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소년은 아리안이 낳은 아이가 아니었다.
이 소년은 아리안의 남편인 레그네트 폰 에스테 공작이 데려온 아이였던 것이다.
아리안이 이 소년을 처음 만난 것은 황제의 군대가 에스테 공작가로 쳐들어오기 6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날 아리안은 늦은 봄 햇살이 내리쬐던 정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당시 아리안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위를 모두 내려놓고 은퇴를 한 상태였다.
사실 아리안은 처음 육군 총 사령관에 오를 때만 해도 은퇴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황제 친위 기사단장이었던 그녀가 육군 총 사령관에 오른 후 그녀의 등 뒤에서는 끊임없이 수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르하르트 3세가 그녀의 치맛자락에 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조만간 카스티야 제국 전체가 그녀의 치마폭에 들어가고야 말거라고.
에르하르트는 그런 더러운 소문에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일축해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아리안과 에르하르트가 그런 소문들을 무시해도 사람들의 수근거림은 점점 커져만 갔다.
결국 사람들의 질시어린 시선에 지친 아리안은 에르하르트에게 총사령관직을 내려놓고 은퇴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에르하르트는 그런 아리안의 결정에 완강히 반대했다.
“그딴 더러운 귀족놈들의 이야기는 전혀 들을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감정이 격해진 듯 에르하르트가 오팔색 눈동자를 싸늘하게 빛내며 말했다.
“은퇴라니, 정말 기도 안차는 군. 오늘 이야기는 그냥 못들은 걸로 하겠네. 그러니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꺼내지 말도록 하게.”
“하지만 폐하.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귀족들의 반발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아리안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하자 은빛 머리카락 너머로 에르하르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귀족들이 반발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떠들고 싶으면 마음대로 떠들어대라지. 어차피 난 전혀 신경 안 쓰니까. 애초에 내가 그런 헛소리에 신경을 썼다면 아리안 그대를 내 기사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걸.”
“확실히 그 말씀도 옳은 말씀이긴 하군요. 그러나 폐하, 이번엔 정말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귀족들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고요.”
“일리가 있다고?! 하! 아리안 그대도 내가 그대의 치마폭에 싸여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얼간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요. 일단 저는 치마를 입은 적도 없는 걸요.”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에스테 경?”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소리였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대로 만약 폐하께서 그런 분이셨다면 애초에 저 역시 폐하의 기사가 되겠다고 말하지 않았겠지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에르하르트에게 아리안이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해주었다. 그러자 에르하르트가 그제야 기분이 조금 풀린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리안 그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나도 잘 알고 있네. 공연히 귀족들의 반발을 사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지. 특히 지금처럼 황권이 막 안정기에 접어들기 시작했을 때는 더더욱 말이야.”
“맞습니다. 그러니 저를 은퇴시켜 주십시오, 폐하. 비록 귀족들의 말이 기분 나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말처럼 군사권이 한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상태는 결코 좋지 않습니다. 비록 그 대상이 저라고 해도 말이지요.”
아리안이 다시 한 번 에르하르트를 설득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자 에르하르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항상 그대 본인보다 나와 제국의 안녕을 더 걱정해주는 그대이니 이번에도 그대의 말이 옳겠지.”
“그럼 제 은퇴를 허락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아무리 아리안 그대의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나는 절대로 그대의 은퇴를 받아들일 수가 없네.”
“어째서입니까?”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에르하르트에게 아리안이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그러자 에르하르트가 촛불 아래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오팔색 눈동자로 그런 아리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아리안 그대가 필요하니까. 제국의 귀족들을 모두 적으로 돌릴 지라도 나는 아리안 그대가 필요하니까.”
기사라면 누구나 감격할 수밖에 없는 그 말에 아리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아리안 그대가 누구인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아무런 세력도 없던 나를 처음으로 믿어주고 따라주었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 그대를 내가 어찌 버릴 수가 있겠나.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네.”
“폐하, 제가 은퇴하고 나면 폐하께서는 저를 다시는 보지 않으실 생각인건가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에르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아리안이 그 보라는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폐하. 제가 은퇴한다고 하더라도 저는 영원히 폐하의 기사이자 친우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또 다시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저는 당장 열일을 제쳐두고 폐하께로 달려올 거예요. 그러니 제가 은퇴를 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나요?”
아리안의 그 말에 에르하르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만 그는 다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리안 그대가 왜 은퇴를 하고 싶다고 하는지는 나 역시 잘 알겠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대의 은퇴를 받아들일 수 없어. 누가 뭐라던 나에겐 아리안 그대가 필요해. 그 귀족나부랭이들의 목을 모조리 자르는 한이 있어도 나는 결코 그대의 은퇴를 받아들일 수 없어.”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결국 에르하르트는 아리안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해서 자신을 설득시키는 아리안을 도무지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군대에서 은퇴한 후 아리안은 에스테 공작 가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유일한 소일거리는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에스테 공작가의 장미 정원에서 홍차를 즐기는 것뿐이었다.
