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속사정
“전화해봤어?”
“어.”
“뭐래, 그 사람이 뭐라고 그랬어?”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성현은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며 물어오는 제 누나에게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제 누나는 매번 민서울에게 전화할 때마다 혹시나 다른 대답이 올까, 혹시나 제게 다시 돌아올까 하면서 물어왔다. 그리고 그런 누나의 모습은 미련하면서도 또 불쌍해 보였다. 그러길래 무슨 생각으로 이혼을 하자고 한 건지 바보 같은 제 누나의 모습에 성현은 깊게 한숨만 뱉었다.
‘나 그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다짜고짜 저를 붙잡고 결혼할 거라고 말을 하는 누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아마, 그때의 자신은 아무래도 반대를 했었던 거 같다.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자신을 키워주다시피 했던 누나가 마치 진짜 제 엄마 같아서 조금은 더 신중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누나가 제게 해줬던 것들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되면 그때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더 좋은 결혼을 시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제게 자신의 가정이 갖고 싶다고 말하는 누나의 모습을 보면서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를 제 자식처럼 키워준 누나는 진짜 자신의 가정이 생긴다면 자신의 남편과 자식에게는 누구보다 잘 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마지막에는 행복을 빌어주었었다. 그 동안 힘들어했던 누나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으니까 그걸로 됐다고, 그렇게 믿었다.
무섭게 비가 내리치던 그 해 여름, 이혼을 했다고 한 손에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누나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 그랬었다. 제 누나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 일 거라고, 믿었던 자신을 비웃듯이 누나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불행해 보였다. 누나의 이혼 이유와 모든 사정을 들어보면 아무리 동생이라고 해도, 제 누나가 어떻게 표현을 해도, 이건 명백한 제 누나의 잘못이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 누나의 행동은 누가 봐도 티비에 흔하게 나오는 사연 중 하나인 외도였으니까. 그럼에도 자신은 그 흔한 잔소리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래도 내 누나니까, 하는 마음에 누나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다시 행복해지길 바랐다. 근데 결국에는 이 미련하고 바보 같은 제 누나의 곁에는 그 누구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나마 제 핏줄이라고 어화둥둥 키워둔 도윤이라는 저에게 조카인 아들을 빼고는 누나는 참, 많이 외로워했었다.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해볼게, 도윤이 얘기했으니까 그 사람도 오겠지.”
“……응”
“그러니까 울지 좀 마,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 울면 더 못생겨진다.”
맞고 싶지, 김성현. 그제야 제 말에 웃어오는 누나의 얼굴을 보면서 성현은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제 누나를 보고 나쁜 년이라고 그러면 저 또한 나쁜 놈이 되어주겠다고. ‘민서울’이라는 그 남자에게는 제가 대신 수천 번, 수만 번 욕을 먹고 맞아도 좋으니까, 제 누나만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성현, 자신은 몇 번이고 이기적인 새끼라고 욕을 먹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했더랬다.
누가 뭐래도 제 누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제 혈육이자, 자신의 가족이었으니까.
은밀한 속사정
<괜찮아>
“왜 이렇게 떨어.”
“네?”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나를 보며 낮게 웃는 민서울의 얼굴에 괜히 분위기가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는지 그에게 잡힌 왼쪽 팔은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조금 불편해서요.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잡힌 손을 빼려고 하자 나를 잡는 그의 손이 더욱 세게 내 손목을 잡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무슨 일인지 슬퍼 보이는 그의 표정은 어디 간 건지 지금은 나를 놀리려고 하는 것밖에 보이질 않았다. 작가님,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하자 그제야 그는 웃으며 내 손목을 놔주었다.
“아, 아까 내가 물 쏟아서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요.”
민서울의 말에 발 밑을 보니 내 발뿐만이 아니라 그의 발 또한 이미 젖어있었다. 책상에서 물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동안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닦지도 않고 자고 있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의 책상에 있는 휴지로 물을 닦아내자 내 옆으로 와서 물 때문에 엉망이 된 그의 책상을 정리하고 있는 민서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었을까, 왜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을까,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애초에 답을 해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다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무엇보다 가장 궁금한 건 내가 무엇 때문에 그를 걱정하고 있는가, 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에게 물어본다고 한들 이에 대한 해답은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저, 아까 출판사에서 작가님을 급하게 찾는 것 같던데.”
“아, 그래요?”
“이따가 전화 한 번 다시 해보세요. 작가님께서 주무시는 것 같아서 못 바꿔드렸거든요.”
