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정의(正義)
다음날 아침.
도화(桃花)가 흐드러지게 핀 별장 입구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말도 안 돼요!”
설화가 정색하며 소리쳤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묶어 올리고 방갓을 써서 남장(男裝)을 했다.
한편 먼저 말을 꺼냈던 차진양은 완고한 표정이었다.
“이미 결정된 일이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저와 한 마디 상의도 하지 않으시고!”
“그럴 여유가 없구나.”
“할아버지!”
“허어, 왜 그리 정색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정말 모르시겠어요? 이런 남자랑 동행이라뇨. 차라리 길에 돌아다니는 거지랑 같이 다니라고 하시지 그러세요.”
설화가 가리킨 곳에는 운성이 서 있었다.
그녀의 말에 운성이 발끈했다.
“너무하네. 내가 거지만도 못하단 소리 같잖아.”
“당연하지!”
“어허, 설화야!”
차진양이 엄한 목소리로 설화를 꾸짖었다.
“표대협께 실례가 아니더냐.”
“대협이라고요? 이런 사람이? 어딜 봐서?”
운성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여러모로 봐서 대협이지. 대협이고 말고.”
“넌 좀 빠져 주겠니?”
결국 지켜만 보던 강무가 그녀를 달랬다.
“아가씨.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셔야 합니다.”
“강무 아저씨...!”
“표대협은 태상문주님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믿어도 됩니다, 아가씨.”
“하지만...”
설화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다음으로 따랐던 사람이 바로 강무였다.
하지만 가족이 아니기에 그만큼 조심하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직접 나서서 자신을 달래니 더 이상 투정을 부릴 수도 없었다.
사실 이토록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은 운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물론,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쪽이겠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동행? 그까짓 것 해줄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자신이 이곳을 떠나고 나면, 남은 사람들은 마교와 대항해서 싸울 것이라는 것을. 자신이 좀 더 멀리 갈 때까지 남은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할아버지를 이런 곳에 두고 떠나기가 너무나 싫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차진양도 잘 알기에 설화를 호되게 나무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대화.
그래도 이별은 좋은 모습으로 기억시켜주고 싶었다.
“설화야. 시간이 없구나. 어서 떠나거라.”
“할아버지.”
설화가 나직이 불렀다.
벌써 울음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상태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마지막까지 나약한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오냐. 이 할아비는 걱정 말고 조심히 가도록 하거라. 네 숙부를 만나면 안부 전해주고.”
작별해야 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지만 이젠 정말 옮겨야 한다. 더 이상 할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을 곤란하게 할 수도 없었다.
설화가 차진양의 손을 꼭 잡았다.
“할아버지. 부디 조심하셔야 해요.”
“오냐. 내 걱정은 말거라.”
차진양이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그 얼굴을 마주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설화가 얼른 몸을 돌렸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래, 조심 하거라. 표대협, 설화를 잘 부탁하네.”
“염려 놓으십시오. 받은 만큼은 분명히 해드립니다.”
운성과 설화가 길을 나섰다.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을 하릴없이 바라보다가 차진양이 몸을 돌렸다.
“이제 우리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놈들이 오후쯤엔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확실히 빨라.”
차진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부에 첩자가 있단 소리다.
자신들의 신변이 발각된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부디 설화가 갈 길이 평탄하기만을, 아니, 평탄까지는 아니더라도 목적지까지 무사히 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준비는 마쳤는가?”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최대한 버텨보세. 우리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존명.”
강무가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아아! 다리 아파!”
운성이 소리 높여 짜증을 냈다.
설화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운성을 돌아보았다.
“겨우 얼마나 걸었다고 벌써 다리가 아프다는 거야?”
“두 시진이나 걸었지.”
“그래, 겨우 두 시진이야.”
“벌써 두 시진씩이나지.”
설화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할아버지는 이 남자의 어디를 보고 동행하라고 하신 걸까? 이런 상태라면 오히려 자신이 이 남자를 보호하게 생기지 않았나?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어. 가야 해.”
“그런데 너 왜 나한테 반말이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설화가 기가 막혀 소리쳤다.
“그럼 넌 왜 반말하는데? 애초에 네가 먼저 반말했잖아!”
“그런가?”
“그래!”
“그럼 넘어가지.”
뭐지? 이 인간?
설화는 히죽 웃는 운성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운성은 여전히 투덜거렸다.
“아아, 짐도 무겁고, 발걸음도 무겁구나.”
운성과 설화는 지금 보부상처럼 위장한 채 길을 가고 있었다.
혹시나 마인들이 알아보거나, 그들에게 매수된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변장을 한 것이었다.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운성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떼를 썼다.
“이제 못 가! 더 이상 죽어도 못 가!”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지나가는 마차를 얻어 타자.”
설화가 한심하다는 듯 운성을 바라보았다.
“너, 자꾸 이러면 계약 위반이야.”
“위반은 무슨. 난 널 장사까지 데려다 주기만하면 돼. 언제까지라는 말은 없었다고.”
“흥! 그럼 내가 할머니가 돼서 도착해도 괜찮단 말이야?”
“글쎄, 내 생각에 마차가 그 정도로 늦게 올 것 같지는 않은데?”
결국 설화도 졌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마차를 타고 가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먼 길을 가야할 테니, 편한 방법으로 갈 수 있다면 힘을 비축해두는 것도 좋으리라.
“그럼 마차를 얻어 타도록 하자.”
“오, 정말?”
“그래.”
