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명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본좌?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
그래도 아직은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상대가 뭘 믿고 이렇게 설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혹 마교와 관련되어 있는 자라면 이쪽에서도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욱 고개를 숙여야 한다.
“표형께서는 어인 일로 소제들의 앞길을 막으시오?”
“형이라니. 난 너희 같은 동생 둔 적 없어.”
황석명은 점점 분이 끓어올랐지만 누르고 또 눌렀다.
그때였다.
황석명 옆에서 계속 머리를 굴리던 추양문이 문득 소리를 질렀다.
“아! 네, 네놈은!”
황석명이 추양문을 돌아보았다.
“아는 자이더냐?”
“분명히 아까 그놈과 한 자리에서 밥을 먹던 자입니다!”
“그래?”
황석명의 표정에 싸늘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렇다면 그놈과 한 패거리라는 뜻이 아닌가.
적어도 마교와 관련된 인물일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 황석명이 물었다.
“혹시 표형께서는 천마신교(天魔神敎)에서 오신 분이오?”
“천마신교? 그딴 건 안 키우는데?”
무인들의 표정에 경악이 스쳤다.
지금 천마신교를 그딴 거라고 했나? 이거야 미치지 않고서야.
하지만 황석명의 미소는 더욱 차가워졌다.
상대가 의외의 실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마교와 관련이 없는 이상 쳐도 된다는 뜻이 아닌가. 게다가 이쪽은 자신을 비롯해서 열네 명. 부상당한 추양문이 빠진다고 해도 열 셋이다.
황석명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럼 비켜주겠나?”
달라진 말투.
그의 태도에서 아까와는 전혀 다른 거만함이 우러나왔다.
표운성이 씩 웃었다.
“이제야 개가 으르렁거리는군. 암, 그래야 개답지.”
“네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오오, 이제 물기 직전인가?”
황석명이 검을 뽑아들었다.
더 이상 말을 섞을 가치가 없는 놈이다. 그가 바닥을 박차며 소리쳤다.
“쳐랏!”
십여 명의 무인들이 운성을 향해 빠르게 쇄도해 들어갔다. 그들의 검날이 운성의 목을 치려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쉬이이익!
까앙! 까가강!
“크웃!”
“악!”
섬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십여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튕겨 날아갔다. 바닥을 한참 굴러간 황석명이 이를 부득 갈고 몸을 일으켰다.
“크웃! 웬 놈들...!”
버럭 소리치던 그가 몸을 움찔 떨고 성큼 물러섰다.
운성 앞에는 어느새 흑색 방갓에 피풍의(避風衣)를 두른 사내들이 병풍처럼 둘러싸며 나타난 게다.
그 위용이 태산처럼 거대해 보여 감히 입 밖으로 말을 흘려내기조차 힘들었다.
‘이, 이놈들은 뭐지?’
방갓 사내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문주님을 해하려는 자, 살아 돌아가길 포기하라.”
“도, 도대체 당신들은...”
방갓 사내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황석명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도 모르게 턱이 달달 떨렸다. 그가 그럴 진데 다른 사람들은 말 다한 것이었다.
열두 사제들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고, 추양문은 아예 주저앉아서 일어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숨이 턱턱 막히는 엄청난 압박감.
그래도 황석명은 적수문의 차기 문주감이었다. 위기 속에서도 일말의 자존심이 그에겐 남아 있었다. 그가 용기를 짜내 소리쳤다.
“당, 당신들 정체가 뭐야?”
방갓 사내들 사이에서 운성이 걸어 나왔다.
“우리? 개 잡는 사람들.”
“헛소리 마라! 어디에서 온 놈들이냐?”
“글쎄, 그건 저승에나 가서 연구해봐.”
“이익...!”
황석명이 검을 꽉 움켜잡았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방갓 사내들이 뿜어대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억눌려버린 게다.
살면서 이토록 막강한 기운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단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솜털이 쭈뼛쭈뼛 섰던 적이 있던가.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적수문을 찾아왔던 마인을 만났을 땐 그랬다.
