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헌터 (Last hunter)
: ‘최후의 사냥’ 이후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
본래는 가장 마지막에 각성한 헌터들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최근엔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헌팅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지난날의 옛 영광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집착하는 자들과, 더 이상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음이 명백한 던전을 여전히 하이에나처럼 기웃거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어리석음을 일컬어 조롱하는 신조어로 쓰인다.
***
바스락-.
용준은 천천히 던전의 벽을 더듬었다.
이미 3시간 동안이나 조사를 진행했지만, 아직까지 결과가 영 시원치 않다.
던전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만 캘 수 있는 약초들과 구석에 떨어져 있던 손톱보다 조그마한 마정석 몇 개 주운 것이 수확의 전부다.
“으아, 벌써 최하층인가.”
현재 그가 있는 곳은 서울 삼성동 코엑스 근처에 생성된 던전으로, 여러 갈래의 길이 지하로 뻗어있는 형태다.
점차 아래로 내려가며 신중히 탐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 끝에 도달해 버렸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막다른 벽이 보였다.
새카맣다.
더는 나아갈 곳도, 돌아볼 곳도 없다.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갈까. 읏차.”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자 뿌드득 소리가 났다.
헌터로 단련된 몸인데도 오랜 시간 구부정한 자세로 있었던 것이 무리였나 보다.
용준은 몸을 돌려 던전 입구로 다시 향했다.
복잡한 미로 같은 곳이지만 딱히 지도가 필요하진 않다.
이 코엑스 던전은 이달만 해도 벌써 4번째 방문이다. 그러다보니 이곳의 꼬부랑길들을 전부 다 외워버렸다.
라스트 헌터.
용준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던전의 하이에나.
끝나버린 영광의 흔적을 망령처럼 어슬렁거리는 자.
사실, ‘최후의 사냥’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알람창이 뜬 이 후에 보스급의 몬스터들은 정말 완전히 사라졌지만 저급 몬스터들 소수는 남아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마저도 곧 기업과 국가에 의해 경쟁적으로 청소되었다. 마치 대형마트의 마지막 떨이 상품들을 서둘러 정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저급 몬스터들은 예전엔 대부분의 헌터들이 비루한 잡놈 취급을 했던 약골 몬스터로 잡아도 큰돈이 안 된다고 다들 싫어했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그리고 일방적인 사냥 종료 통보를 받은 후로는 꿩 대신 닭이라고 그나마 그놈들을 사냥하는 맛이라도 있었는데 이젠 정말 그것도 다 사라져 버렸다.
최근에는 겨우 약초들 몇 가지를 채집하는 것 말고는 별게 없다.
요즘 용준이 기록하는 성적들이 계속 이렇다.
하이에나처럼 남이 다 먹고 버린 쓰레기들을 주우러 어슬렁 돌아다니는 것 같지만, 사실 그가 찢어지게 가난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용준의 나이도 올해로 서른 셋.
헌터로 쌓은 경력만 십삼 년이다.
성실하고 꼼꼼한 그다.
정말 억 소리가 나도록 벌었지만 한 푼도 허투루 써본 적이 없다.
그동안 헌터 일을 하며 꾸준히 벌어놓은 돈은 정말 필요할 때만 간간히 쓰였을 뿐, 나머지는 아직 통장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평생 다른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편하게 다 쓰고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니 결코 돈 때문이 아니다.
그는 돈이 아닌 추억을 주우러 여전히 던전을 오고 있다.
이곳은 지난날 그의 평생의 직장이자 전장이었다.
고아인 자신이 떳떳한 한사람의 몫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기반이었다.
목숨이 위험했던 상황도 있었지만, 동료와 함께 협심해 위기를 극복하고 믿을 수 없는 모험들을 했던 짜릿한 흥분의 순간들도 많이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갑자기 ‘자, 오늘부로 다 끝났습니다. 모두 원래의 삶과 위치로 돌아가세요!’ 한다고 쉬이 버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제 그냥 이 남자에게 던전이란 버릴 수 없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뿐이다.