책상과 바닥을 닦느라 축축해진 휴지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민서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책상 위에 있던 종이 뭉치들을 나에게 주었다. 물기 묻은 손을 바지에 대충 닦고 그가 주는 것을 받았다. 정리하라고 준 건가, 궁금한 마음에 그가 준 종이들을 한 장씩 보았을 때 그때야 그가 준 것들이 그냥 종이들이 아니라 민서울의 다음 작품이 될 원고들이라는 걸 알았다. 편집 작업을 하기 위해서 매번 메일로 주는 원고들과는 다르게 종이로 받으니까 마치 출판 전 미리 보는 책 같아서 설렜다.
“전에 주신 원고들도 아직 못했는데, 왜……”
“그냥, 내 이야기를 먼저 주면 좀 더 빨리 우연 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 같아서.”
“…….”
“그런 마음에 준 거니까, 부담 가지진 마요.”
내가 대학시절 편집 작업을 단순 일거리로 삼아 했을 때 봤던 대부분의 작가들과 달리 그가 준 원고들 안에 있는 글씨들은 누가 봐도 직접 쓴 손 글씨였다. 어림잡아도 꽤 되는 양들을 하나하나 써 내려간 민서울의 필체들이 제법 정갈하고 예뻤다. 그는 집필할 때 이렇게 제 손으로 직접 글을 써 내려가는구나. 제 주인을 닮아서 손으로 썼음에도 간격이나 크기가 일정한 그의 필체들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자필로 글을 쓰면서 매일같이 나를 위해서 이 글들을 컴퓨터로 다시 작업했을 그의 행동에 떠올라 괜히 어울리지 않게 기뻤다.
혹시라도 바닥에 떨어져 젖게 될까 무슨 보물단지 마냥 내가 그의 원고들을 품에 가득히 껴안고선 고개를 위로 들었을 때 여태껏 나를 보고 있었던 건지,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비웃는 것도 아니고 환하게 웃는 것도 아닌 딱 민서울만이 지을 수 있는 웃음에 나는 머쓱해져 바닥만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보면서 왜 웃는지 이유도 알 수 없었건만 나를 보며 웃는 그의 웃음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 이번에 인터뷰 건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방송 출연은 안 한다고 계약할 때 말했던 걸로 아는데,”
- 방송이 아니라 신문사 인터뷰에요. 저희 쪽에서도 매번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제 이야기가 아무것도 모르는 남 입에 오르고 내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 방송 출연은 애초부터 하지 않겠다고 말을 했더니 이런 저를 놀리는 건지 그 덕분에 신문사와 잡지사는 서울, 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굳이 신간을 출판할 때가 아니더라도 한 달에 두서너 번은 매번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사는 게 남다르게 다른 것도 아니 것만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건지, 끝을 흐리며 부탁 아닌 부탁을 해오는 부장의 말에 서울은 긍정의 표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할 거면 빠른 시일에 해주면 좋겠다고 전해줘요.”
- 네, 진짜 감사해요! 이번에도 거절하시면 어떡하나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아, 그리고 은우연 씨 있잖아요, 편집 작업이 아니라 저랑 같이 집필할 겁니다. 편집 담당자님에게 전해주세요.”
네? 제 말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남자의 목소리 같지 않게 고음으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서울은 핸드폰을 제 귀에서 잠깐 떼었다가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뭐가 어때서, 이번 작품은 애초에 단독으로 하려던 거 아니었어. 그렇다고 편집 작가인 사람한테 글쟁이를 하라고 하냐? 아주, 네가 출판사지. 어떻게 된 게 제 맘대로 하는 건 어렸을 때랑 하나도 변한 게 없냐. 어느 순간부터 편하게 오가는 대화에 윤기는 작게 웃었다.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면서도 결국에는 제게 백기를 들어주는 호영의 행동을 알기에 윤기는 다른 때와 달리 부탁한다, 라고 짧게 말을 붙였다.
- 애초에 너랑 계약하는 게 아니었어. ‘나무’랑 계약하려고 했던 게 다 나 엿 먹이려고 그런 거지.
“이왕이면 친구 있는 출판사랑 계약하면 좋잖아.”
서울은 전화 반대편으로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 호영의 말에 대답해주다가 또다시 이어진 잔소리에 조용히 통화를 끊었다. 누가 보면 자신의 엄마라고 할 만큼 한 번 말을 꺼내면 도통 멈추질 않는 호영의 말에 서울은 제가 호영과 친구를 하면서부터 티 안 나게 전화를 끊는 법을 터득해나갔다. 곧이어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알림 소리에 서울은 그럼 그렇지, 고개를 저으면서 제게 온 문자를 확인했다.