하지만 그때는 이런 적의가 담겨 있지 않았다.
적수문의 무인들이 공포에 질려 있는 동안에도 운성은 태연히 방갓 사내와 말을 섞었다.
“극신, 왜 나타난 거야. 설마 내가 개 몇 마리한테 물릴까봐?”
극신이라 불린 사내가 입 꼬리를 올렸다.
“미친개에게 물리면 약도 없다지 않습니까?”
“안 물리면 돼.”
“문주님을 호위하는 건 흑영대(黑影隊)의 최우선 임무입니다.”
“지금은 괜찮으니까 물러나 있어.”
“...그럼.”
극신이 순식간에 십여 장을 물러나자, 다른 흑영대원들도 일제히 십여 장 밖으로 물러났다.
운성이 황석명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자, 개야. 이제 기 좀 펴고 달려들어 봐.”
“너 이 새끼...!”
황석명이 분을 감추지 못해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도 흑영대가 물러나서 살기를 거두자, 조금 전보다는 기운을 차린 모습이었다.
‘어디서 이런 놈이 나타난 거지? 밀교라도 생겼나? 정파의 비밀 조직인가? 아니다, 문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어디 문파라는 건가?’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어쨌거나 이곳에서 살아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 정도의 감은 살아있다.
생각지도 않게 일이 꼬였다.
하지만 죽더라도 저 재수 없는 놈만은 죽이고 죽고 싶었다.
그건 적수문의 차기문주감인 황석명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황석명이 검을 고쳐 잡았다.
“네놈만은 죽여주마! 놈을 쳐라!”
쒜에엑!
대답 대신 파공음이 바로 이어졌다.
십여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운성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순간 운성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지금까지 장난기 가득했던 운성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가 손바닥을 들어 앞으로 쭉 내뻗었다.
더 없이 단순한 행동.
하나 그 파급효과는 컸다.
콰콰지직! 파앙!
바닥이 쩍 갈라지면서 마치 거대한 용이 땅속을 헤엄쳐가듯 십여 명의 무인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이어서 비명이 터졌다.
“크악!”
“으아악!”
발 아래로 지룡(地龍)이 지나가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열세 명의 무인들이 쓰러진 것은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지룡장(地龍掌)의 위력이다.
순식간에 초토화가 된 땅바닥을 보며 추양문이 넋을 놓았다. 마치 땅속에 미리 화약이라도 묻어 둔 것만 같다.
‘세, 세상에 이런 무공이 존재하다니.’
아니, 분명 존재한다.
이보다 더 무서운 무공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로서는 아직 한참 어려보이는 운성이 이 정도로 막강한 무공을 사용한다는 것에 놀란 게다.
“불나방.”
불쑥 들린 목소리에 추양문이 고개를 들었다.
운성이 다가왔다.
“아무리 살려주려고 해도 죽을 줄 모르고 달려드는 불나방이지.”
“무, 무슨 소리...”
“살 기회를 줘도 다시 죽을 자리를 찾아오잖아. 지금처럼”
운성의 표정은 더 없이 싸늘했다.
지옥에서 온 사자(死者)라면 저런 표정을 지을까?
추양문이 덜덜 떨며 말했다.
“살, 살려주십시오. 대협!”
“늦었다. 오늘 네 결정이 적수문을 멸문 시킨 것이다.”
“......!”
지금 멸문이라고 했나!
분명 적수문의 멸문이라고!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 남자는 누구기에 적수문을 멸문시킨다는 말을 이리도 태연히 하는 건가?
운성의 말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추양문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운성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이 추양문의 가슴을 겨눴다.
추양문은 살려달란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가라.”
펑!
“커억!”
추양문은 검은 피를 한 움큼 토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그의 가슴에는 손바닥 자국이 움푹 파여 있었다.
“극신.”
운성의 부름에 극신이 옆에 내려섰다.
“흥문 별장은?”
“차진양 태상문주가 죽었습니다.”
운성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이다.
“놈들은?”
