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연재 > 무협물
풍운검협전
작가 : 송진용
작품등록일 : 2016.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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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화
작성일 : 16-07-14     조회 : 797     추천 : 0     분량 : 5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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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늙어서 메말라 한 톨의 그리움도 담을 수 없는 퍼석거리는 가슴을 갖게 되어도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때를 잊을 수는 없을 거예요.

 

 

 

 

 

 제1장 추억

 

 

 

 아미산(峨眉山)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온 청년이 있었다. 아미산에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아미산에서 자라 아미산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본 적이 없으니 그렇다.

 사방 오백 리에 걸쳐 뻗어 있는 아미산은 그 봉우리만도 칠십이 봉이나 되었는데, 청년, 운몽(雲夢)은 아미산 남쪽 구름 속에 솟아 있는 학정봉(鶴情峰)에서 자랐다.

 깎아지른 벼랑에 잔도(棧道)를 내고 그 중간의 우묵한 곳에 의지하여 위태롭게 세운 도관(道觀)이 곧 그의 집이자 고향이면서 수행처였던 것이다.

 그는 지난 이십 년 동안 사부인 광명존자(光明尊者)와 단둘이 그곳에서 살았다.

 그곳은 <반정도관(半情道觀)>이라는 알쏭달쏭한 이름의 현판을 걸고 있는 도관이었다.

 운몽이 몇 번이나 사부에게 도관의 저 이상한 이름에 대하여 물었으나 사부는 오직 희미한 미소 한줄기로 대답했을 뿐이다.

 사부는 바위처럼 말이 없었고, 홀로 도를 수행하는 데 매진하느라고 나이를 먹는 것도 잊은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반인반선(半人半仙)의 경지에 들었지만 운몽은 그렇지 않았다.

 사부가 나이 들고 점점 신선 같아져 갈수록 그는 혈기왕성한 젊은이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과 구름과 물을 벗하고, 꽃과 새와 나무와 바위를 말동무 삼아 살아온 지 어느덧 스무 해가 지나서 운몽은 턱 밑에 수염이 거뭇거뭇한 청년이 되었다.

 그동안 사부에게서 배운 무공이 하늘을 찌를 듯하지만 스스로는 제가 배운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비교할 상대라고는 사부뿐인데, 사부는 하늘같기만 해서 까마득히 높았고, 가르쳐줄 때마다 늘 부족하다고 꾸짖을 뿐이니 운몽은 제 공부가 미천한 줄 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유일한 낙은 반정도관을 나와 적막한 산중을 배회하며 홀로 유유자적하는 것이었다.

 그건 오래된 운몽만의 취향이면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만의 아픔이고 그리움의 발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실 운몽이 도관을 나와 멀리까지 산중을 배회하는 일은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온 일이었다.

 남들이 알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운몽에게 그것은 여섯 살 때부터 익숙해져 있는 놀이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때 도관을 나오던 것과, 지금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여섯 살 때에는 순수한 마음 하나였고, 지금은 하나의 상념으로 인해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그렇다.

 세상을 모르고 자랐으니 세상에 가득한 온갖 괴로움을 몰랐기에 늘 평안할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자 저절로 한 가지 고통을 알게 되었으니 연정(戀情)이라는 것이었다.

 그건 누가 가르쳐 주어서 알게 되는 게 아니고, 누가 가린다고 해서 모르게 되는 게 아니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열매가 익듯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아니던가.

 운몽은 한 여인을 못 견디게 사모하고 있었다. 그녀가 닿을 수 없는 사람이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기에 더욱 애타고 괴롭다. 그런 날들이 무려 사 년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훨씬 오래전의 일이나, 마음속에 연정이 싹트고, 그래서 스스로 괴로워지기 시작한 게 사 년이니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마음속에 연정이라는 것이 날아 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하면서 운몽은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았다. 한시도 그녀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고, 촌각이라도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반정도관을 빠져나와 이처럼 숲 속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휴―”

 운몽의 탄식에 땅이 꺼질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고 기운이 빠지면서 가슴이 무거운 바윗돌에 눌린 것처럼 답답해졌다. 숨 쉬기도 괴로워진다.