용준은 오히려 자신과 달리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냥이 종료되었다는 마지막 메시지가 뜬 이후로 채 1년이 되지 않았는데, 모두가 이미 적응을 마친 것처럼 보인다.
자신만 빼고서.
때문에 그는 사람들이 던전 사냥에 그토록 열광했었던 과거가 사실은 자신만이 꾸었었던 달콤한 꿈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으아아아! 정말 또 던전에 들어가시려고요? 아, 정말. 이젠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주변에서 들리는 소란에 용준은 정신을 차렸다.
아주 잠깐 상념에 빠져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밝은 빛이 잔뜩 들어오고 있는 던전 입구 근처까지 돌아와 있었다.
“이거 놔! 난 죽어도 던전에서 죽을 거야!”
젊은 청년과 새침한 노인이 용준이 막 빠져나온 입구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미친 노인과 손자인가?’
사실 이런 장면은 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젊은 시절에 던전 관련 일에 애착을 가지고 종사하셨던 어르신들이 심약해져 폐허처럼 변해버린 던전으로 가출하는 모습은 생각보다 자주 눈에 밟힌다.
또한 용준으로서는 어르신들의 그 마음을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이거 놓으라니까!”
미친 노인이라 그런지 힘도 좋다.
노인은 가볍게 청년의 팔을 뿌리치고 던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오! 진짜, 저 고집쟁이 영감탱이가! 아, 잠깐만! 그럼 그냥 같이 가요. 아, 넘어진다니까요! 천천히 좀 가요!”
청년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노인을 따라 던전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힘내요, 마음씨 고운 청년.’
요즘 저렇게 던전에 미친 어르신들을 챙겨주는 착한 청년보기가 쉽지 않다. 잘 없다. 영감탱이라고 걸쭉하게 말하긴 했지만 끝까지 노인을 걱정하고 따라 다니지 않는가.
강렬한 인상의 두 사람이 사라진 곳을 보며 용준은 속으로 청년을 응원했다. 그리고 곧 코엑스 던전 영역을 빠져나왔다.
용준은 근처에 주차 해둔 자신의 차로 갔다.
곧 흰색 포르쉐 카이엔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 단위가 큰 물자들을 거래하던 기업체에서 받은 선물로 용준이 던전 사냥 작업을 나갈 때마다 애용하는 차다.
문을 열고 자리를 잡고 앉아 막 시동을 걸려고 손을 뻗는데,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띠리리리링-.
발신자 표시 화면에 친구 놈 이름이 떴다.
[이서준]
톡-.
바로 통화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어, 왜?”
- ...뭐? 왜에? 야, 오늘 무슨 날인지 잊었냐?
“음?”
- 하, 인마. 이 자식 이거 완전 빠져가지고. 너 요새 정신 똑바로 안 차리지? 오늘 우리 모임이잖아. 내가 너 이럴 줄 알았다. 혹시나 하고 확인 차 전화했는데, 해보길 잘했네.
“어라? 오늘이 벌써 셋째 주 토요일이야?”
- 그래, 이놈아.
“아아, 오케이. 8시?”
- 어, 8시. 늘 만나던 연탄구이 삼겹살집. 늦지 마라.
“알았다. 그럼 이따가 보자.”
- 오냐.
뚝-.
용준은 전화를 끊고 시계를 확인했다.
4:08 pm
약속시간인 8시까지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흠, 아직 넉넉하네. 팔고 가도 되겠다.”
부우우우웅-.
시동을 걸고 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논현역에 있는 몬스터 마켓이다.
지금 그가 있는 코엑스에서 그리 멀지 않다.
차창 밖으로 자동차가 달리는 속도에 맞춰 찬찬히 변하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지나자 던전 바로 앞에서 보였던 그 주변과는 상반된 분위기기 느껴진다.
딱 5분 정도만 차로 달려 나오면 낙후된 땅에서 벗어나 완전한 문명의 도시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