“차소저를 쫓고 있으나 아직은 감을 잡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굳이 찾아내 죽이겠단 말이군.”
“남은 은원(恩怨)은 확실히 없애야 할 테니까요.”
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도 확실히 해야지. 적수문에 대해서 말해 봐.”
“적수 시내에서 북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문파입니다. 3년 전에 마교에 굴복하면서 세를 좀 불렸으나, 아직은 규모가 그리 크진 않습니다.”
극신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적수는 크지 않은 지역이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적수문을 제외한 어떠한 문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러한 시시한 문파의 정보까지 훤히 꿰뚫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정보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나 운성은 극신의 이런 정보력이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얼마나 필요해?”
“흑영대 삼개조로 충분합니다.”
“가서 지워.”
“존명.”
명이 떨어졌다.
운성의 단 한 마디로 적수문은 오늘 밤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문파가 될 게다. 극신의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런데...
“아참, 극신!”
“......”
“극신?”
“......”
“얘들아~”
하지만 여전히 이어지는 침묵.
운성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젠장! 성질 급한 놈들! 아아, 이것들 뒤처리는 언제 다 하지?”
운성이 바라보는 곳에는 열 네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쑥대밭이 된 길바닥.
적어도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아야 마교의 추적을 늦출 수 있을 것이다.
‘흑영대 이놈들 분명히 뒤처리하기 싫어서 전부 사라진 걸 거야! 돌아오면 두고 보자!’
“악! 짜증나!”
운성이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
부우엉. 부우엉.
아득히 들려오는 부엉이 울음소리가 어둠을 찢었다.
적수문의 문주 단혁상(但奕上)이 문득 눈을 부릅떴다.
‘기척!’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처럼 곤하게 자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그는 여전히 침상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숨을 고르며 눈알만 굴렸다.
‘만만한 자가 아니다.’
상대의 무공 수위를 확실히 읽어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 그 상대가 침실에 있다는 것!
난감하게 됐다.
이해할 수도 없다.
도대체 상대가 이토록 접근할 동안 어째서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적수문이 강호에 내로라는 문파는 아닐지라도 삼류 무사들만 끌어 모은 곳도 아니었다.
만약 그 정도로 형편없는 곳이었다면, 마교가 굳이 이런 시골 방파까지 찾아와서 굴복시키려고 했겠는가.
어쨌든 단혁상은 그런 적수문에서 이십 년째 장문인으로 지내왔다.
무림이 두려워할 만한 절정고수는 아닐지라도 일류 고수들 서넛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제압할만한 실력은 된다.
한데 이렇게 둔감했다니!
아니, 그건 틀린 말이다.
단혁상이 둔감했던 것이 아니다. 상대의 움직임이 지독히 은밀스러웠기 때문이리라.
도대체 누가?
누가 이 시골 방파를 이토록 은밀하게 방문했단 말인가?
‘마교에서?’
하지만 단혁상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교에서 이런 야심한 시각에 찾아올 까닭이 없질 않나. 이미 적수문이 마교에 매수된 것은 세상에 다 알려진 사실. 마도천하의 시대에 마교가 눈치를 보며 찾아올 일이 무어란 말인가.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이곳에 있는 자는 적이다. 호의는 없을 것.’
언제 침실까지 들어왔을까?
오래 됐다면 왜 자신을 여태 죽이지 않은 것일까?
만약 놈을 친다면 언제 쳐야할까?
머릿속이 한참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불쑥 어둠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소?”
단혁상은 저도 모르게 움찔 떨고 말았다.
최대한 들키지 않도록 기도를 조절했건만, 상대는 그 미세한 차이까지도 감지해낸 게다.
팟!
순간 탁자 위에 불이 밝혀졌다.
등에 불을 밝힌 사람은 방갓을 등 뒤에 걸고 있는 한 사내였다.
단혁상은 체념하고 침상에 바로 앉았다.
“귀하는 뉘시오?”
사내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었다.
“흑영대주요.”
“흑영대주?”
단혁상이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