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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린토스 - 계약의 여기사
작가 : 라마레뜨
작품등록일 : 20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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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머리카락의 황제 (1)
작성일 : 17-06-13     조회 : 319     추천 : 2     분량 : 3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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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

 

 조심스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리안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멍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티세트를 손에 든 매리앤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아가씨, 이제 몸은 좀 괜찮으세요?”

 “응, 이젠 괜찮아.”

 

 

 아리안이 작게 미소를 짓자 매리앤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티세트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지셔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홍차라도 좀 드세요.”

 “알겠어, 신경 써줘서 고마워 매리앤.”

 

 

 그렇게 웃으며 대답한 아리안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깊은 바다처럼 짙푸른 색의 그 목걸이의 안쪽은 밤하늘의 별을 뿌려놓은 듯 은은한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목걸이는 레비아탄이 아리안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결국 아리안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어쨌건 아리안은 레비아탄의 계약자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이 빌어먹을 마족 놈의 손아귀에서 구해내야만 했다.

 

 

 “알겠다. 네놈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그러자 레비아탄이 봄날 햇살처럼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거래 성립이야.”

 

 

 그리고는 하얀 손을 뻗어 허공에서 천천히 돌리자 그의 손에 푸른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생겨났다.

 

 

 “자, 받아.”

 

 

 아리안이 황금이 뿌려진 심해 같은 그 목걸이를 수상쩍은 눈초리로 쳐다보자 레비아탄이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수상한 거 아니니까 걱정 말고 그냥 받으라고. 그냥 당신과 나를 연결해주는 목걸이일 뿐이니까.”

 “너와 나를 연결해주는 목걸이라고?”

 “그래, 이 목걸이를 가지고 있으면 당신이 어디에 있던 나는 당신을 찾아낼 수 있어. 반대로 당신 역시 언제든 나를 불러낼 수 있고 말이야. 1년에 한 번씩 당신을 찾아와 힌트를 알려주려면 이런 장치가 필요하지 않겠어?”

 

 

 아리안이 아무런 말없이 그 목걸이를 건네받자 레비아탄이 뻐기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잘 간수해두라고. 말하자면 그 목걸이는 나와 당신의 계약서 같은 거니까 말이야.”

 

 

 레비아탄의 그 말을 떠올리며 아리안은 다시금 쓰게 웃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이 목걸이는 레비아탄이 자신에게 걸어둔 목줄과 다름없었다.

 

 황제의 개에서 겨우 벗어나나 했더니 이제는 마족의 개가 되어버리다니...

 

 정말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인생이 기구하다는 생각을 하며 아리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아가씨. 황자님이 오실 시간이 거의 다 된 거 같은데 따로 준비할 건 없을까요?”

 

 

 매리앤의 그 말에 아리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회귀 전에는 에르하르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것저것 준비를 했었지만 이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됐어, 그냥 차 정도만 준비해줘.”

 “그래도 명색의 황자님인데 그 정도로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야. 에르하르트 황자는 허례허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거든.”

 

 

 계속되는 매리앤의 질문에 아리안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아리안의 이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에르하르트는 귀족들의 쓸데없는 허례허식을 매우 경멸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아리안이 꽤나 궁핍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무얼 준비해봐야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결코 알 리 없는 매리앤은 여전히 걱정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옷이라도 갈아입는 게 어떠세요, 아가씨. 그렇게 간단한 옷차림으로 황자님을 맞이하는 건 좀 실례일거 같은데요.”

 

 

 그 말에 아리안은 고개를 숙여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쳐다보았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가벼운 가죽바지와 흰색 셔츠였다. 확실히 손님을 맞이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차림에 아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옷은 갈아입어야겠네.”

 “잘 생각하셨어요, 아리안느 아가씨. 그럼 무슨 옷을 준비할까요? 황실 기사단 옷을 준비 할까요?”

 

 

 금방이라도 기사단 옷을 꺼내올 태세로 물어보는 매리앤의 질문에 아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슬린 드레스를 준비해줘.”

 

 

 그 순간 매리앤이 깜짝 놀란 얼굴로 아리안을 쳐다보았다.

 

 

 “아, 아가씨?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요? 드, 드레스를 준비해오라고 하신 거 맞으세요?”

 

 

 매리앤의 이런 반응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검을 손에 잡은 이후로 아리안은 단 한 번도 드레스를 입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매리앤에게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 들은 거 아냐, 매리앤. 제대로 들었으니까 어서 드레스를 준비해줘.”

 

 

 잠시 후, 아리안은 매리앤이 준비해준 드레스를 입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살결이 비추어 보일 듯 하늘하늘한 러프가 달린 하얀색 모슬린 드레스는 아리안의 발목 끝까지 우아하게 흘러내렸다. 매리앤이 허리에 반짝이는 은실로 수놓아진 매끄러운 푸른색 쉬폰 리본을 묶어주자 그녀의 가는 허리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풍성하게 주름이 잡힌 치마 위로 구불구불하게 물결치는 밀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후 매리앤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리안을 쳐다보았다.

 

 

 “어때요, 아가씨?”

 

 

 생각보다 훨씬 더 여성스러운 그 모습에 아리안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들어, 매리앤.”

 

 

 이 드레스는 아리안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드레스였다. 아리안의 아버지 리베이드 남작은 그녀의 성인식을 위해 이 드레스를 주문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리안은 이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을 너무나도 끔찍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회귀 전 아리안은 자신이 최고의 기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여성적인 모습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성인식날에도 그녀는 아버지가 선물해준 이 드레스 대신 황실 기사단복을 입고 참석했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었지.

 

 그렇게 발버둥 쳐봐야 결국 돌아오는 건 사람들의 비웃음과 비참한 죽음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리안은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모슬린 치맛단 아래로 살며시 보이는 매끄러운 남색 새틴 하이힐을 바라보았다. 드레스와 마찬가지로 생전 처음 신어보는 하이힐은 매우 아름다워 보였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런 차림에 적응하려면 꽤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방문이 똑똑-, 하고 두들겨졌다.

 

 

 “들어와.”

 

 

 아리안이 고개를 들며 대꾸하자 문이 빼꼼 열리며 마부인 존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리안느 아가씨. 밖에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어떻게 할깝쇼?”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아리안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응접실로 모셔줘, 존.”

 

 

 그렇게 대답한 아리안은 다시 한 번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는 지금껏 아리안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가 서 있었다. 에르하르트조차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그 모습이 아리안은 상당히 맘에 들었다. 날씬하고 우아해 보이는 그 여인이 조금 더 당당해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리안은 예전 파티장에서 보았던 귀부인들처럼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방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응접실로 들어가기 전 아리안은 잠시 멈춰선 채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모슬린 드레스를 잡고 있는 그녀의 양손은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리안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에르하르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사신보다 끔찍했던 그 무시무시했던 모습...

 

 아리안은 잠시 눈을 감은 채 머릿속에서 그 모습을 털어냈다. 어차피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다. 전쟁은 이미 시작된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리안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손을 힘껏 다잡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전쟁터에 출전했던 그때 같은 심정으로 천천히 응접실 문을 열었다.

 

 아라안이 응접실 안쪽으로 들어서자 바닥까지 길게 연결된 창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리안느 리베이드입니다.”

 

 

 아리안이 인사를 건네자 나른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서 있던 그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은빛 머리카락과 빛이 닿을 때마다 신비하게 반짝이는 오팔색 눈동자의 그 남자는 말 그대로 눈부시게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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