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생에서 처음으로 에르하르트를 만났을 때, 아리안은 그의 기사가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를 설득했다. 에르하르트가 그녀의 초대에 응해 리베이드 저택으로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는 아직 아리안을 자신의 기사로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을 굳힌 상태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여자인 아리안에게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아리안을 기사로 받아들인다면 아리안 외의 다른 모든 기사들이 그를 등질 수도 있었다.
소드 마스터 한 명과 그 외의 모든 기사들. 에르하르트는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이전 생에서 아리안은 오랜 시간 동안 에르하르트를 설득하고 또 설득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아리안은 에르하르트의 기사가 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비단 에르하르트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의 기사도 되고 싶지 않았다. 현재 아리안이 바라는 것은 조용한 은퇴 생활뿐이었다.
하지만 계약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에르하르트와 레그네트의 주변에서 그들을 관찰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안은 에르하르트의 기사가 되어야만 했다. 일개 은퇴 기사로서는 도저히 카스티야 제국 제 2황자와 대 마법사인 에스테 공작을 관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리안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에르하르트를 설득해 그의 기사가 될 것. 하지만 결코 그의 심복이 되지 않을 것. 이것이 아리안이 생각해낸 최선의 방법이었다.
아리안이 평생 입지 않던 드레스를 일부러 꺼내 입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아리안의 가장 큰 약점은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이었다. 기사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어필하되, 동시에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을 드러내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아리안의 작전이었다.
...물론 평소 여성적인 모습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자신이 얼마만큼이나 여성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아리안은 최대한 노력해보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아리안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미간을 찌푸린 채 차를 마시던 에르하르트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리베이드 경?”
“제가 전하를 뵙고 싶다고 청을 한 이유는 전하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제안이라. 나와 그대는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도대체 어떤 제안을 하겠다는 거지?”
“별로 복잡한 제안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간단한 제안이지요. 저를 전하의 기사로 받아달라는 것이니까요.”
그러자 에르하르트가 홍차를 마시려던 것을 멈추고 아리안을 쳐다보았다.
“지금 그대를 내 기사로 삼아달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리베이드 경.”
“착각하고 있다고요?”
“그래, 소드마스터인 그대가 내게 그런 제안을 준 것은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기사가 필요하지 않네.”
“기사가 필요하지 않으시다고요?”
“당연하지 않은가? 리베이드 경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군부에 직위가 있는 사람이 아니야. 게다가 내 호위는 다른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황실 기사단에서 전담하고 있지. 그러니 내가 따로 기사를 둘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물론 지금은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조만간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르하르트에게 아리안은 당연한 것도 묻는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왜냐하면 전하께서는 조만간 황위 쟁탈전에 뛰어드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 순간 에르하르트의 조각 같은 미간이 천천히 찌푸려졌다.
“지금 그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는 건가?”
“물론입니다.”
“그럼 내가 지금 당장 그대를 반역죄로 신고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할 말이 없겠군.”
“왜 저를 반역죄로 신고한다고 하시는 겁니까?”
“황제 폐하께서 멀쩡히 살아계시는데 황위 쟁탈전을 논하다니, 이것이 반역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반역이란 말인가?”
“저야말로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군요. 본래 황위 계승권은 황제 폐하께서 자리를 보존하고 계실 때 정해져야 하는 법 아닙니까? 그래야 불의의 사고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안정적으로 국가가 운영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아리안의 이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현재 황제인 막시밀리안 5세의 건강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황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아리안의 기억이 맞다면 황제는 5년 뒤에 서거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에르하르트가 황위 쟁탈전에 뛰어들 마음이 있었고, 아리안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대의 말도 일리는 있군.”
아리안의 예상대로 에르하르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그대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게 있군.”
“제가 뭘 간과하고 있나요?”
“그건 바로 내게 형님이 있다는 것이지. 황태자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내가 왜 황위 쟁탈전에 뛰어 들겠나. 그렇지 않나?”
자신을 시험하듯 질문을 던지는 에르하르트에게 아리안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하께 형님이 계시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전하께서는 황위 쟁탈전에 끼어드셔야 할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야 이대로 황태자께서 황위에 오르신다면 배다른 형제인 전하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을 테니까요.”
“오늘 그대는 점점 더 황실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는 군. 그래, 경의 말대로 내가 형님과 배다른 형제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 하지만 이것은 카스티야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겨우 이따위 이유로 형님이 날 해할 것 같은가?”
“황태자께서야 그러실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과연 황후께서도 그러실까요?”
그러자 아리안을 바라보고 있던 에르하르트의 눈살이 더 이상 찌푸려질 수 없을 만큼 찌푸려졌다. 에르하르트가 황후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듯, 황후가 그를 싫어한다는 것 역시 카스티야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카스티야 제국은 중혼이 허락되지 않는 나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황제라고 하더라도 차비를 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대부분의 황제들은 공공연하게 애인을 만들고 사생아를 낳아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원칙적으로 황제의 부인은 황후 단 한명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후가 다른 여자의 아이인 에르하르트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현 황후인 엘레노아는 에스테 공작가와 함께 제국 최고의 가문으로 꼽히는 비르켄타인 공작가 출신이었다. 막시밀리안 5세가 황위에 오를 때 가장 많은 도움을 준 곳이 바로 비르켄타인 공작가였다. 그런 그녀에게 에르하르트가 얼마나 꼴 보기 싫은 존재였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실제로 과거 에르하르트가 황위에 오르는 것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 사람 역시 엘레노아 황후였다.
