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이 달려가 주진석을 안았다.
주진석은 다친 와중에도 소영을 자신의 등 뒤로 돌렸다.
“물, 물러나라. 영아.”
“아버지...”
그러자 양기수가 다시 다가섰다.
“거참, 딸이 같이 가겠다는데 왜 아비가 나서서 방해야? 딸의 자유까지 갈취하는 게 좋은 아비라고 생각해? 앙?”
이제 그들은 완전히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설화가 입술을 쿡 씹었다.
저들은 한때 정파였다. 그렇기에 더욱 분하고 괘씸했다. 하필이면 운성이 보는 앞에서 저런 행동을 하니 더욱 화가 났다.
운성이 나직이 말했다.
“참아. 참는 게 너에게 이익이야.”
웃기지 마. 난 너와 달라. 그래서 난 정파야.
설화가 운성의 손을 뿌리쳤다.
“할아버지도 불의를 보고 숨길 바라진 않으실 거야.”
그녀가 양기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미 결심이 선 그녀의 눈동자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렇다.
불의 앞에서 눈치만 보고 비겁하게 숨는 것은 정의(正義)가 아니다.
정파가 결과주의자라고? 웃기지 말라 그래. 결과보다는 그 과정과 수단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정(正)이라는 거다.
그래서 지금도 나서는 거다.
비록 이번 일로 더 큰 위험이 다가올지라도. 안 좋은 결과가 일어날지라도. 과정이 잘못된 결과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수단과 과정이 올발라야 하기 때문에! 그걸 추구하기 때문에!
“그래서 정파라는 거야!”
설화가 버럭 소리쳤다.
객잔 내에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사람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설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로부터 무시무시한 분기(忿氣)가 휘몰아치듯 우러나왔다.
“뭐, 뭐야? 이건?”
양기수가 뒤를 돌아보고 주춤 물러났다.
설화가 내뿜는 살기는 웬만한 무인으로서도 받아내기 힘들 정도였다.
“악(惡)을 응징할 수 있는 힘! 그것이 정의다!”
쉬이잇- 서걱!
뭔가가 깔끔하게 베이는 소리. 이어서...
툭.
묵직한 뭔가가 바닥에 떨어진 소리.
양기수는 소리를 먼저 들었다. 그가 멀뚱히 내려다보자 자신의 팔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이어서 아찔한 고통이 뇌리를 들쑤셨다.
“으어! 끄아아악!”
그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뒤늦게 추양문이 검을 앞세우고 몸을 홱 돌렸다.
“너, 이 새끼! 누구냐!”
“나? 정파 무인이다!”
설화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초식을 펼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였기에 단 일로(一路)만 휘둘러도 됐다. 물론, 신분을 발각당하지 않기 위해 일부로 초식을 펼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까앙!
청명한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크웃!”
추양문이 어금니를 콱 깨물었다. 상대의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공에서 자신이 밀리고 있었다.
가각! 키기기긱...!
맞댄 검날이 마찰하면서 듣기 싫은 소리를 내질렀다.
이윽고,
카창!
쉬이익!
“커헉!”
추양문의 검이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검기에서 밀린 게다. 검의 재질 차이도 있을 게다.
추양문의 검을 깨트린 설화는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츄아아악!
추양문의 가슴에 대각선으로 선혈이 생기는가 싶더니 이내 피가 솟구쳤다. 그나마 상처가 깊지 않았기에 치명상은 면할 수 있었다.
“크으윽!”
추양문이 두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스윽.
설화의 검이 추양문의 목을 겨눴다. 추양문이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지독한 살기.
차마 설화의 두 눈을 마주 보기도 힘들었다.
“살, 살려주시오.”
찰나, 설화의 눈에서 살기가 폭사했다.
살려달라니. 그런 말을 뻔뻔스럽게도 내뱉나.
하지만 그녀는 곧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검을 거두며 나직이 말했다.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것. 그 또한 정의다.”
그녀가 몸을 휙 돌리고 걸어갔다.
추양문은 그러고 나서도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양기수를 얼른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객잔을 빠져 나갔다.
그제야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도 큰 소리로 떠들진 못했다.
마도 천하의 시대에 정의를 운운하며 나선 자다. 함부로 그에게 박수라도 보냈다간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를 시대다.
그렇다고 그자에게 감히 충고를 할 용기도 나지 않는다.
“사고 쳤군.”
운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어.”
“이 분위기 어쩔 거야?”
“이 분위기가 어때서? 아까보단 낫잖아?”
설화가 태연히 대꾸했다.
“모두 널 주목하고 있어. 마교가 널 추격해오면 이 자들은 본 걸 떠벌릴 거야.”
“그래도 내가 누구인 줄은 모르겠지. 변장을 하고 있는데다가 검술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이들은 그렇다고 치자. 아까 그놈들은? 그놈들은 바로 마교와 이어져 있어. 놈들이 마교에 오늘 일을 알리기라도 하면 넌 금방 꼬리를 잡혀.”
“그 전에 장사에 도착하도록 해야지.”
“저 녀석들이 만약 오늘 밤에 복수하러 다시 오면?”
