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정부리지 마.”
순간 신경질이 나서 확하고 팔을 찔러 넣으니 아예 나무를 관통해버렸다. 나무의 질감이 아닌 공기를 가르는 바람소리가 그것을 확신케 했다.
“꺄아! 끝까지 들어갔어. 빼죠. 빼달라고.”
데드엔딩이 몸을 들썩거리지만 내가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구멍에서 몸을 빼지 못 했다. 홧김에 저지르긴 했지만 서열정리를 위해 필요한 절차니 좀더 나아가기로 했다.
“비비지마. 느낌이 이상해. 끈적끈적하고 미끌거리면서 마찰로 몸이 달궈져.”
화덕에 집어넣어도 달궈지지 않은 데드엔딩이 헛소리를 지껄인다. 용광로에 넣어도 바로 녹지는 않을 텐데.
“그만. 이상해져 버려.”
명령조의 말을 굳이 들어줄 필요가 없다.
“간다. 나 가버린다.”
강철도 단번에 뚫어버릴 기세로 데드엔딩이 힘을 준다. 나 역시 마력을 끌어올려 단단히 붙잡는다. 데드엔딩의 몸체가 둘의 힘에 의해 당겨지며 왔다갔다 움직인다.
“제발. 놔줘.”
“난 네 주인이다.”
“주인님.”
“님자 대신 말을 높여라.”
“이 미천한 데드엔딩이 손수 주인을 위해 봉사하게 해주세요.”
사람이었다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했을 복종의 맹세. 나름 분이 풀린 나는 그대로 데드엔딩을 놓았다.
“흐흐흐. 난 자유다!”
데드엔딩은 나무를 관통하고 바위를 부수고 멀리, 멀리 날아가 버린다. 그래, 지금 내가 영혼의 일부까지 써서 만든 마도구가 도망가고 있다. 그레고릭이 남긴 유품이 도주를 하고 있다. 축제를 위해 무단가출한 마왕을 본 집사의 심정이 이럴까.
“그레고릭. 서류 결제 안하고 땡땡이 쳐서 미안하다.”
마왕의 권위상 목례를 할 수 없기에 가슴에 손을 얹어 마음의 사과를 전하고 반대쪽 손을 공중으로 뻗어 해를 움켜쥐었다.
딱히 내가 해를 움켜질 능력도, 거대한 손도 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마왕인 나의 손은 헛손질을 하지 않았다.
“헛. 아니. 마왕. 이게......”
“난 모든 마를 지배한다. 게다가 나의 영혼의 파편이 그레고릭의 영혼에 섞여있으니 오죽할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해라. 야근은 있어도 퇴근은 없다.”
마왕성의 집사가 달고 사는 명언을 읊조리며 데드엔딩의 도주극은 끝을 맺었다.
“평범하게 위장마술이나 은신을 하면 되잖아. 마왕이 뭣하러 변장을 하는데.”
“필요에 의해서다.”
“흐흐흐. 사실 그럴 능력이 없는 건 아니고.”
도발하는 데드엔딩의 말을 무시하고 엘프로 위장을 한다. 마음은 이미 아름드리나무에 데드엔딩의 비명소리가 나도록 크고 굵고 단단한 몸을 사정없이 쑤셔 넣고 있지만 마을에 가면연기를 해야 한다.
“난 엘프다. 용사의 계시를 받고 용사를 쫒고 있지. 그래서 마을사람들에게 용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그래서 나보고 말 안하는 지팡이 흉내를 내란 거냐. 흐흐흐. 내가 순순히 그걸 들어줄 것 같아?”
“어.”
“흐흐흐. 언령이라도 쓰시게.”
“어.”
“거짓말. 마력을 아끼려고 인간을 세뇌시킬 생각도 없으면서.”
막 세상에 태어난 주제에 꽤나 해박하다. 그레고릭의 영향인가. 아니면 나의 영혼 탓인가.
“마력을 써도 아까 같은 일이라면 손실이 없지.”
마력을 끌어 쓴다고 해도 방출이 아닌 몸에서 몸으로 순환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고작 더럽고 냄새나는 액체를 몸에 바른다고 굴복할 것 같아.”
“똥에다가 넣어주지.”
“......”
“내가 마을사람과 일을 그르치는 순간, 너의 머리는 그 사람의 엉덩이에 들어가게 될지도 몰라.”
“흐흐흐.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걱정은 한시름 접어도 될 듯 하군. 조용해진 데드엔딩을 지팡이 삼아 땅을 더듬으며 마을을 향해 나아간다. 숲을 완전히 빠져나오고 나무로 치장한 나의 모습은 확연히 눈에 띄었고 그 증거로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아낙네들이 가장 먼저 손짓을 해왔다.
“어따 대고 데드엔딩님의 앞에서 손짓이야.”
마왕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마도구가 거드름을 부리네. 일부로 강하게 땅을 짚어 조용히 시킨 다음 그녀들을 향해 걸어간다.
“어머나. 잘생겼어라.”
“뉘시여?”
