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광(陽光)이 비스듬히 스며드는 누각에서 한 노인이 홀로 장기를 두고 있었다.
바로 비검문의 태상문주인 비뢰검인(飛雷劍人) 차진양(車眞量)이었다.
한 수 한 수 말을 옮기는 그의 손길에서 장고(長考)의 신중함이 묻어났다.
만약 누군가 보았다면 손가락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어지럽고 가문마저 기울어버린 현 시점에서 한가로이 장기라니!
하지만 누각 한쪽에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강무는 그런 차진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주위가 혼란스럽다고 거기에 휩쓸리게 되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태상문주는 지금 장기를 두면서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격정으로 흔들릴 수 있는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히고 있는 것이리라.
탁.
장기 말을 힘 있게 옮긴 차진양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접근이 빠르군.”
“그렇습니다. 놈들이 의빈(宜賓)까지 좁혀왔다는 정보입니다. 곧 이곳까지 올 것입니다.”
“설화를 어서 보내야겠어.”
“빠를수록 좋습니다.”
“자네한테 미안하이.”
“당치도 않는 말씀이십니다.”
“왜 설화를 자네에게 맡기지 않는지 알고 있는가?”
강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다. 너무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설화 아가씨를 따라 나서게 되면, 분명 마교 놈들은 자신을 쫓아 올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태상문주와 함께 남게 되면 설화 아가씨에게 좀 더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게다. 즉, 자신은 태상문주와 함께 그들의 미끼인 셈이다.
차진양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자네가 너무 잘 알고 있으니 그래서 더욱 미안하이.”
이번에도 강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상문주의 나약한 모습에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힘도 더해주지 못해 분할 뿐이었다.
이때, 엽상섭이 한 사내를 데리고 누각으로 올라왔다.
“표운성 대협이 찾아왔습니다.”
차진양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어서 오시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차진양이라고 하오.”
“표운성이라고 합니다.”
운성이 천진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차진양은 상대가 생각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대신 얼른 맞은 편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대협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오, 제가 그렇게 유명한가요?”
“허허허. 대협께서 의로운 일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별 말씀을요. 다 은자의 은혜를 받고 한 것이죠.”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운성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다가 문득 장기판을 보고는 말을 이었다.
“홀로 두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허허, 늙어서 마땅히 즐길 거리도 없어 재미삼아 두고 있었습니다.”
“형세를 보니 초국(楚國)이 유리하군요.”
운성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가장 놀란 사람은 차진양이었다.
물론 한쪽에서 이를 지켜보던 강무 역시 내심 놀라고 있었다.
‘한 번 훑어 본 것만으로 형세를 파악하다니.’
지난 오랜 세월 동안 강무는 태상문주가 두는 장기를 지켜봐왔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늘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끝나곤 했다.
초국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늘 한국(漢國)이 이겼고, 한국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늘 초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결국 나중에는 형세 보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때문에 그로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자연히 뒤따랐다.
‘틀렸겠지?’
하지만 이어진 차진양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단번에 형세를 정확히 파악하다니. 젊은 대협께서 대단하시군요.”
맞췄다!
차진양의 장기를 보고 형세 파악을 해내다니!
하지만 필시 운도 따랐으리라.
주위의 경악과 달리 운성은 마냥 기분 좋은 듯 헤벌쭉 웃었다.
“별 것 아닌 걸로 칭찬받으니 쑥스럽네요.”
‘별 것 아니라고?’
강무는 확신했다.
‘저리 말하는 걸 보면 필시 운이다. 그게 아니라면 잘난 척을 하는 것이거나.’
그는 당연히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진양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렇잖아도 혼자 두다보니 재미도 없고 적적하던 참인데, 대협께 이 늙은이가 한 수 배워보고 싶구려. 판을 대협께서 이어가시는 건 어떻겠소?”
“저랑요?”
“그렇소. 혹 부담되는 제안이었다면 미안하구려.”
“부담은 아니지만...”
“아니지만?”
“제가 대전료가 좀 비싼 편이라서요.”
“대전...료?”
“헤헤. 300닢은 주셔야... 맞수를 해드릴 수 있는데.”
