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씩 주의 깊게 읽어봐도 별 다른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설명서만 살피다 아래쪽 중앙으로 자그맣게 새겨진 페이지 숫자를 발견한다. 이상하게도 첫 페이지부터 ‘2’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처음부터 그가 받은 설명서는 단 한 장뿐이었다. 만약 이 기계를 이용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있다면 사람들이 노릴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어쩌면 누군가에게 감춰져 있을 다른 페이지들을 기억해 두기로 한다.
기계를 살피다보니 어느 덧 병원으로 향할 시간이 다가왔다. 구체적인 계획을 듣지 못했지만 분명 사람이 북적거리는 시간을 이용하면 적어도 해코지 당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자신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간호사의 계획에 따라 조용히 차에 오른다. 그리 막히지 않는 도로에서도 좀처럼 빠르게 이동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제 사람이 죽어나간 자리에 빨리 도착해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을 돌아왔지만 한창 환자들이 북적이고 있을 시간에 맞춰 병원입구에 도착했다. 감정조절장치도 챙기지 않은 채로 원장을 만나서 무슨 말들을 꺼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하다. 조심스럽게 어젯밤 지나왔던 길들을 통해 병원 안으로 발을 옮겼다. 병원을 가로막고 있던 마지막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간호사의 얼굴이 보인다.
조용히 다가가 다음 계획들을 들으려고 했지만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쁘게 일하는 모습이 병원을 직접 찾아오라고 말하던 어제의 모습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한참동안 문 앞에서 주뼛거리자 막내 간호사가 다가와 진료 내용을 물었다. 곧장 원장실로 가면 되는 줄 알았던 그에게 고비가 찾아온 것 같다. 좀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던 그에게 수간호사가 먼저 진료의뢰서를 건넨다.
“평소에 쓰시던 대로 써주시면 돼요. 날짜와 성함까지 모두 적어주시면 됩니다.”
잠깐 동안 그에게 다가와 한다는 말은 평소에도 하지 않던 의뢰서 작성에 대한 안내였다. 어떤 꿍꿍이가 있는 진 모르지만 로봇처럼 주인이 시키는 만큼만 움직이기로 마음먹는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그의 이름이 호명되고 도무지 달라지지 않은 상황 속에 원장을 만나러 갈 차례가 다가왔다. 마지막 희망을 안고 간호사를 쳐다보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 없이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결국 혼자 남은 그가 나서서 원장을 만나기로 한다. 천천히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표정 없는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서류를 작성하던 원장의 얼굴이 준비되지 않은 방문에 조금 의아한 듯 보인다.
“약속한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곳에 찾아왔군. 뭐 사람이 많을 때 물건을 주고받는 것도 어색하지는 않겠지. 그나저나 기계는 가지고 왔나?”
편안하게 흘러가는 의사의 말투는 어젯밤 사람을 죽인 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덤덤하게 일과를 보낸 악마의 음성이 이토록 역겨울 줄 알았다면 조금 늦게 찾아와도 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물건을 전달하기 전에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딸과 경비아저씨 그리고 돌아가신 의사선생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걸 말해주십쇼. 그래야만 제가 소지한 기계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어젯밤, 죽어버린 사내를 직접 보고도 당당하게 제안을 해오는 그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듯 무안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어차피 그를 먼저 죽인다면 어디에 숨겨뒀을지 모르는 기계를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뻔했다. 일을 쉽게 처리하기 위해선 별 것 아닌 요구사항 쯤은 들어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좋아.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이야기 하도록 하지. 우리 천천히 차나 한잔 하면서 얘기를 나눠볼까”
원장실 책상에 놓여있는 전화로 뜨거운 커피 두 잔을 부탁한다. 섣불리 상대를 먼저 공격할 수 없을 바엔 조금씩 서로를 분석하는 시간을 갖으려 했다. 커피가 방에 들어오기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다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인물이 다가온다.
“환자분들이 한창 많을 때라 제가 대신 가져왔어요. 아빠. 아니 병원에서는 선생님으로 부르라고 하셨죠.”
오랫동안 보지 못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덜컥 숨이 막혔다. 생각보다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긴장한 채로 지키고 있던 자리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병원에서는 당연히 아빠라고 하면 안 되지. 몇 번을 알려줬는데도 아직 어색한 모양이구나.”