“나는 용사의 계시를 받아 여행을 하고 있는 엘프입니다. 제가 별자리로 점을 쳐보니 이곳이 용사가 태어난 마을이던데. 사실이 맞습니까?”
목례를 할 수 없으니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아낙네들이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그중 아직 어려보이는 계집애는 꺄르르 웃기까지 했다.
“어머나. 엘프라니. 내가 엘프를 봤어.”
“아, 고넘 찾으러 왔구만. 그려. 잘 왔어.”
“엘프님? 제가 용사에 대해 이야기 해드릴게요.”
“어디서 새치기야. 남편도 있으면서.”
여인들이 서로의 옷과 머리를 당기며 싸우기 시작한다.
“역시 얼굴인가.”
조용히 속삭이는 데드엔딩의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고 다툼을 바라본다. 승자는 의외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할머니였다.
“그려. 총각. 용식이 찾으러 왔구만.”
“용식이가 아니라 용사입니다.”
“그려. 용식이. 그런데 이걸 어쩌나. 용식이 어제 세나랑 바람나서 떠났는데.”
“바람은 뭔 바람이에요. 그냥 둘이 눈 맞은거지.”
뒤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던 아낙네가 말을 정정했지만 할머니는 콧방귀를 뀌었다.
“용식이는 내 손자감으로 삼았단 말이여. 어려서부터 싹싹하고 착하고 일도 잘하는 것이 얼마나 보기 좋았는데.”
“용사, 아니 용식이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까?”
“그려. 따라와.”
할머니가 뒷짐을 지고 몸을 돌리니 아낙네들이 빨래 가져가라고 소리쳤지만 할머니가 성질을 부리니 지고 만다.
실세로군.
“영감. 나 왔수다.”
“빨래 하러간 여편네가 왜 남자를 데려와. 바람났어?”
“내 빨래를 열심히 하는데 허파에 바람이 숭숭 들어서 얼굴 반반한 사내 하나 데려왔지.”
“얼씨구. 그래서 자네는 뭔가.”
딱 봐도 평범한 마을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
“나는 용사의 계시를 받아 여행을 하고 있는 엘프입니다. 제가 별자리로 점을 쳐보니 이곳이 용사가 태어난 마을이던데. 용사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엘프여? 거참 살다살다 엘프를 다 보네. 아직 죽을 때가 안 되었어.”
감탄을 하면서 할아버지가 사라진다. 어어? 당황한 나를 할머니가 손짓으로 탁자로 불렀다. 할아버지는 찬장에서 술과 그릇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아들내미가 담가준거야. 마시게.”
“영감. 과실주로 되겠나.”
“그럼 뭐 여관에서 맥주라도 가져올까. 돈도 없는데 촌장이라고 매일 얻어먹으면 못 써.”
“허구한 날 반주하는 인간이 말은 잘해요.”
엘프에 놀라한 것도 잠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둘만의 시간에 빠져든다.
“노망났나봐.”
“워매. 지팡이가 말을 하네.”
깜짝 놀라는 할머니. 당황해서 변명거리를 떠올리려 애쓰는데.
“헛!”
데드엔딩이 실수를 깨달아 큰 소리로 놀라 버린다.
“이건 저희 마을에 대대로.......”
“여편네 호들갑 하고는. 엘프 지팡이 첨 봐? 원래 엘프 지팡이는 말하는 법이여.”
방금 엘프 처음만났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지금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타박하는 것일까. 내가 아는 말하는 엘프 지팡이는 세계수 가지로 만든 것 정도 일 텐데.
“그러고 보니 엘프가 나무랑 말한다던데.”
“그려. 원래 그런겨. 서쪽 산에 똥개도 말을 하는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마도구가 졸지에 놀이랑 동급이 된다. 놀이 굳이 구분을 하면 개머리가 달려있으니 이족보행을 해도 개가 맞긴 한데 똥은 안 먹는 걸로 아는데.
“흐흐흐. 말이 통하는 할배네.”
“그려. 내가 이 마을에서 제일 잘 나가는 할배여. 너도 술 한잔 할텨?”
“주면 감사히 마시지.”
“술은 다음에 마시기로 하고 용사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뭣이여? 지금 니가 시방. 우리집 과실주를 안 마시겠다고? 그러고도 엘프 맞아? 내 손녀가 열매를 따오고 며늘아기가 손수 으깨서 아들이 담근 과실주여. 그런데 시방. 이걸 안 마신다고.”
할아버지의 미간이 좁아지며 과실주를 그릇에 철철 따른다. 병에서 쏟아지는 보랏빛 액체는 어쩐지 그레고릭의 피를 떠올리게 했다.
“마셔. 어디 함 마셔보고도 그런 소리 하나 봐.”
“흐흐흐. 할배가 마시란다. 어쩔거냐. 엘프.”
어이가 없군. 하지만 용사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피를 한 사발 마셔도 괜찮다. 나무그릇을 쥐고 가까이 하니 나의 얼굴이 비춰 보인다.
평소의 나른한 표정이 모조리 사라진 무심한 입가와 나만이 발견할 수 있는 초조한 눈빛.
“옳지. 잘 마신다.”