긴장하고 지켜보던 엽상섭과 강무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차진양이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대전료라... 그럼 이건 어떻소?”
“뭔가요?”
“대협께서 이긴다면 대전료를 드리겠소. 물론, 지금의 형세가 초국에 유리하니, 대협께서 초국을 잡으시오. 대전료는 은자 열 냥이오.”
“은자 열 냥!”
운성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입 꼬리가 귀까지 벌어졌다.
은자 열 냥이라니. 대전 한 번 하고 은자 열 냥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무슨 횡재란 말인가. 요즘 시대 은자 열 냥이면 4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였다.
운성이 다시 자리에 앉아 물었다.
“만약 한을 잡으면 대전료가 더 올라가나요?”
“한으로 하시겠단 말이오?”
차진양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물었다.
“예. 제가 한으로 하지요. 대신 은자 스무 냥 어떻습니까?”
차진양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터무니없는 판돈 때문이 아니다. 상대의 오만한 태도 때문이다.
이 정도면 객기를 넘어 무모한 수준이 아닌가.
손녀를 수행할 사람이 무모한 자라면 결코 사양이었다. 사람을 보호하는 일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할 용기가 있는 자라야 한다.
‘과연 그것이 패기인지 객기인지 두고 보지.’
차진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단, 대협께서 진다면 이번 의뢰는 없던 것으로 하고, 일전에 받은 오색풍마상도 반납하시오. 그리고 오늘 바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그래도 받아들이겠소?”
“물론입지요.”
운성이 활짝 웃었다.
“그럼 시작합시다.”
장기가 시작됐다.
한의 차례였으므로 운성이 먼저 말을 옮겼다.
두 사람은 천천히 번갈아 가며 말을 옮겨나갔다. 그러는 동안 차진양은 운성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대협께서는 사문이 어디오?”
“글쎄요. 워낙 이것저것 어깨너머로 익혀 딱히 사문이 어디라고 하기가 힘들군요.”
좋지 않은 대답이었다.
물론, 차진양은 운성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사문을 밝힐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거나, 떳떳하지 못한 사문이거나.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강호에서 사문을 밝히지 않는 무인들은 많다.
하지만 의뢰를 하는 입장에서는 적어도 상대의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게 좋았다.
‘급박한 상황만 아니라면 이런 자에게 절대 일을 맡기지 않겠건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조금만 더 시간적 여유가 있었더라도 가차 없이 내쫓았을 것이다.
차진양은 별 수 없이 말을 이었다.
“설화는 내 손녀라오. 아직 많이 부족한 아이지요. 그 아이를 잘 보호해서 호남(湖南)의 장사(湖南)로 데려가주는 일이 이번에 대협께 부탁드릴 일이라오.”
“장사까지요? 그렇게 멀리 가는 일인 줄은 몰랐는데요?”
“흐음. 혹 곤란하시오?”
“곤란한 건 아니지만... 그 정도 거리라면 금액이 좀 추가되는지라...”
“허허, 계약 성사만 된다면 추가금으로 은자 스무 냥을 더 얹어 드리겠소. 돌아올 여비로는 충분할 거요.”
“언제 떠나면 되나요?”
운성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빠를수록 좋소. 내일이라도.”
물론 그 전에 장기에서 이겨야겠지만.
“장사에 가면 누가 있습니까?”
“그 아이의 숙부가 있소.”
“그렇군요.”
두 사람은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말을 옮겨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자아, 장(將)이오.”
차진양이 말을 내려놓으며 빙긋이 웃었다.
물론 결정적인 한 수는 아니었다.
다만 이 한 수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었고, 완전히 몰락할 수도 있었다. 물론, 한두 수 내다보아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한데 운성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뻗었다.
“역지 장을 부른다면 양수겸장(兩手兼將)이 좋겠죠.”
말을 옮긴 운성이 씩 웃었다.
순간, 차진양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마치 손이 굳은 듯 말을 움직일 생각도 못했다. 지켜보던 엽총관과 강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로서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운성은 단지 장을 막았을 뿐이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장을 부를 상황도 아니고, 부르지도 않았다.
한데 차진양은 충격으로 잔뜩 굳어버린 표정이다.
차진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졌소.”
