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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문주
작가 : 눈매
작품등록일 : 201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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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화
작성일 : 16-07-19     조회 : 732     추천 : 0     분량 : 5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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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의 산새들조차 숨을 죽인 새벽.

 어둠 속에서 운성은 누군가와 나란히 서 있었다.

 “극신, 어떻게 된 거야?”

 “엽상섭이 마교의 포위를 뚫고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방갓을 눌러 쓴 극신이 대답했다.

 “확실해?”

 “공식 정보는 그렇습니다만, 귀적단(鬼跡團)에서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귀적단주는 뭐라고 해?”

 “아마도 엽상섭이...”

 “마교에 예속됐다?”

 극신이 운성을 돌아보았다.

 “짐작하셨군요.”

 “간단하잖아. 엽총관이 빠져나왔다면 마교는 지금 그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거야. 그런데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 게다가 엽총관이 마교의 이목을 속이고 여기까지 무사히 올 정도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되진 않아.”

 “역시 마교와 손을 잡은 것일까요?”

 “확실하진 않아. 다만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아. 그 도적들도 그렇고.”

 “악사파 말씀이십니까?”

 “그래. 악사파 녀석들 죽을 때 표정을 분명히 봤어. 그건 마치 배신당한 자의 표정이랄까...”

 극신이 조금 놀란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럼 엽상섭이 거기까지도 계획했단 말입니까?”

 “글쎄.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이야. 다만 엽총관이 나타날 때 그 시기가 너무 절묘했다는 것도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일리가 있군요.”

 “일단 확신하긴 힘들어. 단지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총관일지도 모르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어.”

 “조심하십시오.”

 “훗! 지금 내 걱정하는 거야?”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극신이 부드럽게 웃었다.

 운성이 피식 웃고는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댔다.

 “장난을 좀 쳐보면 어떨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적수문에 흔적을 남기는 거지.”

 “흔적이라면...”

 “비검문의 흔적을 남겨야겠지. 마치 엽상섭이 저지른 것처럼 보이도록.”

 “그럼 마교가 곧바로 쫓아올 텐데요.”

 “그래, 그걸 보자고. 그때 엽상섭이 어떻게 나오는지.”

 “마교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마교와 드러내놓고 대립해야 할 일이 발생하리라.

 하지만 어디까지나 의뢰를 맡은 일이다.

 의뢰자가 죽었다고 하지만, 의뢰 내용은 아직 유효하다.

 만약 엽상섭이 자신의 임무에 위협이 될 인물이라면 분명히 알아보고 제거하는 것이 당연하다.

 “한 번 놀아보자고.”

 운성의 말에 극신이 입 꼬리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번거롭더라도 수고 좀 해. 곧 해가 뜰 테니 가봐.”

 “그럼, 몸조심하십시오.”

 말을 마친 극신이 기척을 감췄다.

 잠시 후, 먼동에서 미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第五章 흔적(痕迹)

 

 

 

 다그닥. 다그닥.

 운성과 설화를 태운 마차는 부지런히 동쪽으로 향했다. 어제 산적들을 물리쳤던 엽상섭과 신주대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디선가 몸을 숨긴 채 은밀히 따라오고 있을 것이다.

 설화는 슬픔에 젖은 얼굴로 멀어져가는 풍경들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지나친 바위가 멀어지고, 나무가 멀어지고. 산이 멀어지고.

 멀어지고, 멀어지고, 멀어지고.

 ‘그리고 이젠 할아버지마저...’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마음먹은 것처럼 감정 조절이 안 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던 단 한 분이었는데. 이제 그 한 분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그때 마차가 유난히 덜컹거렸다. 그 바람에 자고 있던 운성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얏!”

 운성이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투덜거렸다.

 “거, 길 좀 평탄한 곳으로 가지.”

 잠이 깬 운성이 설화를 돌아보았다.

 “너 우냐?”

 설화는 이마에 핏대가 섰지만 가만히 무시했다. 지난 시간동안 운성과 함께 하면서 느낀 것은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행동이 설화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자.”

 운성이 불쑥 내민 것은 작은 손수건이었다.

