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전하.”
홍차를 마시는 에르하르트에게 아리안이 그렇게 입을 열자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아리안을 쳐다보았다.
“부탁?”“네, 그다지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하지만 앞으로 전하와 저의 관계를 위해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다지 어려운 부탁이 아닌데 꼭 들어주어야 한다니. 그거 참 흥미로운 부탁이군. 그래, 어디 한번 말해보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 줄 테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아리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잘 굴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였다.
“부탁을 드리기 전에 먼저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요.”
“어떤 질문이지?”
“아시다시피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력한 지지 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지금처럼 특출한 라이벌이 있을 때는 더더욱 그러하고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하는 아직 그런 지지 세력을 가지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전하를 지지해주는 세력을 만들어야할 겁니다.”
“그 생각에는 나도 동의하네.”
“그럼 전하께서는 어디에서부터 지지 세력을 만들 생각이십니까?”
아리안의 그 질문에 에르하르트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역시 군대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가장 좋겠지.”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군대만큼 단번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더구나 전하께서는 어린 시절에 기사단에서 생활하신 적도 있으니 더욱 군대 쪽이 유리하겠지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 에르하르트에게 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에르하르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아리안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내가 어린 시절에 기사단에서 생활했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나?”
에르하르트의 그 말에 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런 아리안에게 에르하르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졌다.
“내가 기사단 생활을 했다는 건 황실 사람들 외에는 모르는 일인데 어떻게 그대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대답은 간단했다. 에르하르트 본인에게 직접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리안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실은 기사단장님께 들었습니다.”
“기사단장이라면 엔리크 기사단장을 말하는 건가?”
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하르트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조용히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 에르하르트를 바라보며 아리안은 두근대는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엔리크 기사단장은 현재 황실 기사단의 단장으로 에르하르트의 검술 스승이기도 했다. 황실 기사단의 단원이었던 아리안은 당연히 엔리크 기사단장과 인연이 있었다. 그렇기에 에르하르트는 아리안의 변명을 믿고 넘어간 듯싶었다.
물론 엔리크 기사단장은 절대로 아리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도리어 여자인 아리안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칫 잘못하면 에르하르트에게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에르하르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도리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리안은 이번 기회에 깊게 깨달았다.
앞으로는 더욱 입조심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리안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쨌건 앞으로 군대에서 세력을 늘리고 공을 쌓으시다보면 저를 포함한 수하의 기사들에게 전공을 나누어주실 일이 종종 있으실 겁니다.”
“아무래도 전쟁터를 돌아다니다보면 그런 일이 자주 있겠지.”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공적을 나누어 주실 때 절대로 제게 높은 자리를 주지 마십시오.”
그러자 에르하르트가 정말로 재미있다는 얼굴로 아리안을 바라보았다.
“그거 참 듣던 중 놀라운 부탁이로군. 보통은 반대로 부탁하지 않던가?”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서 일부러 이렇게 부탁을 드린 겁니다.”
“하지만 그대의 부탁은 이치에 맞지가 않아. 지금 시점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우습지만 만약 내가 정말로 황제가 된다면 그대는 내게 충성을 서약한 첫 번째 기사가 되는 셈 아닌가. 그런데 그런 그대에게 공적을 나누어주지 말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이 어디에 있나?”
에르하르트의 말은 모두 옳은 이야기였다. 예전의 아리안이었다면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을 터였다. 그러나 아리안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처음으로 에르하르트를 믿어주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에르하르트가 황제에 오르는데 가장 많은 공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녀의 공적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백보 양보해 그녀의 공적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황제를 현혹시킨다는 비난과 비참한 죽음뿐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대다수의 기사들은 여자가 기사가 되는 것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게 많은 공적을 나누어주신다면 전하를 지지하는 기사들은 더욱 큰 반감을 가지게 될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전하를 위해서도, 저를 위해서도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네. 하지만 그럼 그대는 내게 충성을 바친 대가를 무엇으로 보상받는단 말인가?”
에르하르트의 그 말에 아리안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전 생에서 수많은 기사들과 귀족들이 자신을 비난했을 때도 에르하르트는 지금과 똑같이 말하며 아리안을 보호해주었었다.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에르하르트의 모습에 아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때, 아리안의 머릿속에 얼음처럼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오팔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눈동자는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하던 에르하르트의 눈빛이었다.
결국 다시금 떨려오려는 손끝을 다잡으며 아리안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높은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크게 이름을 떨치고 싶다는 생각 역시 없고요.”
“그럼 그대는 왜 내 기사가 되고 싶다고 한 거지?”
...계약자의 이름을 찾기 위해서.
그러나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리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르하르트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증명해보이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여자도 최고의 기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요.”
사실 이 말은 아리안의 진심이었다.
결국 이전 생에서 그녀가 이루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는 소드마스터가 되었고, 에르하르트에게 충성을 바쳤고, 그를 황제로 만들었다.
지금 그녀가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은퇴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결국은 그녀가 한번은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봤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지 못했다면 그녀는 또 다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 노력했을 터였다.
그런 아리안의 진심을 읽은 것인지 에르하르트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에르하르트는 오팔색 눈동자로 아리안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열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그대는 참으로 독특한 사람이야.”
“그래서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리안이 그렇게 되묻자 에르하르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비슷한 대답을 들었던 것도 같아 아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겁니까?”
그러자 에르하르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지.”
“감사합니다, 전하.”
“단, 조건이 있어.”
“...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아리안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에르하르트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원래 부탁이란 주고받는 게 기본 아닌가? 내가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으니 그대 역시 내 부탁을 들어주어야지.”
이 기가 막힌 이야기에 아리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에르하르트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런 아리안에게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내 조건은 그대의 부탁에 비하면 훨씬 간단한 거니 걱정하지 말도록.”
“...그 조건이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자신이 조건을 수락하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모습에 아리안이 그렇게 질문을 던지자 에르하르트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말로 간단한 조건이야. 앞으로는 나를 전하가 아니라 에른으로 불러달라는 거니까.”
그리고는 아리안이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햇살보다 화사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물론 나 역시 앞으로는 경을 아리안이라고 부르도록 하지. 이정도면 공평한 조건이지 않나?”
그 순간, 아리안은 아무래도 이 인간이 공평이란 단어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