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序) -
구름이 달을 가렸다.
창가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노인의 눈동자에 어둠이 깊어졌다.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풍채를 지닌 노인 뒤로 흑의(黑衣) 중년이 내려섰다.
“다녀왔는가?”
“예, 태상문주님.”
흑의 중년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깍듯이 대답했다.
“어찌 됐는가?”
“스무 명 모두... 죽었습니다.”
노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반응이다.
“송구합니다.”
“자네가 송구할 일이 아니잖나.”
노인이 몸을 돌렸다.
담담한 듯 행동하고 있었지만 실망과 근심이 뒤섞인 낯빛은 쉽게 감출 수 없었다.
그가 태사의로 걸어와 앉았다.
“적룡문(赤龍門)의 뇌검(雷劍)도 죽었단 말인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던진 질문이다.
하지만 흑의 사내의 낯빛만 보고도 대답은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멸인 게다.
“적룡문의 반응은 어떠한가?”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적룡문이 그렇게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개입하지 않겠다는 선에서 그친 것만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뇌검은 적룡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다. 만약 그들이 뇌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이쪽에 물으려 한다면 그야말로 난감한 일이었을 게다.
“대책이 시급합니다, 이곳도 곧 그들에게 발각될 것입니다.”
“하나 설화(雪花)를 보호할 자가 없잖은가. 그 아이로 위장한 스무 명이 모두 죽고 호위무사들도 전멸했으니...”
적룡문의 뇌검이 죽었다.
누가 이 위험한 일을 맡으려고 하겠나?
흑의 사내가 착잡한 심정으로 노인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속하가 생각해 본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만.”
“강무(强武), 자네가?”
노인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강무는 좀처럼 의사표현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신중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확신이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표운성(豹雲晟)이라는 자입니다만.”
“표운성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로군. 사문이 어딘가?”
“그것이... 정공(正功)을 익힌 자가 아닙니다.”
“하면? 사파(邪派)란 말인가?”
“예. 사문(師門)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현재 강호에서 은밀히 해결사 일을 소일거리 삼아 돈을 벌고 있습니다.”
“해결사 일이라 함은?”
“주로 실종자를 찾아주거나 잃은 물건을 되찾아주는 역할을 하는 모양입니다.”
노인의 표정에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족보도 없는 사파에다가 분실물이나 찾아주는 자라니. 지금 설화를 그런 자에게 맡기자는 겐가?”
강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고루색마(骷髏色魔)를 죽였습니다.”
“뭣이?”
노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고루색마가 누군가? 강호 백대 고수 안에 드는 자다. 말이 백대 고수지, 강호의 무인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
그 중에서 백 명 안에 든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실력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고루색마라면 마공(魔功)을 익힌 악질 늙은이.
실전 경험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다. 백 명의 고수 중에도 능히 중간은 갈 자다.
한데 그런 자를 죽여?
“확실한 정보인가?”
“확실합니다. 고루색마는 한 달여 전에 죽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어쩌다가 고루색마와?”
“표운성이 고루색마에게 납치된 의뢰자의 딸을 되찾는 과정에서 일이 벌어진 듯합니다.”
“하나 고루색마가 죽었다면 강호에 한바탕 소문이 휩쓸고 지나갈 터. 어찌 이리 조용한가?”
“아직 이 사실은 저희를 비롯한 극소수만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받은 정보인가?”
“그것이 실은...”
강무가 말끝을 흐렸다.
노인은 다그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의뢰자가 육촌 형님이었습니다.”
“...그렇군. 자네 친척이었던가.”
노인은 더 이상 사정을 묻지 않았다.
친척이 강무에게 그 일을 맡기지 않은 것은 여러 사정을 고려해서였을 것이다.
작금의 강호사정도 그러하거니와 그들만의 집안 사정도 있었을 테고.
아무튼 거기에 관해선 노인이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정보가 확실하다는 것만 확인되면 그만이다.
노인이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표운성, 그 자의 나이는?”
“송구합니다. 거기까지는 정보가 없습니다. 다만, 젊은 이십대일 가능성이 큽니다.”
“어리군.”
담담히 대꾸했지만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고루색마를 죽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족보도 알 수 없는 사공을 익힌 자에다가 새파랗게 어린 자라...
정파 무인들 사이에 사천지수(邪泉之水)라는 말이 있다.
도천지수(盜泉之水)를 인용한 말로, 아무리 목이 말라도 ‘사(邪)’자 들어가는 물은 마시지 않는단 말이다.
비록 정도가 흔들리고, 쓰러지고 있지만 사파의 무리들에게 손을 내밀 수야.
노인의 근심이 깊어졌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얼마 남지 않은 정도문파들이 등을 돌렸습니다. 그들에게 호위무사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표운성을 믿어보자는 말인가?”
“비록 맡은 일이 대수롭지 않다지만, 그가 맡은 의뢰건은 전부 해결됐습니다.”
“거기에 고루색마를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실력. 하나 그것이 운일지도 모르지.”
“태상문주님, 지금으로서는 시간을 끌 수가 없습니다.”
노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창밖에서 밤바람이 소슬하니 불어왔다.
“강무.”