 설화가 빤히 보자 운성이 멀어져가는 풍경으로 눈길을 돌린 채 말했다.

 “남장하고 울면 눈에 띈다고.”

 설화는 멈칫멈칫 운성이 내민 손수건을 받았다.

 운성이 등을 기댄 채 물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운성이 주위를 살피더니 설화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엽총관이라는 사람 말이야.”

 “총관님이 어때서?”

 “어떻게 혼자만 살아왔을까?”

 “할아버지께서 부탁하셨다고 했잖아.”

 “하지만 나타난 시기도 너무 절묘했잖아.”

 “운이 좋았던 거겠지.”

 “운? 과연 운일까?”

 그제야 설화는 운성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며 쏘아붙였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니, 내 말은 조심해서 나쁠 건...”

 “시끄러. 날 위해 목숨 걸고 달려오신 분이야!”

 “알았어, 알았다고. 조용히 얘기하자.”

 “너랑 할 얘기 없어!”

 그때 마차 옆으로 엽상섭이 내려섰다.

 “무슨 일입니까, 아가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화가 얼른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괜히 이런 사사로운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혹시 무슨 일이 있다면 곧바로 불러주십시오.”

 “네, 총관님.”

 “그리고...”

 엽상섭이 운성을 힐끗 보았다.

 “이런 시기일수록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마교 놈들은 속을 알 수 없는 악마와 같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서 아가씨에게 접근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저와 아가씨를 이간질할 수도 있지요.”

 그러자 운성이 불쑥 끼어들었다.

 “호오, 그럼 그 마교 놈들이 총관의 모습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군요?”

 “야! 표운성!”

 설화가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엽상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아가씨. 이 마차와 함께 하는 사람 누구라도 마교의 수족일 수도 있습니다. 주대인과 주소저도 예외는 아니지요. 물론,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고...”

 엽총관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운성을 보았다.

 “표대협도 예외는 아니지요. 아무도 믿지 마십시오, 아가씨. 오직 아가씨만을 믿으십시오.”

 설화가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총관님.”

 “그럼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십시오.”

 엽상섭이 몸을 날려 사라졌다.

 운성이 툭 던지듯 내뱉었다.

 “난 믿어도 돼.”

 설화가 고개를 들어 운성을 보았다.

 참 터무니없을 정도의 뻔뻔함이었지만, 어쩐지 설화는 지금 그의 말이 좋았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분명히 같은 말을 하셨을 테니까. 오직 할아버지만은 믿으라고.

 조금 전 아무도 믿지 말라는 총관의 말은 너무나 차가웠다. 지금껏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자랐던 그녀에게는 너무 크고 무거운 말이었다.

 그런데 운성이 말했다.

 자신은 믿어도 된다고.

 그 말이 어떤 의도이건 지금 그녀에게는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운성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당최 아무도 믿지 말라면서 무슨 일 생기면 불러달란 건 또 뭐야? 그건 믿으란 거야, 말란 거야? 역시 저 사람 말에 논리가 없어. 앞뒤가 안 맞는다고.”

 “풋.”

 설화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총관님은 내게 주의를 주고 싶으셨던 걸 거야. 내가 얼마나 안락한 환경에서만 자랐는지 잘 아시니까.”

 “그렇다면 말이 틀렸어. 당당한 자라면 나만은 믿어도 된다고 해야지. 저런 사람은 더욱 믿을 수가 없단 말이지. 나 같으면 ‘저도 믿지 마세요.’라고 하는 사람은 절대 믿지 않겠어.”

 설화는 가만히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내 앞에서 총관님을 나쁘게 말하는 것은 참아줘. 내가 아직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차설화.”

 운성이 갑자기 이름을 부르자, 설화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믿어도 돼.”

 운성의 표정이 워낙 진지했기에 설화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미소로 답했다.

 “고마워.”

 처음이었다.

 운성이 함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만약 그녀 혼자였다면 지금쯤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게다. 거기에 총관님의 저런 이야기까지 들었다면 사무치도록 외롭고 고독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외로움을 운성이 보듬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어진 운성의 말을 듣고 그것이 섣부른 판단이라고 확신했다.

 “돈 줘.”

