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네의 말을 얼마나 믿을 거라고 생각하나? 모든 관계는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어. 자네가 나를 만나려고 하는 이유도 알고 있지. 혹시 이게 필요한 것 아닌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낡은 주머니 사이로 꺼내놓은 물건은 그가 찾던 설명서였다.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채워 넣은 글자들이 제법 많은 기능을 설명하는 듯하다. 앞에 놓인 종이만 차지 할 수 있다면 오늘 그가 맡은 임무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떻게 하면 설명서를 가질 수 있을지 궁리하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 놓기로 한다.
“이미 제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많은 진실을 알고 계셨나보네요. 그렇다면 얘기가 좀 더 수월해질 수 있겠어요. 별 다른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설명서를 저에게 넘겨주시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그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희열이 피어올랐다.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갖고 있던 목적은 분명하다. 설명서를 빼앗아 감정조절장치를 노리는 많은 사람들의 욕심을 철저히 깨부수는 일이다. 그것이 돌아가신 의사선생님이 지키고 싶어 했던 환자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치밀한 작전으로 그를 찾아 온 아저씨는 예상대로 쉽게 설명서를 내어주지 않는다. 노리고 있는 것이 어떤 건지 분명해 보이지 않았기에 설득할 만한 방법을 찾기 힘들었다.
“머리를 굴려봤자 별 다른 방법은 나오지 않아. 딱 하나만 제안 하지, 그것만 들어준다면 설명서는 나한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거야.”
처음과 달리 대화의 주도권이 아저씨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다. 사냥꾼에게 잡혀 질질 끌려가는 사냥감처럼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한심하다.
“지금 그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아가씨를 처리해줘. 그렇지 않으면 내가 먼저 사라지게 될 거야. 그 후에 나를 찾아온다면 이 설명서를 자네에게 넘기도록 하지.”
거침없이 쏟아 내는 아저씨의 이야기가 무슨 근거를 통한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의 원장과 아저씨는 돌아가신 의사선생님과 함께 감정조절장치를 개발했다, 의사선생님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을 원장과 아저씨에게 돌리고 있을 것은 뻔한 일이다. 게다가 어젯밤 세상을 떠났다던 부인 역시 어쩌면 그녀의 소행일지도 모른 다는 의심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무슨 마음인지는 전부 이해 할 수 있었지만 선뜻 부탁을 들어주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제야 자신의 편이 생긴 것 같아 안심되었던 마음이 또 다시 벌어진 살인에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한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앞에 놓인 설명서는 그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듯 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이틀 후 다시 이곳으로 오겠네. 만약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면 이대로 우리 계약이 파기 된 것으로 간주하지.”
자신이 생각한 계획 끝에 선택한 마지막 말을 남기고 아저씨는 카페를 빠져나갔다. 잠들어 있는 원장과 사건에 개입돼버린 수간호사, 아저씨가 노리고 있는 그녀까지 아무도 그의 편은 없었다. 오로지 자신이 세운 경로를 보며 내비게이션을 따라 움직이듯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갈 뿐이다.
이제 아파트에 혼자 있을 그녀에게 가야할 시간이 왔다. 그의 손에 쥐어있을 설명서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위해 어떤 말들로 변명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 할 수 없어 카페 앞에 세워 둔 차에 몸을 실었다. 마음이 급한 탓에 평소에도 자주 다니던 익숙한 길이 오늘 따라 낯설게 느껴진다. 핸들을 이리저리 꺾어 보지만 속도감을 즐기는 레이싱 게임처럼 반응 속도가 평소와는 다른 것 같다.