“예, 태상문주님.”
“표운성, 그 자를 찾게.”
“복명.”
잠시 후, 노인의 등 뒤에서 강무의 기척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답답한 한숨이 노인의 마른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달래본다.
이미 정도문파들은 패기를 잃었다고. 도와 달라 손을 뻗어도 잡아줄 자가 없다고. 이 암흑의 시기를 타파할 배짱이 그들에겐 없다고.
그럼에도 이 지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손녀뿐이라고 생각했다.
‘표운성이라...’
검은 구름이 완전히 달을 덮었다.
때는 바야흐로 마도천하(魔道天下)의 시대였다.
第一章 의뢰수락(依賴受諾)
다부진 근육질의 사내가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뭐라고 이 자식아?”
“은자 한 냥입니다요.”
“왜 은자 한 냥이야? 이 자식아!”
“저기.”
투실투실하게 살이 찐 점소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벽보를 가리켰다.
벽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매운 불닭발! 모래시계가 다 떨어지기 전까지(一刻) 그릇을 깨끗이 비우시는 분께는 공짜! 단, 실패할 시에는 벌금 은자 한 냥! 도전하시겠습니까?
벽보를 확인한 근육질 사내가 다시 점소이를 보았다.
“그래서?”
“그래서 은자 한 냥입니다요.”
“뭐야?”
사내는 기가 찼다.
아무래도 이 점소이가 오늘 갑자기 삶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나보다. 아니면 인생에 대해 지독한 회의감이 밀려들었거나.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도 뻔뻔스러울 수가 있나?
“이 자식아! 난 분명히 일각 안에 다 먹었어!”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릇에 양념이 남았습니다요. 그릇을 ‘깨끗이’ 비우셔야 성공이거든요.”
“하! 이 미친놈 좀 보게.”
“어쨌든 한 냥 줍쇼.”
결국 사내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그가 욕지기를 뱉어내면서 점소이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퍽! 우당탕탕!
점소이가 탁자와 의자를 부수며 날아갔다.
그제야 사내도 기분이 좀 풀리는지 입 꼬리를 치켜 올렸다.
“가서 주인장 나오라 그래!”
점소이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주인장님은 지금 바쁘십니다요.”
“손님 하나 없는 객잔에 바쁠 일이 뭐 있어?”
점소이는 대답하는 대신 비틀거리며 사내에게 다가왔다. 그가 사내를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치료비랑 기물 파손으로 은자 한 냥 더 내셔야겠습니다.”
“뭐? 이 미친놈이 오늘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사내가 작정을 하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때였다.
객잔 입구에서 주렴(珠簾)을 젖히며 한 사내가 들어섰다. 흑의를 입고 죽립을 깊이 눌러 쓴 사내였는데 척 보아도 기도가 남달랐다.
자연 점소이와 사내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죽립 사내는 천천히 걸어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점소이를 불렀다.
“여기 손님 받지 않는가?”
“아, 예. 이 손님 계산만 해드리고 곧장 가겠습니다요!”
점소이가 호쾌하게 대답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근육질 사내로서도 난감했다. 죽립인은 척 보기에도 무림인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힘깨나 쓴다지만 무인을 상대로 호기를 부릴 정도로 무모하진 않았다.
게다가 요즘 시기가 어느 때인가.
마도천하의 시대가 아닌가.
자칫 마인에게 걸려들었다간 뼈도 못 추릴 터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로서는 겉모습만 보아서는 죽립인이 정공을 익혔는지, 마공을 익혔는지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혹시 마인인가?’
때마침 죽립인이 근육질 사내를 힐끗 보았다. 마치 빨리 계산하고 꺼지라는 듯.
꿀꺽.
근육질 사내가 마른 침을 삼키는데, 점소이가 히죽 웃었다.
“자, 손님. 은자 두 냥입니다요.”
“너... 이 새끼...”
“어서요.”
“끙... 두고 보자!”
근육질 사내가 은자 두 냥을 던지다시피 주고는 몸을 돌렸다. 그는 입구를 나가면서도 점소이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악착같이 은자 두 냥을 받아낸 점소이가 이번에는 새로운 먹잇감(?)을 향해 달려갔다.
“어서 옵쇼! 뭘 드릴깝쇼?”
“이 가게에서 제일 비싼 것으로 내오게.”
제.일.비.싼. 것!
점소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간만에 대박 손님이 아닌가!
“곧 대령하겠습니다요!”
신나게 소리친 점소이가 얼른 주방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점소이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물을 들고 나왔다.
“자네.”
“예, 나리!”
“이름이 뭔가?”
“군보(君寶)라고 합니다.”
“군보. 혹시 내강(內江)의 해결사라고 들어보았나?”
순간, 점소이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죽립인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짧은 순간의 변화였다.
곧 점소이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그런 말은 처음 듣는 뎁쇼?”
죽립인이 나직하면서도 강압적인 어투로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 오면 그자를 연결시켜준다고 해서 왔네만.”
“저...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요. 헤헤.”
“그자에게 대가는 넉넉히 주겠다고 전해주게.”
그러자 주방으로 향하던 점소이가 배시시 웃으며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