“그러게요. 아직 입에 붙지가 않네요. 근데 이 분은 502호 사시던 남자분이잖아요? 두 분이서 무슨 얘기 나누셨던 거예요?”
그녀가 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잠깐 있고 있었다. 각자 기계를 노리고 있는 사람이 아버지와 딸의 관계라는 사실에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선뜻 입을 열지 못한다. 적잖게 당황한 그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땀이 많이 나네요. 에어컨을 최대한 틀어놓긴 했는데 아직 더우신가 봐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남처럼 자연스럽게 대하는 태도가 이 전에 다정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원장선생님과 중요한 얘기 중에 갑자기 오셔서 조금 놀랐나 봐요.”
그녀 역시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세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눈치껏 그녀를 내보내고 단 둘이 남겨진 순간을 기다렸다.
“알겠어요. 상담 중에 너무 오래 있었죠? 얘기 나누시고 나중에 봬요.”
성급히 문을 닫고 나가는 뒷모습에 무언가 많은 비밀이 감춰진 듯하다. 그러나 수많은 용의자 중에 한 명일 뿐, 당장은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나가는 동안 생긴 공백의 시간동안 나란히 앞에 놓인 커피를 마신다. 제법 긴장한 탓인지 뜨겁던 커피도 술술 넘겨 버렸다. 잔을 돌리며 여유를 부리던 원장이 못 다한 이야기들을 시작한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얘기 하겠네. 방금 내 방에 왔던 저 아이 말이야. 쟤가 바로 죽은 김성남 선생님의 딸이라네.”
돌아가신 선생님에게 딸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장례식을 치루는 동안에도 가족이라고 나타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더 많은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경비 일을 보던 사람은 한 때 우리와 일을 했던 실력 있는 엔지니어였지. 죽은 양반과 나까지 셋이 힘을 합쳐 감정을 조절 할 수 있는 기계를 완성했어.”
원장의 입에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던 지난 이야기들이 쉽게 흘러 나왔다.
“나와 엔지니어는 조금 더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살인의 욕구나 성적인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삽입하려고 했지. 그런데 그 고리타분한 의사양반이 반대하고 나선거야.”
뒤이어 들은 원장의 말은 간단했다. 두 사람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하자 의사선생님은 몰래 그에게 기계를 넘긴 것이다. 직접 의사선생님에게 찾아가 설득을 했지만 좀처럼 통하지 않자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나도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죽음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지. 그 사람이 환자가 아닌 의사였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말이야.”
이제는 더 이상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 말을 끝낸 원장의 눈빛은 너무도 빛나고 있었다. 과거에 대한 깊은 회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위대한 기계를 완성시켰다는 우월감에 사로 잡힌다. 결국 돈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앞으로도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분노로 치를 떨다 원장의 얼굴 쪽으로 날아가는 주먹이 얼굴에 닿기도 전에 닫힌 문이 열린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잠들 시간인 것 같은데 너무 오랫동안 있는 거 아니에요?”
원장실로 찾아온 사람은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커피를 전해주고 나간 그녀와 데스크를 지키던 수간호사였다. 두 사람의 말이 끝나고 놀란 표정으로 원장을 바라보자 어느새 깊이 잠들어 버린 원장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어젯밤 잠에서 깨지 못한 사내의 모습처럼 힘없는 몸짓에 또 다시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 같아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예요? 간호사님 이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잖아요.”
당황한 그를 달래기 위해 조금씩 천천히 다가와 익숙하게 설득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말아요. 잠깐 잠이 든 것뿐이에요. 원장선생님이 지난번부터 저를 의심하고 있었거든요. 아무래도 약이 든 커피를 마시게 하려면 아가씨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았어요.”
간호사의 옆 자리에 서있는 그녀의 모습이 아까와는 다르게 제법 편안해 보인다.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다 나갔기에 망정이지 그렇게 크게 소리 지르면 옆 동네 경찰서까지 들리겠어요.”
반갑게 그에게 농담을 건네는 모습이 예전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듣지 못한 비밀들이 또 다시 맞춰야 할 숙제로 다가온다. 그 전에 잠이 들어버린 원장을 자연스럽게 이동시키기 위해 세 사람이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