 “또 왜!”

 ‘이놈은 분위기 깨는 것만큼은 절정고수야!’

 “그 손수건 값...”

 “뭐?”

 “내가 손수건 줬잖아.”

 “치사해! 안 받아! 가져가!”

 “그건 안 돼.”

 “왜!”

 “한 번 사용한 건 반품이 안 돼.”

 “너 정말...!”

 “신중구매 했어야지. 헤헤.”

 결국 설화가 동전을 집어던졌다.

 “자! 가져가라! 가져가! 그거 모아서 궁궐지어라!”

 “헤헤, 고마워.”

 운성이 헤벌쭉 웃었다.

 하긴, 이런 놈이 마교라니.

 의심을 하라고 해도 의심할 수가 없을 게다.

 설화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

 

 나뭇잎이 바람결에 마당을 굴렀다.

 휑한 마당을 가로지르는 나뭇잎은 얼마 가지 못해서 누군가의 발에 밟히고 말았다. 나뭇잎을 밟고 선자는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맹호(猛虎)의 그것과 닮아 있어 범인이라면 감히 마주치기도 어려운 기운을 뿜고 있었다.

 노인은 가늘게 뜬 눈으로 텅 비어있는 마당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그는 마치 집터를 알아보러 온 사람처럼 면밀히 건물을 살폈다. 어디에 흠집이 있는지, 어디에 빛이 잘 드는지. 어디가 부실한지.

 그가 건물을 한차례 훑었을 때, 누군가 그의 뒤에 다가와 섰다. 구릿빛 피부에 탄탄한 체구를 가진 사내였다.

 “어떻습니까? 파검(破劍) 장로님.”

 파검 장로.

 사내는 분명 노인을 보고 파검 장로라 했다.

 만약 그 별호를 누군가 들었다면 당장 숨부터 죽이고 몸을 사렸으리라.

 파검 천자령(千自逞). 그는 마교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장로였다. 실제로 장로들 사이에서 서열을 따지더라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자였다.

 검사들은 검으로 대상을 베어낸다.

 하지만 파검은 검으로 대상을 부숴버린다. 그의 검에 당한 자는 시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온몸이 산산이 터져나가거나 부서져버리므로. 그의 독자무공인 수라파천검(修羅破天劍)의 힘이자 무서움이다.

 그래서 그의 별호가 파검이다.

 “확실히 흔적을 지웠군.”

 파검이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가 텅 빈 마당을 가로질러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가 대청으로 들어가 태사의에 앉았다. 모든 가구의 배치는 이곳에 사람이 살던 때와 똑같았다.

 다만 사람만 어디로 증발이라도 해버린 듯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바로 적수문이었다.

 파검이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천멸단주(天滅團主). 자네 생각은 어떤가?”

 “용골산(鎔骨酸)을 사용해서 흔적을 지운 것 같습니다만 치밀성이 조금 떨어지는군요.”

 천멸단주 적충(赤忠)이 대답했다.

 천멸단은 마교의 뿌리가 되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동시에 마교 내에서 가장 큰 조직이었다.

 천멸단은 주로 마교의 무사들을 훈련시키고 고수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무예 실력이 돋보이는 자들은 실제 임무에 투입되기도 했다. 그들을 특별히 천멸조(天滅組)라고 불렀다.

 현재 천멸단주 적충은 천멸조를 이끌고 적수문을 조사하러 온 것이었다.

 적충의 대꾸에 파검이 물었다.

 “치밀성이라... 어떤?”

 “시체들은 흔적을 찾기 힘드나 곳곳에 검기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추혼단(追魂團)을 부른다면 곧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혼단은 각종 수사에 관련한 임무를 맡는 곳이다. 그들은 무공 실력보다는 머리가 좋은 자들이다.

 사건의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내고, 원흉을 찾아낸다. 쫓는 자가 있을 때는 놀라운 추종술(追從術)을 발휘하기도 한다.

 만약 이곳에 추혼단주가 있었다면 일견(一見)에 원흉을 밝혀냈으리라.

 “추혼단까지 부를 것도 없네.”

 “예?”

 파검의 말에 적충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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