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하르트의 이름을 듣는 것과 동시에 아리안은 자신의 심장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온몸을 짓누르는 어마어마한 공포감에 숨조차 쉽게 내실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그녀의 심장을 쥐어뜯는 것 같은 고통에 아리안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만히 움켜잡았다. 그러자 손가락 끝으로 심장의 고동 소리가 쿵, 쿵하고 울려왔다. 하지만 아리안은 그 심장 소리가 금방이라도 멈춰버릴 것만 같아 도저히 가슴을 움켜쥔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누, 누가 온다고?”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이름에 아리안이 겨우 겨우 숨을 내뱉으며 그렇게 되묻자 빈 접시를 치우던 매리앤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도대체 몇 번을 물어보시는지 모르겠네. 황자님이 우리 집에 오신다는 게 그렇게 안 믿겨지세요?”
그렇게 말한 매리앤은 다시는 묻지 말라는 듯 또박 또박 말을 이었다.
“에르하르트 황자님이요. 카스티야 제국의 2번째 황자님인 그 에르하르트 황자님이 바로 오늘 우리집에 오신다고요. 이제 됐나요, 아리안느 아가씨?”
마치 화살촉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자신의 심장을 후벼 파는 그 이름에 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하 감옥에서 벗어나 침대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리안은 매리앤과 함께 있는 이 모든 상황이 꿈이 아닐까 의심했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이 모든 것이 현실이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이 모든 것이 죽음 직전에 보여 지는 찰나의 아름다운 환상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매리앤의 입에서 에르하르트의 이름이 나온 이 순간, 아리안은 이 모든 것이 진정 꿈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렇지만 아리안의 눈앞에 서 있는 매리앤이 꿈이 아닌 현실이듯 에르하르트가 자신을 찾아오는 것도 꿈이 아닌 분명한 현실이었다.
도저히 더 이상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었던 아리안은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의자를 짚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매리앤, 미안하지만 난 이만 올라가봐야 할 거 같아.”
“아니, 왜요? 조금 더 드시지 않고요.”
그렇게 말한 매리앤은 아리안의 얼굴을 쳐다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어머, 아가씨! 갑자기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세요?! 어디 아프시기라도 한 건가요?!”
“아니, 아니야, 매리앤. 그냥 조금 피곤한 것뿐이야. 올라가서 쉬면 괜찮아질 거야.”
아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하자 매리앤이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요즘 신경 쓰실 일이 많으셔서 그런 모양이네요. 어서 올라가서 쉬세요. 제가 금방 따뜻한 차라도 만들어서 올라갈 테니까요.”
이제는 정말로 대답할 기력조차 사라진 아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2층으로 올라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아리안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에르하르트가 이 시기에 아리안을 찾아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를 이곳에 부른 것은 다름 아닌 아리안 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아리안은 매우 궁지에 몰려 있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황실 기사단에서 쫓겨난 이후 아리안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기사단에 편지를 보내 입단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답장을 보내온 기사단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아리안이 가지고 있던 돈은 점점 떨어져 가기 시작했다. 이때 그녀가 가지고 있던 재산이라고는 오로지 아버지가 물려준 이 저택과 기사단에서 받았던 쥐꼬리만한 월급을 모은 몇 푼 안 되는 돈뿐이었다. 다행히 아리안은 사치와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이 저택의 고용인 역시 매리앤과 마부인 존이 전부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계속 이렇게 백수로 지낸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길거리에 나앉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결국 아리안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럴싸한 귀족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가신이 되는 것이었다.
아리안이 고른 그럴싸한 귀족은 바로 둘째 황자인 에르하르트였다.
에르하르트가 아리안을 찾아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13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리안은 그때의 심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매리앤의 말대로 아리안은 에르하르트가 자신을 찾아온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리안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기사였다. 그녀 역시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리안은 더욱 더 기사로서 성공하고 싶었다.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무시하던 거지같은 놈들에게 기사에겐 성별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아니, 오히려 여자인 자신이 너희 같은 버러지놈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검을 손에 들었던 그때부터 아리안은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었다. 그렇게 소드마스터까지 되었지만 결국 아리안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전에 내쳐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둘째 아들인 에르하르트가 찾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리안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편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안은 에르하르트를 만나기 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그를 설득해 그의 기사가 되겠노라고. 그리고 그와 함께 이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겠노라고. 그것을 위해서는 그 어떤 더러운 일도 결코 서슴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아리안은 자신의 다짐을 모두 현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13년 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바로 그 주군에게 살해당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리안은 강하게 머리를 내저었다.
자신이 왜 과거로 돌아오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아리안은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심장이 파헤쳐지고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그 끔찍한 고통을 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여자의 몸으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겠다는 꿈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그녀는 이미 그 꿈을 한번 이루었었다. 그 끝이 얼마나 허무하고 허망한지는 아리안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기사 나부랭이 따위 이제 아리안으로서는 전혀 알바가 아니었다. 차라리 매리앤과 함께 길거리에 나앉는 편이 백만 배는 나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안타깝게도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상태였다. 에르하르트는 이미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아리안의 운명은 끔찍한 파멸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아리안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굳게 다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도망가자.”
이미 파멸의 물결이 시작되었다면 그 물결을 피해가면 되는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을 끝낸 아리안은 탁자 위에 놓인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바늘은 1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리안의 기억이 맞다면 에르하르트가 이곳에 도착하는 것은 오후 3시쯤이었다. 이 정도라면 매리앤과 함께 도망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텅빈 저택에 도착한 에르하르트가 황당해하겠지만 그것은 아리안이 알바가 아니었다. 앞으로 에르하르트의 황위 다툼도 힘들어지겠지만 그 역시 아리안이 알바는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 도망가고 나면 어떻게든 살길이 있을 것 같았다.
하다 안 되면 시골마을 검술 선생질을 하거나, 아니면 삼류 용병 부대에라도 들어가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며 아리안은 탁자 옆에 세워져있던 자신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검을 집어 들었을 때 아리안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검이 손에 딱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리안은 그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 검은 아리안이 사용하던 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리안이 최근에 사용하던 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검집에서 천천히 검을 빼내었다. 스릉,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검집에서 빠져나온 검은 눈부신 햇살 속에서 아름답게 반짝였다. 이 검은 사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한 레이피어였다. 하지만 아리안은 자신이 썼던 검중에서 이 검을 가장 사랑했었다.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이 검은 아리안의 아버지 리베이드 남작이 그녀의 성인식 때 선물로 사준 검이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아리안이 사용했던 검은 이 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훌륭한 검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리안은 항상 지금 자신의 손에 들린 이 검을 가장 아끼고 사랑했었다.
“이렇게 다시 널 볼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네.”
그렇게 말한 아리안은 햇살 속에 다시금 반짝이는 검날을 비춰보았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가득한 이 집에서 아버지가 선물해준 사랑스러운 검을 보고 있자니 에르하르트에 대한 공포로 조여 오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만약 이게 모두 꿈이라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리안이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정말 영광이군 그래.”
그와 동시에 아리안은 그대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던 은빛 검날이 번개보다 빠르게 공기를 가르며 침입자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리안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푸르게 일렁이는 오러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은 5살 정도의 소년이었다. 금빛 머리카락의 그 소년은 당황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리안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어머니.”
아리안은 이 소년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소년은 바로 그녀의 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