‘애초에 네가 필요하지도 않은 편집 작가를 둔다고 할 때부터 수상했다.’
‘갑자기 뭔 바람이 불어서 그런 거야? 언제부터 네가 그렇게 곁에 있는 사람 신경 썼다고.’
‘그렇게 좋아했던 네 아내한테도 인색했으면서.’
모르겠다. 제 자신이 왜 이러는지, 워낙에 제 곁을 내주는 것에 있어서 익숙하지 않았고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자신이 왜 그렇게 그 아이는 제 옆에 못 둬서 안달인지 자신의 마음조차 헤아리기 어려웠다. 괜시래 아까 방에서 바닥을 닦는 와중에도 제가 준 원고를 소중한 물건인 마냥 품에 껴안으며 저를 올려다보던 그 아이의 모습에 제 발끝이 저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자꾸만 그 아이에게서 그동안 제가 갈구하던 모든 걸 해갈하고 싶어 하는지, 처음 보는 이런 제 모습이 서울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 아이가 왔다간 그 짧은 시간에 베어버린 건지, 제 방에 남아있는 우연의 냄새에 서울은 문득, 그 아이가, 우연이 보고 싶어졌다. 그런 제 생각 때문에 그런 건지 어느새 자신의 발은 제가 자각하기도 전에 우연의 방을 향하고 있었다.
* * *
“뭐라고 써야 되는 거야.”
그와 함께 글을 써간다는 사실은 좋았지만 단순히 편집만 해왔던 내게 민서울의 부탁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매끄럽게 써놓은 그의 글들을 아무리 읽어봐도 내가 어떻게 바꿔야 할지 막막했다. 내 이야기를 써달라고 했는데,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할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지금 그가 작업하고 있는 이번 작품은 장르가 로맨스 쪽에 속하는 것 같아서 그 흔한 연애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나에게 이런 장르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건 정말이지 자신이 없었다.
‘내가 너를 향한 감정에 굴복함으로써 나에게는 안정감이 찾아왔다.’
그가 나에게 준 원고들을 다 읽어나가면 그래도 조금이라도 답을 얻을 수 있을까 했었는데, 마지막에 남아있는 한 줄까지 모두 읽어나가자 답이 보이기는커녕 왠지 바꾸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이 글들을 써 내려갔을 지가 마지막 문장을 읽어보면 눈에 선하게 보였다. 그런데 내가 이런 문장들은 괜히 내 맘대로 바꿔 나갔다가 민서울뿐만이 아니라 후에 그의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도 손해만 끼치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고치지 못하는 습관처럼 계속해서 물어뜯은 내 손톱이 어느새 뭉툭하게 짧아져 있었다.
“우선 써보고 아니라고 하면 다시 쓰면 되겠지.”
그래, 뭐 안되면 작가님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되니까. 두 시간 넘게 앉아서 내린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작정 써 내려가고 나서 그 후에 일들은 나중에 생각하는 수밖에. 지금 내가 바보같이 보내버린 두 시간만 하더라도 이미 편집 작업 반은 해나갔을 시간이었으니까. 그의 옆에서 도와주려고 온 내가, 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내가 한 글자도 써 내려가지 못하는 동안 그는 또 이미 작업을 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그가 써 내려간 글들을 바꾸기는 너무 큰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그가 써놓은 마지막 내용을 이어서 써야겠다는 생각에 옆에 있는 에이포 용지를 가져와 펜으로 천천히 글자를 써나갔다. 컴퓨터로 작업하면 좀 더 쉽게 쓸 수 있었지만 원고를 직접 자필로 써 내려가는 민서울에게 컴퓨터에 나와 있는 필체들을 그대로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글을 잘 못쓰더라도 내가 그를 위해서 이렇게 맞춰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내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했다.
“내가 좀, 들어가도 되나?”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곧이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내 몸이 잠깐 움찔했던 것도 같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내 방 앞에 서있는 민서울을 보며 작게 대답하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방으로 들어왔다. 지금 작업하고 있는 거예요? 어느새 그는 글을 쓰고 있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괜히 느껴지는 창피함에 한 손으로 내가 써놓은 내용을 가리자 그의 손이 불쑥 내 손을 잡아왔다.
“어차피 내가 다 볼 텐데 뭐가 부끄러워요.”
“착상 단계도 안 갖고 바로 집필한 거라 많이 부족해서요.”
글에서 내 손이 치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내 손을 잡고 있었다. 평소에 차가운 내 손이 그의 온도에 의해서 같이 뜨거워질 만큼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그가 내 방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가 볼 내용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눈은 내가 써놓은 그 몇 줄도 되지 않는 내용을 읽고 또 읽어나갔다.