“혼이 빠지도록 당했으니, 오늘은 얼씬도 못할 걸?”
운성이 픽 웃었다.
“넌 좋겠다.”
“왜?”
“생각이 없어서.”
“뭐야? 죽을래?”
“어이쿠,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이 정의라며.”
“그래도 넌 가볍게 다룰 수 있을 것 같아.”
“사양하지.”
이때 주진석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저어... 감사합니다. 설대협. 큰 은혜를 또 지는군요.”
“아, 아니에요. 그냥 저놈들 하는 행동이 너무 한심해서 나선 겁니다.”
“덕분에 저희 부녀가 이렇게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소영도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설화가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아... 이런 인사를 받으려고 한 게 아닌걸요. 그럼 전 이만 피곤해서 쉬어야겠네요.”
“아, 예.”
설화는 아무래도 이런 자리가 어색했다. 그녀가 얼른 이층으로 올라갔다. 주진석과 소영은 설화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숙여가며 감사했다.
그녀가 시야에서 벗어나자 주진석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부녀는 두 분께 계속 빚만 지는군요.”
“그 빚을 갚을 방법이 있습니다.”
운성이 씩 웃었다.
주진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게 뭔가요? 두 분께 이 은혜를 갚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헤헤.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구요.”
“예, 말씀해주십시오.”
“역시 따님은 소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따님을 구해드렸으니...”
주진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운성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은자 스무 냥 정도면 좀 비쌀까요?”
“예?”
“아, 그게 좀 많다면 은자 열 냥은 어떻습니까? 저희도 목숨을 걸고 지켜드린 것인지라...”
“아... 예...”
주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은자 열 냥에 딸을 구했으니 아깝다는 생각은 없다.
따지고 보면 그의 말대로 목숨을 걸고 딸을 구한 게 아니던가.
아마 모르긴 해도 이 남자는 돈이 급한 모양이리라.
주진석이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딸을 구했는데 은자 열 냥이 대수겠습니까? 먼저 열 냥을 드리고 회화에 도착하면 제가 돈을 찾아 열 냥을 더 드리겠습니다.”
“이제야 말이 통하시네!”
운성이 활짝 웃었다.
그가 주진석에게 귓속말로 전했다.
“그리고 이건 제 친구가 있을 때는 말하지 않는 겁니다. 사실 설씨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낯 뜨거워 하거든요. 물론, 속으론 좋아죽으면서도 말입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주진석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운성이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운성이 그날 밤 얼마나 무서운 존재로 변하는 지를.
第三章 운성출수(雲晟出手)
언덕 위에 달빛이 내려앉았다.
그 달빛을 밟으며 십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모두 흉흉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유독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바로 몇 시진 전에 적수객잔에서 설화에게 당했던 추양문이었다.
“저곳이냐?”
“예, 사형.”
추양문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사형이라고 불린 남자는 적수문의 차기문주감이라고 불리는 앙천검(仰天劍) 황석명(黃錫明)이었다.
그는 양기수와 추양문이 이름 모를 무사에게 당해서 돌아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길길이 날뛰었다.
“감히 적수에서 적수문을 멸시하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내 당장 그놈을 찾아가 목을 베리라!”
결국 분기탱천한 황석명이 자신을 따르는 사제 열두 명을 데리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들이 내려다보는 곳에는 적수객잔이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사형, 가기 전에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놈의 목숨을 제가 직접 거두게 해주십시오.”
추양문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황석명을 바라보았다. 양기수와 자신이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으니 그렇게라도 분을 풀고 싶었다.
물론 놈과 정정당당한 승부를 벌일 생각은 없었다.
황석명이 놈을 제압하면, 마지막에 나서서 목숨만 끊을 생각이었다. 그만큼 황석명의 실력을 믿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마.”
황석명이 듬직하게 대답했다.
추양문이 입 꼬리를 치켜 올렸다.
“감사합니다, 사형.”
“가자!”
십여 명의 무인들이 적수객잔을 향해 우루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적수객잔을 거의 앞두었을 때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어디선가 불쑥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수문의 무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누, 누구냐!”
“꼭 미친개를 두드려 패면, 개떼가 몰려와요.”
상당히 도발적인 말투.
하지만 무인들은 도대체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그저 어둠속에서 귀신의 속삭임처럼 들릴 뿐이었다.
황석명이 애써 침착하게 한 걸음 나섰다.
“지금 말을 거신 분은 누구시오? 모습을 드러내어 소제의 인사를 받지 않겠소?”
그 순간 하늘에서 뭔가 뚝 떨어지는가 싶더니 무리 앞으로 한 사내가 나타났다.
바로 표운성이었다.
“그래, 어디 인사를 올려 보거라.”
상대의 거만한 태도에 황석명이 이를 부득 갈았다. 게다가 직접 보니 자신보다도 한참 어려보이지 않나?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실력이나, 기척을 숨기고 접근한 것들을 봤을 때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될 자.
황석명이 포권지례(包拳之禮)를 취하며 말했다.
“소제 적수문의 앙천검, 황석명이라고 하오. 고명(高名)을 여쭈어도 괜찮겠소?”
“본좌는 표운성이다.”
운성이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