“헤헤. 이거 왠지 죄송하네요.”
운성이 뒤통수를 긁으며 웃었다. 장기 한 판 하고 스무 냥을 벌었으니 왠지 미안했던 게다.
하지만 차진양은 오히려 좀 전보다 밝아진 얼굴이었다.
“설화, 그 아이를 잘 부탁드리겠소. 표대협.”
“계산만 확실하다면야 당연한 일이지요.”
“엽총관. 표대협께 묵을 곳을 안내해 드리게.”
“알, 알겠습니다.”
엽상섭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운성을 데리고 나갔다. 운성은 마냥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 나섰다.
강무가 멍하니 앉은 차진양에게 다가왔다.
“태상문주님. 도대체 어찌 된 것입니까?”
“그가 이겼다. 더 두지 않아도 알 수 있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차진양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비록 한두 수를 내다보아서는 알 수가 없네. 그보다 몇 수를 더 내다보아야 하네. 이대로 두어나가면 그자는 분명 겸장을 불렀네. 젊은 친구가 참으로 대단하군.”
강무는 충격 받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차진양은 장기를 곧잘 두었다. 그는 장기를 잘 두기 위해서는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고 노래 부르다시피 말하곤 했다.
즉, 연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무수한 경험이 장기를 두는데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한데 저토록 새파랗게 어린 자에게 지다니.
‘정말 대단한 자. 하지만...’
강무가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자의 무공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비록 혜지(慧智)가 있다고는 하나 무공이 약해서야 마교의 추격으로부터 버텨내기 힘들 것입니다. 적어도 무공 시험도 거친 다음에...”
“허허, 자네가 추천한 자가 아닌가? 어찌 그리 믿지 못하는가?”
“하지만 신중을 기하는 것도...”
“무공도 이미 시험해보았네. 저런 청년이 지금껏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것인지 알 수가 없군.”
‘무공도 시험해보았다니! 어느 틈에?’
강무의 생각을 짐작한 듯 차진양이 말을 이었다.
“이리 와서 앉아보게.”
강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말 하나를 옮겨보게.”
“어떤 말을 말씀이십니까?”
“아무것이나 좋네.”
“그럼...”
강무가 말을 들어올렸다. 한데...
“.....!”
말을 들어 올릴 수가 없다!
‘어째서?’
강무가 다시 힘을 주어 말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말은 바닥에 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이번에는 오른 손에 진기를 집중시켰다. 그러자 가까스로 말이 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옮기기도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겨우겨우 말을 적당한 위치로 옮겨 놓고 나니 그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다.
“천근기공(千斤氣功)이군요.”
천근기공.
비검문의 독문무공으로 천근추(千斤錘)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다른 무공이다.
천근추가 자신의 무게를 늘리는 무공이라면 천근기공은 특정 대상의 무게를 늘리는 것이다.
쉽게 말해, 기를 운용해서 특정한 대상을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것이다.
차진양은 천근기공을 팔성까지 익힌 사람이었다. 그를 상대로 장기 말을 옮겼다는 것은 엄청난 내력을 지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인 게다.
“이제 알겠나? 그는 나와 장기를 두면서 태연히 말까지 섞었다네.”
“그렇다면... 그자는 계속 이런 환경에서 장기를 두었단 말씀입니까?”
“뿐만 아니라 나는 그에게 지속적으로 살기를 쏟아 부었네. 웬만한 무인이라도 숨이 막힐 정도로 말이지.”
강무는 입을 척 벌렸다.
자신이 추천한 자이지만 정말 이정도일 줄이야 몰랐다.
도대체 이런 자가 여태 왜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던 것일까?
“이제야 태상문주님의 결정을 이해했습니다.”
“허허. 자네가 추천한 인물일세. 인정이 너무 늦군.”
“그런데 저야 이해했다지만 엽총관은 아직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에게도...”
“강무.”
“예, 태상문주님.”
차진양이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총군사의 배신으로 아들을 잃은 후부터는 난 그 누구도 믿지 않네.”
즉, 엽총관도 믿을 수가 없다는 뜻.
굳이 그를 이해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차진양이 빙긋 웃으며 강무를 돌아보았다.
“물론 자네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