“왜 내 글을 바꾸지 않고 이어서 썼어요?”
내가 쓴 글들을 계속해서 보던 그가 시선을 글에서 나에게로 옮겼다. 이유라고는 거창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글을 내가 맘대로 바꾸기에는 너무 아까웠으니까. 내 대답을 들은 민서울은 마치 제 방인 것처럼 편안히 침대에 앉았다.
“이런 방식으로 진행해나가고 싶은 것도 우연 씨 마음이라면, 그것도 나름 좋네요.”
“…….”
“뭐, 어려운 부분은 없어요? 내가 도와줘야 될 부분이 있을 거 같은데.”
내가 자신에게 물어볼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그는 나를 보며 나른하게 웃었다. 장르가 로맨스인데, 제가 연애를 제대로 해본 게 드물거든요. 내 말을 듣던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제가 좀 낯가림도 심하고 그래서 이렇다 할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말을 하자 그는 내가 할 말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조금은 성급하게 물어왔다.
“그럼, 고백 받아본 적은 없어요?”
“네?”
어느 샌가 주제가 나의 고백으로 넘어가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뜬금없이 나에게 물어오는 민서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받아봤는데. 끝을 흐리며 대답하는 내 말이 흡족했는지 그는 자신의 눈이 다 접힐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럼 됐고, 다행이네. 무엇이 다행인 건지 여전히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말을 알 수가 없었다. 여중, 여고, 여대를 졸업하는 바람에 고백을 하기에도, 그렇다고 고백을 받기에도 항상 부적절한 상황 속에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질문은 흔하게들 하는 연애조차도 감정소모라고 여기며 살아온 나에게는 참으로도 어려웠다. 언제부터 그가 나에 대해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았는지, 더 이상 나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오지는 않았지만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듯한 그의 시선이 왜인지 부담스러워졌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마음을 모르겠어요, 아무리 글을 읽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가 어려워요. 그렇다고 직접 만나볼 수도 없어서……”
“만나보면 되죠.”
“네?”
“이 주인공은 나를 모티브로 삼고 만든 건데, 물어봐요.”
곧이어 나에게 자신이자, 이 소설 속의 주인공에 대해 천천히 말을 해주는 그의 얼굴이 꼭 예닐곱 살의 아이처럼 덧없이 맑아 보였다. 그런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에게 안 적어도 돼요? 라고 묻는 그의 말에 나는 재빨리 책상에 놓인 메모장을 집었다. 아까 전, 그가 나를 보며 웃었을 때처럼 또다시 내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동경하던 작가를 가까이서 봐서 그런가, 민서울만 보면 언제부터인가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짝사랑하는 여고생 같았다.
“처음 글 쓰는 건가?”
“아, 네.”
“처음 시작하면 다 어려울 수 있어요. 나도 지금까지 착상 단계에만 몇 년이 걸리고 막상 집필 들어가도 또 몇 년이 걸리니까.”
“……다시 쓸까요?”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다시 써야 될 것 같은 느낌에 그에게 물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라고 대답을 해왔다. 민서울의 이름을 걸고 쓰는 작품인데 그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맡겨도 되는 건가, 오히려 그보다 내가 더 걱정이 되었다. 나는 그냥 한 번 좋은 경험이라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그에게는 이게 또 다른 하나의 작품이 되는 셈이었으니까, 이 작품도 어쩌면 착상하는 시간만 몇 년이 걸렸을지 모르는데 몇 시간도 안 걸려서 작업에 들어간 내가 폐를 끼치게 될까 하는 마음은 이제 걱정을 넘어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많이 걱정돼요?"
“……네. 괜히 제가 민폐만 끼칠까 봐 좀 두려워요.”
“걱정하지 마요, 앞으로 내가 도와주면 되니까.”
나긋한 말투로 말을 꺼낸 그는 내가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때 침대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조금만 숨을 크게 쉬면 바로 코앞에서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까만 눈동자에는 당황한 표정을 한 내가 가득히 비쳤다. 괜스레 민서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길을 피했을 때 그는 좀 더 가까이 다가와서 나에게 말을 했다. 잘못하면 코끝이 닿을 거리여서 그런지 평소에는 잘 몰랐던 그의 스킨 냄새가 은은하게 내 코끝을 맴돌았다.
“혹시나 잘못돼도 책임은 내가 다 질 거야."
“…….”
“그러니까, 서툴러도 돼요.”
괜찮아,
내가, 네 옆에 있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