 흉흉한 병장기를 소유한 채 세류의 앞을 막아섰다.
세류는 말위에서 아니꼬운 눈초리로 막아선 이들을 쳐다봤다. 그들의 정체는 묻지 않아도 초적일 것이다.
‘하아,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저들도 세상이 어지러워 칼을 들고 나설 수밖에 없게 된 불쌍한 민중들이지만…….’
하지만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죄는 죄인 것. 그리고 이미 이런 상황에 대해 세류는 무수히 고민해 왔다. 평범한 사람은 결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왜 멈춰야 하지?”
초적들은 세류가 당황하지도 않고 오히려 단호하게 반문하자 조금 동요했다.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 앞에서 태연하다면 무언가 믿는 게 있다는 것일 테니까.
“네……네가 소유한 것을 다 넘긴다면 지나치게 해주겠다!”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처음에는 말을 더듬었지만 주위의 머릿수에 다시금 기운이 돋았는지 강하게 나왔다.
“그래? 정말 넘겨주면 보내 줄 건가?”
세류가 기대 어린 어조로 되물었다.
“당연하다!”
무리의 대장은 세류가 약하게 나온다고 생각되자 더 거만하게 굴었다. 이제 그의 소유물은 다 그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 굳게 믿고서.
“그렇단 말이지.”
“물론이다!”
세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황건의 난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변치 않는 민초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들은 땅을 갈던 평범한 민초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세류는 물어보았다.
“내가 관가에 고변하면 어쩌려고?”
관가를 두려워한다면 일말의 가능성 있을 것이다. 그들도 언젠가 토벌 된다는 것을 알 테니까. 하지만 관가라는 말에 잠시 당황하던 초적들은 이내 웃기 시작했다.
“겨우 관가를 믿고 그렇게 당당했냐? 관 따위가 우리를 토벌할 능력이 될까! 으하하하!”
그들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세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본 초적들은 더욱 기가 살아서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흐흐……. 내가 그냥 보내주려고 했지만 안 되겠다. 감히 우리를 협박해?”
더 강하게 나오는 모습에 세류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말에서 내려서 주변의 나무에 말이 도망가지 않도록 묵었다.
초적들은 말에서 내려 자진납세 하려는 줄 알았지만 말을 묵는 행동을 멍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전혀 뜻밖의 행동이니까. 왜 말을 묶는 거지?
“이제 시작하자고.”
세류는 그렇게 말하며 무감정하게 눈으로 초적들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