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방금 그 표정은...’
설화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것도 사기꾼 같은 녀석의 계산된 행동일지도 모를 일.
설화는 더 이상 따지기를 포기하고 빈정거리듯 물었다.
“그래, 알았어. 부하가 있단 말이지?”
“응.”
설화가 비웃듯 말했다.
“네가 대주쯤 되나보지?”
“대주는 아니지만 문파라면 하나 가지고 있어.”
“문파라고? 그럼 네가 문주라도 된단 말이야?”
“응.”
얼씨구?
하긴, 혼자 문파를 세우고 문주라고 자칭할 수도 있는 노릇이겠지.
설화가 픽 웃고는 계속해서 물었다.
“그래, 문도는 몇 명이나 되는데?”
“글쎄.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중원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 다 합하면 천 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 좀 모자라려나?”
설화가 입 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갈수록 가관이구나. 도대체 뭘 먹으면 저리도 뻔뻔할 수가 있을까? 분명 저 도도 어디 무기 상점에서 급하게 구입한 걸 거야.’
도대체 믿을 소리를 해야지.
들통 난 거짓말이라도 어느 정도 믿을 만 해야 당한 사람이 화가 나는 법이다. 한데 이건 너무 허무맹랑하니 화도 나지 않는다.
결국 설화는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거짓말이라는 걸 밝혀서 무안하게 해줄 생각이었지만, 저토록 뻔뻔한 성격으로 보아선 필시 거짓말이 밝혀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또 다른 소리를 하리라.
설화는 눈을 감았다.
충분히 잠을 잔 그녀였지만 운성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피로가 누적되는 기분이었다.
운성이 설화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만히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뭘?”
“그... 내 임무 말이야. 널 수행하는 것.”
“부담돼? 그럼 지금이라도 돌아가도 돼. 선금은 돌려받지 않을게.”
“어허, 낭자께서 어찌 말을 이리도 서운하게 하실까?”
“할 말이 뭔데?”
“그냥 위험수당 정도는 받아야하지 않을까 싶어서.”
“위험수당이라니?”
“사실 어제처럼 문파 하나를 멸문시킨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잖아. 아무리 내 임무라지만 그땐 나도 잠을 자야할 시간이었고, 네가 내말 듣고 사고만 치지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고. 그러니까 앞으로라도 이런 경우에는 초과근무수당에 위험수당을 쳐준다면 내가 더욱 열심히...”
퍽!
설화가 던진 봇짐이 운성의 안면을 강타했다.
봇짐이 떨어지자, 운성이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시끄러! 그냥 가버려! 선금은 돌려받지 않을 테니까!”
“뭐야? 정말 간다?”
“그래. 잘 가.”
설화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운성이 어정쩡하게 일어나며 다시 말했다.
“나 간다?”
“......”
“간다?”
“아직도 안 갔니?”
“......”
운성이 배시시 웃으며 설화에게 봇짐을 갖다 주었다.
“헤헤. 농담이었어. 내가 널 두고 어떻게 가겠어? 그래도 계약은 계약인데.”
‘흥! 완수금은 받아내겠단 심보군!’
설화는 눈을 감은 채 그저 덜컹거리는 짐마차에 몸을 맡겼다.
그녀로서는 떼어내기 힘든 혹이 붙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第四章 악사파(惡士派)
운성 일행은 오늘 밤 노숙을 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마을까지 제법 거리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숲 속 적당한 곳에 자리를 깐 일행들은 건포로 대충 배를 채우고는 잠을 청했다.
워낙 아침부터 서둘렀기에 금방 피로가 몰려왔다.
하지만 마음이 심란한 설화는 쉽게 잠을 잘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아버지가 걱정됐다.
또 어제 자신이 건드린 두 명의 적수문 무인도 신경이 쓰였다.
‘만약 그들이 마교에게 어제 일을 말한다면 어쩌지? 혹시 나란 걸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역시 정파 운운한 건 너무 경솔했어.’
지나간 일들은 아무리 완벽하더라도 아쉬움이 남기 마련인가보다.
운성의 말로는 멸문시켰다지만 그걸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멸문? 도대체 어떻게 돼 먹은 애가 그런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할아버지랑 강무 아저씨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놈을 선택하신 걸까?’
생각할수록 기가 차고 화가 났다.
서글픔과 그리움이 묘한 짜증과 분노로 점점 바뀌고 있었다. 이때,
바스락.
아주 미세한 소리.
나뭇잎이 무언가에 밟히는 소리다.
‘인척!’
동물의 발걸음 소리가 아니다.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
사람이다. 누군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것도 매우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좋은 의도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누구지? 산적인가?’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곳은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제법 되는 숲이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쯤에서 노숙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노리는 산적도 있으리라.
설화는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깝진 않았다. 어쩌면 숨어서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운성 곁으로 다가갔다. 운성은 세상모르고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운성.”
그녀가 나직이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운성은 코만 골 뿐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야, 표운성.”
“음냐... 쿨...”
설화가 입술을 쿡 씹고는 운성의 귀에 대고 다시 속삭였다.
“앗, 은자다!”
“뭐? 어디어디?”
운성이 벌떡 일어나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휑한 숲의 전경과 꺼져가는 모닥불밖에 없었다.
“뭐야? 은자가 어디 있어?”
“조용히 하고 내 말 잘 들어.”
“흐아암~ 무슨 일인데?”
운성이 투덜거리며 물었다.
“근처에 누군가 있어.”
“누가?”