벌컥벌컥 쏟아지는 달콤한 과실주가 목구멍을 때리며 매끄럽게 위장으로 쏟아진다. 그리고 그것을 채 다 마시기도 전에 한가지 이변이 발생했다.
「???의 열매로 만든 과실주를 섭취하여 용사로 각성했습니다.」
“푸흡!”
입안에 남아있던 과실주가 세차게 뿜어진다. 마치 목을 잘렸던 집사의 분수처럼 허공을 보랏빛으로 수놓다가 이내 땅으로 고두박질 한다. 탁자에 대부분 떨어졌지만 그 일부는 촌장의 얼굴에 닿아 수염에 방울방울 맺힌다.
“엘프놈아. 귀한 술을 왜 뿜어.”
“아니, 너무 당황해서.”
“그려. 맛있지. 끝내주지. 그래 트롤 둘이 먹다가 오우거가 죽어도 모를 겨.”
이내 기분이 풀렸는지 수염에 묻은 술을 털어내는 할아버지와 웃음을 흘리며 탁자에 뿜은 과실주를 헝겊으로 닦아내는 할머니. 너무 놀라 놓쳐버렸던 데드엔딩이 똑바로 일어선다.
“미쳤어?”
지팡이가 지 혼자 움직이는 상황에도, 마왕에게 욕을 하는 마도구에게도 아무런 관심을 줄 수 없었다.
아직 나의 눈에 환각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설마 이 괴상해 보이는 노인부부는 정체를 숨기고 있는 자였을까?
수많은 가정과 가설속에서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른다.
용사가 많이 약했다.
용사의 탄생치고는 받은 힘이 적었다.
끽해야 마을사람정도로.
“아아!”
그렇구나. 신이나 나라가 점찍어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저 귀한 무언가를 섭취함으로서 용사로 각성을 한 것이다.
“혹시, 이 과실주 드셔보셨습니까?”
“아니. 귀한 술이라 아껴먹으려고. 게다가 좀 더 숙성시켜야 맛나거든.”
“그럼 이 과실주를 저말고 먹은 사람이 있습니까? 용사라던가.”
“아, 용식이 그놈. 내가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야 했는데.”
슬쩍 운을 띄우자. 할아버지가 노발대발 화를 내며 탁자를 두드렸다. 그릇이 흔들릴 정도로 두드리고도 성에 안 차는지 과실주를 병째로 들어 마셨다.
“그려. 그놈이 옆 마을 친구가 보내준 편지를 갖다 준다고 집에 왔다가 과실주를 훔친겨.”
“훔치기는 우리 손녀가 따라줬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그게 훔친거지.”
그렇게 된 것이군. 용사는 과실주로 각성을 했던 것이야.
“응? 뭐시여. 눈이 침침해졌나. 헛것이 보이네.”
두 눈을 치켜뜬 촌장이 눈을 비비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혹시 ‘열매로 만든 과실주를 섭취하여 용사로 각성했습니다.’ 문구가 뜨지 않았습니까?”
“비슷혀.”
나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거 잘만 하면.
“축하합니다. 촌장은 지금 용사로 선택받았습니다.”
“내가 용사여? 참말로?”
“우리 영감이 왜 용사여. 촌장이지. 용사는 용식이잖여.”
“용식이도 용사고 촌장님도 용사입니다.”
그리고 나도 용사고. 돌연 마왕 겸 용사를 하게 되었다.
“그럼, 뭐 마왕도 쓰러트리고 그려?”
“흐흐흐.”
마왕의 면전에서 마왕을 쓰러트린다는 새내기 용사를 보며 데드엔딩이 폭소를 금치 못 하고 계속 웃는다.
“아뇨. 촌장은 마왕을 쓰러트리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쓰러지면 곤란하기도 하고. 마계를 향한 용사가 두명이라니 정말 끔찍하다.
“사실은 그 용식이란 존재가 세상을 멸망시킬 존재입니다.”
“용사라며.”
“예. 그런데 예언에 따르면 그는 결과적으로 세상을 멸망시킵니다. 그래서 그를 막아야 합니다.”
“그럼 내가 용식이를 막아야 혀?”
“그렇습니다.”
“거 좋네. 내 과실주를 함부로 훔친 도둑놈인데 벌을 받아야지.”
허허허 웃는 촌장겸 용사의 등을 할머니가 세게 때렸다. 매우 아픈 소리가 났음에도 할아버지는 계속 허허허 웃기만 했다.
“그게 무슨 소리여. 영감이 용식이를 막다니. 용식이 마을 떠났는데. 촌장을 그만하고 용식이를 쫒아가라고? 이 나이에?”
“그렇습니다.”
“그럼. 나는. 이 나이에 과부되라고?”
할머니나 눈을 부아리며 나에게 삿대질을 해왔다. 도대체 ‘이 나이’가 어떤 나이인데. 천년도 넘게 살 수 있는 마족에게 백년도 못 사는 인간의 나이는 우습다.
그러나 나는 뜻밖의 수확에 웃어 보이며 할머니에게 손을 뻗었다.
“저희랑 같이 가시죠.”
손을 흔드니. 남아있는 약간의 과실주가 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