“그런데 마차를 얻어 탈 수 있을까? 공짜로는 안 될 텐데.”
“어느 정도 사례금을 주면 되지 않겠니?”
“얼마나?”
“호남까지 태워주기만 한다면야 은자 두 냥 정도면 되지 않을까?”
운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물론이지. 그 정도면 충분해.”
“네가 왜 그걸 결정해?”
“아무튼 그 정도면 될 거야. 그럼 타고 가는 것으로 결정한 거다?”
“그래. 대신 마차가 올 때까진 걸어야 해. 마냥 마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좋아, 받아들이지!”
운성이 흔쾌히 대답했다.
어차피 지금 걷고 있는 길은 귀주(貴州)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요행 호남까지 가는 마차를 얻어 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방향이 같으니 지나가는 마차라면 아무것이나 잡아도 상관이 없었다.
설화는 갑자기 생생해진 운성을 보며 내심 불쾌했다.
‘뭐야, 전혀 다리 아픈 사람 같지가 않잖아?’
마차를 타기로 결정하고 나서부터는 너무 힘이 넘쳐서 오히려 그녀가 운성의 걸음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 때, 갑자기 운성이 우뚝 멈췄다.
“이번엔 또 뭐야?”
설화가 퉁명스레 물었다.
운성이 검지를 입술에 가져갔다.
워낙 표정이 진지했기에 설화는 마른 침을 삼키고 잔뜩 긴장했다.
설마 마교가 벌써 여기까지 쫓아온 건가?
운성이 재빠르게 길가의 나무를 타고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높은 나뭇가지 위로 올라간 그가 멀찍이 내다보더니 함박웃음을 지었다.
“온다! 마차다!”
“마, 마차였던 거야?”
설화가 맥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날렵하게 내려선 운성이 몸을 풀기 시작했다.
“흐흐. 드디어 마차다.”
“그렇게 좋아?”
“물론.”
그러는 동안 마차는 어느새 그들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중년인과 갓 약관을 지났을 법한 여인이 어자석(御字席)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닮은 것을 보면 아마도 부녀지간인 모양이었다.
설화가 손을 들어 마차를 세우려는데...
“어이쿠!”
운성이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지며 굴렀다.
순간, 달려오던 말들이 앞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히히히힝!
퍽!
“악!”
바닥을 구르던 운성이 말발굽에 차여 다시 데굴데굴 굴러갔다.
“표운성!”
설화가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한편, 마부석에 앉아 있던 부녀도 몹시 놀란 표정으로 말을 진정시켰다.
“워! 워!”
말이 진정되자 중년인이 서둘러 운성에게 달려왔다.
“괜찮습니까?”
“아이고, 나 죽네!”
운성이 소리 높여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설화가 몸을 흠칫 떨었다.
‘이것은 바로 말로만 듣던 자해공갈(自害恐喝)!’
하지만 자해공갈이라는 것을 모르는 중년인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서 안절부절못했다.
“이보시오. 젊은이! 일어 설 수 있겠소?”
“아이고, 배야. 숨, 숨 쉬기가 힘들어... 끄윽! 윽!”
“젊은이! 젊은이! 이거 큰일이로군!”
운성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다.
그리고 마치 고비를 넘기는 듯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고 나서는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후아! 후아! 이제 조금 살 것 같네. 후아! 후아!”
“오, 젊은이! 괜찮으시오?”
“아직 그 정도는 아니고.”
“이거 미안해서 어쩌면 좋소.”
“그러게 좁은 산길에서 어찌 그리 마차를 험하게 모십니까? 아야야!”
운성은 다그치면서도 가끔씩 인상 찌푸리는 걸 잊지 않았다.
설화로서는 참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굳이 나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중년인이 거듭 고개까지 숙이며 사죄했다.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됐소. 아무래도 크게 다친 것 같으니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의원부터 찾아가보아야겠소. 거기까지 내 데려다 드리리다.”
“아뇨. 급히 호남성으로 가야해서 의원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
“말씀하시오. 젊은이.”
“돈으로 주시면 제가 나중에 알아서 치료해보지요.”
“그래도 되겠소? 상처가 큰 것 같은데...”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그나저나 호남성까지 어찌 갈꼬. 그게 제일 걱정이군요. 아야야...!”
“아! 호남으로 가신다면 우리가 회화(懷化)를 가는 길이었으니 거기까진 태워드릴 수 있겠소이다. 한데 짐마차라 자리가 좀 불편할 텐데...”
“그럼 그것도 좀 부탁드립시다. 저기 저 친구와 함께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그나저나 치료비를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뭐, 고의로 그러신 것도 아니니, 은자 한 냥만 받겠습니다. 게다가 회화까지 태워주신다니까 더 이상은 받지 않겠습니다. 후아. 후아. 아야야..!”
“정말 그걸로 괜찮겠소? 의원에는 가보지 않아도 되겠소?”
“글쎄, 괜찮다니까요.”
운성이 짐짓 짜증 섞인 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중년인으로서는 그런 운성이 마냥 호인(好人)으로만 보였다.
요즘처럼 물가가 비쌀 때라면 치료비와 약재 값을 포함했을 때 은자 한 냥으로는 턱없이 모자랄 것이다.
특히 이런 마차사고라면 후유증을 조심해야 하는 법. 지금은 멀쩡하다고 해도 나중에 병신이 되기 십상이 아닌가.
한데 이 사람은 단지 치료비로 은자 한 냥만 받겠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호인이 또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