“몰라. 아무래도 산적 같아.”
운성이 화들짝 놀라며 버럭 소리쳤다.
“뭐야! 산적이 있단 말이야? 그럼 이거 큰일... 읍!”
워낙 큰 소리였기에 설화도 깜짝 놀라며 얼른 운성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운성의 방정맞은 목소리는 모닥불 근처에서 자던 모든 사람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곤히 자던 주진석과 소영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일어났다.
“산, 산적이라니요?”
“아, 아버지...”
소영이 아버지의 손을 꼭 잡으며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설화가 어금니를 쿡 씹었다.
애초에 운성을 깨운 게 잘못이었다.
이쪽에서 먼저 알고 대비한다면 역습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리고 혼자 하는 것보단 조력자가 있다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운성을 깨웠는데...
‘아아, 내가 미쳤지.’
아니나 다를까, 숲속에서 사람들이 한 명씩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하나같이 험상궂은 표정에 기골이 장대한 거한들이었다.
“크크크. 들켜버렸군.”
“형님. 싱싱한 계집도 하나 있는뎁쇼?”
거한들의 등장에 주진석과 소영은 사색이 되고 말았다.
설화가 나서려는데, 마침 운성이 벌떡 일어나더니 주진석과 소영 앞을 가로막고 섰다.
운성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웬 놈들이냐?”
“훗, 애송이가 제법 기개가 있구나.”
커다란 도를 어깨에 짊어진 거한이 입 꼬리를 치켜 올렸다.
운성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웬 놈들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애꾸눈의 사내가 불쑥 나섰다.
“우리는 괴륭산(傀隆山)의 악사파(惡士派)다! 이분은 우리 두목이신 장기춘(藏基春)님이시다!”
“장기춘...?”
“그렇다!”
순간 운성이 후다닥 물러났다.
“아니,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재채기 한 번에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고, 웃음소리에 호랑이도 놀라 도망가고, 이름 석자에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그 장기춘이란 말이오?”
“뭐, 그, 그렇지.”
장기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운성이 더욱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렇다면 귀하들께선 손짓 한 번에 나무 삼천 그루가 쓰러지고, 입김 한 번에 계곡물도 얼려버리며, 오줌 한 번 누면 괴륭산에 폭포수가 흐른다는 바로 그... 그... 저... 이름이 뭐였죠?”
“악사파...인데...”
“아! 바로 그 악사파란 말이오?”
“그, 그렇다. 마지막 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럴 수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무림최고절대고수(武林最高絶對高手) 지상최대잔악도적(地上最大殘惡盜賊)이라는 별호를 가진 장기춘을 만나다니! 우린 다 죽었구나!”
운성의 호들갑에 악사파는 오히려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반면 주진석과 소영은 더욱 새파랗게 질렸다. 주진석이 운성을 향해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 저들이 그토록 무서운 자들입니까?”
“물론이지요! 천상천하유아독존 무림최고절대고수 지상최대잔악도적을 이런 야.심.한. 시각에 만났으니 우리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남들 다 자는 야.심.한. 시각 아닙니까? 수당 없이는 아무도 일 하지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잠도 자지 않고 우리를 도와주러 오겠습니까? 그러니 도움을 구할 수도 없고. 게다가 이렇게 위.험.한. 도적을 만났으니!”
그제야 설화는 운성이 왜 저리 호들갑을 떠는지 알 수 있었다.
야심한 시간이라는 것과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는 것을 보면, 분명 아까 말했던 초과근무수당과 위험수당을 받고 싶어서 저러는 것이리라.
설화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일어났다.
“주대인.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나서보겠습니다.”
그녀가 저벅저벅 걸어가서 장기춘 앞에 섰다.
“목적이 뭔가?”
장기춘은 곱상한 사내가 나타나서 대뜸 말을 놓자 눈살을 구겼다.
“이건 또 뭐야? 너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듣고도 반항을 하겠단 건가?”
“물러가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 모두 벨 것이다.”
설화가 당당하게 맞섰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만약 놈들이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면 조금 버거울 수도 있었다. 물론 일대 일의 상황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한꺼번에 덤빈다면?
단순한 도적들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이상하게 이들이 쉽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렇다고 저런 사기꾼 같은 운성에게 맡길 수는 없어.’
설화가 마음을 다잡고 검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장기춘이 픽 웃으며 애꾸에게 눈짓을 했다.
“네가 상대해줘라.”
“예, 형님.”
애꾸가 입 꼬리를 치켜 올리며 나섰다. 그는 두 자루의 커다란 낫을 들고 있었다.
설화가 미간을 찡그렸다.
“곱게 물러나지 않겠단 뜻이군.”
“클클. 애송아, 상대를 잘못 골랐다!”
순간 애꾸가 쏜 화살처럼 달려 나갔다.
카창!
설화의 검과 애꾸의 낫이 교차하면서 불꽃이 일었다. 설화는 뒤로 몸을 성큼 물리면서 눈을 부릅떴다.
‘무공을 익혔어!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애꾸는 더 이상 그녀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가 빠르게 설화의 품으로 짓쳐들었다.
쒜에엑!
낫이 허공을 가르며 설화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헛!”
설화가 얼른 몸을 뒤틀며 뒤로 도약했다.
파라라락!
아슬아슬하게 스친 낫이 설화의 팔뚝을 스쳤다.
“칫! 쥐새끼 같은 놈이군.”
애꾸가 혀를 차며 낫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핥았다.
“어째 피에서 계집 맛이 나누. 클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