자신의 마음이 불안정한 탓에 운전도 생각만큼 되지 않는 것 같아 갓길에 차를 세운다. 작은 감정 하나에 따라 운전까지 서툴러져버린 자신이 너무도 나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감정조절장치로 안정된 마음을 갖게 된다면 어설픈 운전 실력도 나아질 수 있을까? 사람들이 기계를 갖고 싶어 하는 이유가 돈과 치료의 목적이라면 그에게는 정상적인 삶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물건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차로 이동하려다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자동차를 쳐다본다. 자세히 보면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였지만 분명 누군가가 만지고 간 흔적이 남아있는 것 같다. 이리저리 차 안을 살피며 다시 시동을 걸다 주변을 가득 채운 충돌소리와 함께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풀려온다. 길가에 세워진 그의 차를 누군가가 크게 받은 것 같다. 뒤를 돌아 피의자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한번 흐릿해진 의식이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지 감이 오지 않는 상황에서 무거웠던 눈동자만 힘겹게 들어올린다. 고개를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가벼운 부상은 아닌 듯 했다. 가냘프게 뜬 눈으로 자신이 있는 곳을 살피다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대충이나마 장소를 가늠한다. 바쁘게 뭔가를 수리하는 모습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의식을 회복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얇은 소리를 뱉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드세요? 꼬박 하루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어요. 성급하게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말부터 천천히 해보세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사고가 나고 곧장 그녀의 아파트로 실려 온 것 같다. 사고 이후 이곳에 오기까지 어떤 과정들이 일어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약해져 있고 그를 지켜줄 사람은 그녀뿐이다. 허튼 짓을 한다 해도 방어 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먼저 그녀가 시키는 대로 조금씩 소리를 내보기로 한다. 동물의 울음소리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만 내뱉다 조금씩 턱을 움직이며 짧은 단어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무..슨...일이....있..었..나요?”
힘겹게 내뱉은 첫 마디는 아파트에 오기까지 어떠한 과정이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가 조금씩 말을 할 수 있는 것에 안도한 그녀가 차분히 대답을 이어간다.
“어제 갓길에 세워 둔 차를 누군가가 크게 들이 받았어요. 경찰이 오기 전에 일을 수습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어요. 분명 저희들의 계획을 방해하려는 인물이 있는 것 같아요.”
원장은 이미 잠에 빠진 상태였고 경비아저씨는 카페를 빠져나간 후였다. 그를 노려도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거란 걸 알면서 이런 일을 벌인 사람이 누구일지 고민해본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자 생각하는 것조차 통증으로 다가왔다.
“새벽에 잠깐 간호사님이 와서 몸을 봐주시고 갔어요. 당분간은 무리하게 움직이면 안 될 것 같다고 하시던데요. 나머지 일은 알아서 할 테니 우선 편히 쉬세요.”
자신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여자는 과연 얼마나 안전한 사람일까? 그가 사고를 당하게 된 것은 어떻게 알게 됐으며 현장에서 목격한 것들은 어떤 것들이었을지 설명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한번 닫혀버린 입을 또 다시 열기까지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이 그를 저지한다.
어떤 물건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 작은 나사를 하나씩 조여 가는 폼이 제법 능숙해 보였다. 그렇게 하루의 절반이 지나갈 무렵 온종일 조립하던 물건이 어느새 제 모습을 갖춰간다.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기계를 지켜보던 시선을 느낀 그녀가 앞에 있는 물건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뭔가 낯이 익은 물건일 텐데 기억나는 것 없어요?”
크기가 제법 크고 조절해야 할 손잡이가 너무 많아 익숙한 듯 낯선 물건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아무래도 짧은 시간에 물건을 파악하긴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옅은 미소를 짓다 먼저 답을 알려준다.
“이게 바로 세 사람이 처음 설계했던 대로 만든 감정조절장치예요. 조절할 수 있는 감정들이 많다보니 크기도 조금 커지고 태엽들도 조금 다른 모양이죠?”
낡은 오디오처럼 보였던 감정조절장치의 원래 모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낯선 형태를 띠고 있었다. 조절 할 수 있는 감정들만 수십 가지에 이르렀고 여러 가지 기능들을 섞어 또 다른 기능이 만들어졌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보다 훨씬 넓은 선택의 폭이 잠재운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냉장고로 향하던 그녀의 손에 시원한 병맥주가 들려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술을 먹는다는 건 무리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함께 축배를 들고 싶은 생각뿐이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소파에 기대기까지 전보다 짧아진 시간이 빠른 회복력을 알리고 있었다. 몸이 나아진 대가로 시원한 맥주 하나를 얻은 그가 오랫동안 참아 온 갈증을 풀기 위해 크게 한 모금 들이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