그렇기에 아리안은 에르하르트에게 황후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히 먹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에르하르트는 차갑게 가라앉은 오팔색 눈동자로 아리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리베이드 경 그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황위 쟁탈전에서 이기기 위해 그대를 내 기사로 삼으란 건가?”
“그렇습니다.”
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하르트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그런 아리안을 쳐다보았다.
“글쎄. 그대가 내게 과연 얼마만큼의 도움을 줄지 모르겠군. 물론 그대가 훌륭한 기사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황위란 기사 한명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간단한 자리가 아니란 말이지.”
에르하르트의 이 말에 아리안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지금 이 질문은 이전에 에르하르트가 아리안에게 던졌던 질문과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전하의 말씀대로 황위란 기사 한명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지요. 하지만 만약 전하께서 저를 전하의 기사로 받아주신다면 전하는 세 가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이익을 무엇이지?”
“첫 번째 이익은 전하께서 제국 최고의 기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죠. 전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저는 소드마스터입니다. 저보다 더 강한 기사는 카스티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에르하르트가 입술 끝을 천천히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보니 경은 본인에 대한 자신감에 대단한 사람이군.”
“그래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리안이 그렇게 질문을 던지자 그가 오팔색 눈동자를 부드럽게 휘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 반대야. 아주 마음에 들어.”
그가 마음에 들어 한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아리안은 다시금 말을 이어 나갔다.
“전하께서 저를 기사로 삼을 때 얻을 수 있는 두 번째 이익은 바로 전하께서 사람을 얻을 때 가문이나 조건이 아닌 오로지 능력만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능력만을 중시한다고?”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소드마스터인 동시에 여성입니다.”
아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하자 에르하르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대꾸했다.
“그렇지.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여성이지.”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아리안이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하자 에르하르트가 홍차를 내려놓으며 질문을 던졌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생각지 못한 말씀을 하셔서 조금 당황했을 뿐입니다”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왜 당황하는지 모르겠군.”
“...지금 절 놀리시는 건 아니시겠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리안이 질문을 던지자 그가 오히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내가 지금 그대를 놀려서 얻는 이득이 뭐가 있겠나?”
...그야 그렇지.
확실히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에 아리안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당황스러운 대화는 이전 아리안의 기억 속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 에르하르트를 만나기 전, 그가 이전과 다른 반응을 보이길 바랐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이런 방향으로 달라질 줄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매력적인 여성이라니...
아리안은 지금껏 이런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아리안은 도대체 그가 자신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이러한 아리안의 마음을 전혀 알 리 없는 에르하르트가 오팔색 눈동자로 아리안의 홍차빛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대가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것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지?”
“...매, 매력적인 것과는 크게 상관없습니다만 아무튼 제가 여성이라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지요.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대부분의 기사들은 여자는 기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아리안이 그렇게 말하자 에르하르트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은 그렇지.”
“그러니 만약 전하께서 여자인 저를 기사로 뽑으신다면 대부분의 기사들은 남성인 본인들은 더욱 쉽게 전하께 발탁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특히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가문과 조건이 좋지 않아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던 기사들이 그런 생각을 하겠지요.”
아리안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에르하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럼 세 번째 이익은 무엇이지?”
“세 번째 이익은 전하께서 저를 기사로 뽑으신다고 하셔도 황후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죠. 지금 전하는 아직 아무런 세력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황위를 노린다는 인상을 황후에게 주어봐야 좋을 것은 아무 것도 없지요. 그러니 지금 같은 상황에선 유명하고 영향력을 크게 줄 수 있는 기사들 보다는 저 같은 사람을 등용하는 편이 전하께 훨씬 더 유리하실 겁니다.”
그렇게 아리안이 말을 끝마치자 에르하르트가 조용히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대의 이야기는 잘 들었네. 확실히 재미있는 이야기였어.”
그런 에르하르트를 바라보며 아리안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지금 그가 내뱉을 대답에 따라 그녀의 향후 계획이 완전히 달라질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의 에르하르트는 그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었다. 그러나 지금 달라진 에르하르트는 과연 어떠할까...
그때 에르하르트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지금 당장 황위 쟁탈전에 뛰어들 마음은 전혀 없었네. 그러기엔 내가 준비한 것이 너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에르하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아름답게 빛이 산란하는 오팔색 눈동자로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늘 그대를 만나니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군.”
“그 말씀은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겠다는 건가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리안이 질문을 던지자 에르하르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아리안느 리베이드 경.”
꿈결처럼 달콤해 보이는 그 미소를 바라보며 아리안은 어쩐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에르하르트의 미소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그 미소가 훨씬 더 달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