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순간 아리안의 등 뒤에서 소년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안이 뒤를 돌아보자 싱글싱글 웃으며 공중에 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리안이 곧바로 푸른 검기가 일렁이는 검을 고쳐 들자 소년이 작게 혀를 찼다.
“그만 두는 게 좋을 걸. 내가 지금은 비록 이런 어린애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래 뵈도 마계를 통솔하는 7대 마왕 중 한 명이라고. 당신이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쉽게 죽일 순 없단 말이지.”
“마족? 마족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마족은 300년 전의 마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인간계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알고 있는데?”
아리안이 여전히 소년의 목을 단숨에 잘라 버릴 기세로 검을 들고 말하자 소년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들 그렇게 알고 있지. 하지만 사실 반은 틀리고 반은 맞는 이야기야.”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리다는 거지?”
“마계대전 이후 마족들이 인간계에서 쫓겨난 건 사실이지만 마족들이 인간계에 아예 들어올 수 없는 건 아니거든. 우리를 불러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마나를 가진 인간이 우리를 소환하고 계약을 체결한다면 언제든지 인간계로 돌아올 수 있어. 실제로 30년 전에는 내 동료 마왕 중 한명이 인간계로 나올 뻔한 적도 있었단 말이지.”
“그럼 지금 네 말은 인간들 중 누군가가 네놈을 소환했다는 건가?”
“그렇지. 역시 우리 어머닌 똑똑하단 말이야.”
“그래서, 네놈을 불러낸 인간이 누구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낄낄대는 소년에게 그렇게 묻자 소년이 입 끝을 올리며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글쎄, 과연 누구일까?”
소년의 그 말에 아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구라도 상관없지. 어차피 네놈이 정말로 마족이라면 중요한 건 단 한 가지뿐이니까.”
“한 가지? 그 한 가지가 뭔데?”
소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리안을 쳐다보자 아리안이 그대로 소년에게 검을 날리며 대꾸했다.
“그건 바로 네놈이 내 손에 목숨을 잃을 거라는 것이지.”
“잠깐, 잠깐! 서로 기운 빼지 말자니까 그러네!”
소년이 다급히 아리안의 검을 피하며 외치자 아리안이 빛처럼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며 소년의 심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으르렁거리며 포효하는 푸른 오러를 가까스로 피한 소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졌다.
“이대로 날 죽이면 나와 계약한 사람이 누구인지 영영 알 수 없을 텐데 그래도 좋아?”
“더러운 마족과 계약한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왜 궁금해 해야 하지?”
푸른 오러가 소년의 옆구리를 단숨에 베어버릴 기세로 짓쳐 들어가자 소년의 몸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리안이 눈살을 좁히는 것과 동시에 어느 새 아리안의 왼쪽 옆에 나타난 소년이 아리안의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을 13년 전으로 데려온 사람이 내 계약자인데, 그래도 궁금하지 않아?”
바로 그때, 아리안은 소년은 향해 날리려던 검을 멈추고 소년을 쳐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
그러자 소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제야 이야기가 좀 통하겠군 그래.”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려는 거면 지금 당장 그 혀를 베어버리겠다.”
아리안이 얼굴 가득 인상을 쓰며 그렇게 말하자 소년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우리 어머니는 성격이 급해도 너무 급하다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당신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일 테니까 말이야.”
아리안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소년을 쏘아보고 있자 소년이 천천히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일단 내 이름부터 소개하지. 내 이름은 레비아탄, 아까 말했듯이 마계를 통솔하는 서열 5위의 마왕이야.”
“네놈의 이름 따위 전혀 궁금하지 않으니 아까 하던 이야기나 계속 해. 지금 이곳으로 날 데려온 사람이 네놈의 계약자라니, 그건 도대체 무슨 소리지?”
“뭐 말뜻 그대로야. 마족과 계약을 맺은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마족에게 주는 대신 무엇이든 원하는 소원을 한 가지 이룰 수 있지.”
“무엇이든?”
“그래, 계약한 마족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무엇이든 이룰 수 있지.”
“그래서, 그것이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아리안의 그 질문에 레비아탄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인간치고 제법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영 답답한 여자로군 그래. 잘 생각해봐. 황제의 손에 죽어가던 당신이 왜 갑자기 13년 전으로 돌아왔겠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도대체 어떤 인간이 할 수 있겠냐고.”
“...설마...?!”
아리안이 떨리는 눈빛으로 레비아탄을 쳐다보자 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리안느 폰 에스테. 당신을 되살려 13년 전의 과거로 돌려놓는 것. 그것이 바로 내 계약자의 소원이었지.”
그 순간 챙캉,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아리안의 손에서 떨어진 검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에 아리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레비아탄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13년 전으로 돌아온 것에 무언가 비밀이 숨어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설마하니 마족이 관련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리안을 쳐다보며 레비아탄이 낄낄대며 입을 열었다.
“이런, 우리 어머니도 놀랄 때가 다 있네.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봐서 감정이라고는 한 톨만큼도 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래서 날 살려주고 과거로 돌려보내준 네놈의 계약자가 대체 누구냐?”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아리안이 그렇게 질문을 던지자 여전히 공중에 떠 있던 레비아탄이 마치 소파에 기대듯 허공에 상체를 기대며 대꾸했다.
“글세, 내가 그걸 왜 대답해줘야 되지?”
“...지금 나와 장난하잔 거냐...!”
어느 모로 보나 자신을 놀리고 있는 레비아탄의 태도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아리안이 발끈하며 외치자 레비아탄이 정말로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고. 내 계약자는 당신을 되살리기 위해서 마왕에게 영혼까지 팔았다고. 한 마디로 당신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단 말이지. 그런데 이런 어마어마한 정보를 맨입으로 가르쳐 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안 그래?”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레비아탄의 말에 아리안은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레비아탄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자신을 찾아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레비아탄의 이야기는 모두 맞는 말이었다.
레비아탄의 계약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아리안을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리안은 그 계약자가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그럼, 희생도 보통 희생이 아니지. 마족이 왜 인간의 영혼을 탐내는 줄 알아? 그건 인간의 영혼이 마족에게 마력을 제공해주기 때문이야.”
“인간의 영혼이 마족에게 마력을 제공해준다고?”
“그래, 특히 어머니처럼 마나가 풍부한 인간은 더욱 많은 양의 마력을 제공해주지. 보통 인간이 죽으면 그 영혼은 천계로 돌아가게 되지만 마족에게 귀속된 영혼은 천계로 돌아갈 수 없어. 영원히 마족에게 귀속된 채 마력만을 제공해주는 삶을 살게 되는 거야. 어때, 들으면 들을수록 내 계약자가 얼마나 엄청난 희생을 했는지 알겠지? 이런데도 그 계약자의 이름을 맨입으로 알려달라는 거야?”
“...그래서 네놈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