그날도 아리안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 위치한 정자에서 시녀가 가져다준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하얀색 대리석 기둥에 몸을 기댄 채 달콤한 캬라멜향이 풍기는 진한 핑크색 수색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리안의 남편이자 에스테 공작가의 주인인 레그네트 폰 에스테 공작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오랜만이오.”
장미 넝쿨 장식이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 기둥을 지나 그녀에게 다가온 레그네트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네, 오랜만이네요.”
레그네트의 형식적인 인사에 아리안 역시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실제로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이때로부터 한 달 전이었기에 이 인사는 전혀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잘 지냈소?”
“저야 물론 잘 지냈지요. 공작 전하께서도 잘 지내셨나요?”
“걱정해줘서 고맙군. 나 역시 잘 지냈소.”
“그거 참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건가요?”
어쩐지 평소보다 길어지는 인사에 아리안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레그네트가 보랏빛 눈동자를 살며시 찌푸렸다.
“...그대는 언제나 여전하군 그래. 뭐 좋소, 어차피 그대와 내 관계는 항상 이러했으니 말이야.”
의미를 알 수 없는 레그네트의 말에 아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고 있을 때 레그네트가 바람결에 흐트러진 어두운 밤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올리며 말했다.
“아무튼 내가 오늘 아리안 그대를 찾아온 것은 그대에게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서요.”
“소개해줄 사람이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아리안이 그렇게 되묻자 레그네트의 등 뒤에서 작은 소년 하나가 걸어 나왔다. 금빛 머리카락의 그 소년을 바라보며 레그네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소개하겠소, 이 아이는 앞으로 내 후계자가 될 아이요.”
그 순간 아리안은 홍차를 마시려던 것을 멈추고 멍하니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리안 그대답지 않게 여러 번 이야기하게 하는 군, 그래. 이번 한번만 더 이야기 할 테니 똑똑히 잘 들으시오. 이 아이는 내 후계자가 될 아이라고 했소.”
“...혹시 제가 당신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신 건 아니시겠죠?”
마치 오늘 날씨 이야기를 하듯 대수롭지 않게 레그네트의 모습에 너무나도 기가 막혀진 아리안이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나 정작 레그네트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여전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그러니 이렇게 후계자를 소개시켜 주러 온 것이 아니겠소?”
“기억하고 있다니 참으로 다행이군요. 그런데 아무래도 전하께서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모양이군요. 만약 전하께서 진정 저를 당신의 부인으로 생각하셨다면 이렇게 후계자를 소개시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후계자를 정하기 전에 먼저 저와 상의를 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뻔뻔하기 짝이 없는 레그네트의 태도에 점점 더 어이가 없어진 아리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레그네트가 조소를 머금은 입술로 이렇게 되물었다.
“그거 참 듣던 중 재미있는 소리로군 그래. 만약 우리가 정상적인 부부관계였다면 그대의 이야기가 옳겠지. 하지만 언제 한번이라도 우리가 정상적인 부부관계였던 적이 있던가? 안 그런가, 아리안느 폰 에스테 공작부인?”
레그네트의 그 말에 아리안의 미간이 더욱 더 좁아졌다. 그러나 그의 말은 모두 옳은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레그네트와 아리안은 정상적인 부부 사이가 아니라 오로지 정략적인 관계로 맺어진 부부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아리안의 남편인 레그네트는 카스티야 제국의 3대 공작가 중 하나인 에스테 공작가의 수장이었다. 또한 그는 100년 만에 처음으로 8서클 마법을 연성한 제국 최고의 대마도사였다.
아리안이 그와 만난 것은 에르하르트의 황위 전쟁이 한참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리안의 합세와 전쟁터에서 계속된 공훈 덕분에 카스티야 제국군은 대부분 에르하르트를 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에르하르트가 황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국의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귀족 연합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제국 3대 공작가 중 하나인 비르켄타인 공작가를 외척으로 두고 있는 황태자와 달리 어머니의 신분이 좋지 못했던 에르하르트에게는 그를 지지해줄 변변한 귀족 가문이 없었다.
그때 아리안과 에르하르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레그네트 폰 에스테였다. 에스테 공작 가문은 황태자의 외가인 비르켄타인 공작가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가문이었다.
더구나 대마도사인 그의 지지를 얻는다는 것은 마법사들의 지지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마법사들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할지 떠올린다면 레그네트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에르하르트가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한 아리안에게 레그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야 어렵지 않지. 나 역시 비르켄타인 출신의 애송이가 황위에 오르는 것보다는 그 은발 애송이가 황위에 오르는 쪽이 더 나으니까 말이야.”
“그럼 에르하르트 전하의 제의를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아리안의 그 질문에 레그네트는 입 끝을 부드럽게 올리며 되물었다.
“내가 그대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지?”
그때 레그네트가 요구한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마법사 아카데미를 황실로부터 독립시킬 것. 마법사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던 그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요구였다. 아리안과 에르하르트 역시 레그네트가 이런 요구를 할 거라는 것을 미리 예상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두 번째 요구였다.
그가 요구한 두 번째 조건은 바로 아리안과의 정략결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