 운몽은 멍하니 주저앉아 아득히 솟아 있는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금정이 있고, 그 아래 깊은 숲 속에 그녀가 살고 있다.

 ‘그녀가 천 리 길에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무얼 망설인단 말이냐? 너에게는 용기가 없다. 진정 용기가 있는 사내대장부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의 유황불 속에 있다고 해도 기꺼이 뛰어들어 만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를 위해서라면 내 몸을 태우는 고통을 무릅쓰고 구해내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녀는 고작 한 길의 돌담 안에 갇혀 있을 뿐인데 이렇게 애만 태우는 건 얼마나 못난 짓이냐.’

 자기 자신에 대한 질책을 늘어놓는 동안 운몽의 멍하던 눈에 이글거리는 광채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래, 가자! 누가 나를 막을 수 있단 말이냐? 설혹 나를 막는다고 해도 누가 그녀에게 향한 내 마음마저 막을 것이냐? 나를 막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의 나약함일 뿐이다.”

 크게 용기를 낸 운몽이 자리에서 벌떡 뛰어 일어났다.

 구름 속으로 우뚝 솟아 있는 높은 봉우리를 넘고 깊은 골짜기와 개울을 건너고 울창한 수림을 지나야 하지만 그런 건 이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번 불타오르는 마음에 사로잡히자 운몽은 그대로 불새가 되었다. 그녀에 대한 불같은 그리움이 그를 맹렬하게 떠민다.

 팟!

 그의 몸이 허공을 가르고 사라졌다. 순간적인 일이라 그림자마저 남지 않았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한줄기 돌개바람이 불어닥쳐서 풀잎들을 어지럽게 말아 올렸다.

 운몽은 그대로 바람이 되었다. 울창한 숲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질풍이다. 거침없다.

 바위가 앞을 가로막으면 그것을 뛰어넘었고, 벼랑이 막아서면 날랜 원숭이처럼 타넘었으며, 작은 골짜기는 새처럼 훌훌 날아 건너고, 넓은 개울도 제비처럼 물을 차며 건너뛰었다.

 그리하여 운대봉(雲臺峰) 높고 큰 산 봉우리를 올라가는데 채 한 시진이 걸리지 않았다.

 새라고 해도 그처럼 빠르지 못할 것이고, 원숭이라고 해도 그처럼 끈질기지 못할 것이다.

 한 시진 가까이 가파른 산을 뛰고 날며 치달렸지만 운몽은 여전히 그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숨결조차 처음과 다름없이 힘차고 일정하다.

 누구나 운대봉 정상에 서면 구름이 저 아래 바다처럼 펼쳐져 있고, 그 위로 우뚝우뚝 솟아 있는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그 많은 봉우리들 중 멀리 서쪽에 불쑥 솟아 있는 봉우리가 아미산의 제일봉인 금정(金頂)인데, 천 길의 벼랑인 촬신애(撮身崖) 아래로 내려가 스무 개의 능선을 넘고 서른 개의 사찰과 암자를 지나 호욕교(虎浴橋)를 건너면 거기 복호사(伏虎寺)가 있었다.

 아미산에 흩어져 있는 여러 사찰과 암자들 중에서도 그 역사와 전통이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곳이면서, 무림에 여승들의 문파로 잘 알려진 아미파(峨眉派)의 발원지이기도 한 곳이 복호사였다.

 운대봉 정상에 뛰어오른 운몽은 그곳에서 한 사람을 보고 크게 놀라 저도 모르게 “억!” 하고 소리쳤다.

 

 십사 년 전이다.

 그러니 운몽이 그녀를 만난 건 아주 어렸을 때였다.

 여섯 살.

 나서부터 산속에서만 살았기에 어린 운몽에게 아미산은 사부 다음으로 가까운 친구이고 사부의 무릎 다음으로 행복한 장소였다.

 종아리를 때리며 글을 가르치고 도학(道學)을 강론할 때의 사부는 엄하고 무서운 분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시간에 마주하는 사부는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무뚝뚝하고 바위처럼 무겁기만 했다.

 그러나 운몽은 사부가 잠자는 제 머리맡에 찾아와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때로는 볼을 비비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럴 때면 운몽은 행여 사부가 달아날까 봐 눈을 꼭 감고 잠자는 척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 아침이 될 때까지 이렇게 제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매번 아침에 눈을 떠보면 저 혼자였다.

 운몽은 한 번도 사부가 제 곁을 떠나는 걸 보지 못했다. 참고 참다가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그날, 운명의 그날, 사부는 오전 공부를 끝내고 길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운몽은 사부가 매일 오전 한 시진씩 운기조식을 하며 무아의 경지에 노닌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그저, 앉아서도 잠을 자는 신통한 사부로 보일 뿐이었다.

 봄날이었다.

 따뜻한 봄볕 아래 반정도관의 손바닥만 한 뜰에 턱을 괴고 앉아 무료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운몽은 아름답게 지저귀는 노란 새를 보았다.

 그것의 노래가 어찌나 맑고 고왔던지, 온 산에 쩡쩡 울리는 그 노래에 취해서 어린 운몽은 저도 모르게 도관을 나섰다.

 산에 있는 나무와 풀과 꽃과 새와 나비…….

 작고 예쁜 온갖 동물과 식물이 모두 운몽의 친구였는데, 그 새는 운몽을 낯설어했다.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했다.

 “새야, 이리 와. 가지 마. 나에게 노래를 들려줘. 나는 반정도관에 사는 운몽이란다. 너는 누구니? 어디에서 왔어? 제발 가지 말라니까.”

 어린 운몽은 새가 자꾸만 저를 피해 달아나는 게 안타까웠다.

 아주 멀리 날아가 버리면 단념하련만, 노란 새는 운몽의 눈 밖으로 달아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그곳에서, 마치 운몽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신기해하는 것처럼, 그만큼의 거리만 두고 달아나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라보고 노래하다가 운몽이 팔을 벌리고 다가오면 다시 포로롱, 날아가는 것이다.

 운몽의 어린 마음에는 조금만 다가가면 새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새가 제 마음을 알아줄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자꾸만 반정도관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렇게 한동안 운몽을 이리저리 끌고다니며 애타게 하던 새는 마지막 노래를 맑고 힘차게 불러주더니 학정봉 아래로 단번에 날아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운몽은 새를 포기할 수 없었다. 저 아래, 시커먼 숲을 지나고 골짜기를 지나면 거기 노란 새가 저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환상에 빠졌다.

 왜 이제 왔느냐고,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심심했는지, 나 혼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느냐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투정을 부릴 것 같았다.

 운몽은 그런 저만의 환상에 빠져서 제가 어느새 학정봉 아래까지 내려와 있다는 것도 몰랐다.

 깊은 숲을 지나는 게 무섭지 않았고, 길도 없는 골짜기를 헤쳐 나아가는 게 힘들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골짜기, 맑은 물이 콸콸거리며 흘러가는 개울가에 섰을 때 운몽은 비로소 제가 길을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앞에는 여울지며 급하게 흐르는 개울이다. 건널 수가 없다. 돌아가는 길은 잊었다. 아무리 두리번거려 보아도 방금 제가 어느 수풀에서 나왔던 건지 알아낼 수가 없다.

 보이는 수풀이 모두 같았고, 보이는 바위와 나무들이 모두 비슷비슷해서 한 형제들인 것 같았다.

 목을 길게 빼보아도 새는 보이지 않았고, 우거진 숲에 가려서 학정봉도 보이지 않았다.

 노란 새의 고운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사부님의 기침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황량한 바람 소리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쏴, 쏴, 하고 들려올 뿐이다.

 운몽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 천지간에 오직 저 혼자인 것 같은 막막함이 밀려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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